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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서의 죽음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0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독일인과 독일문학은 묘한 '끌림'이 있다.
동성애 역시 묘한 '끌림'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이성애자일지라도 한번쯤은 멋진 동성에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던 경험을 누구나 갖고 있지 않은가..
독일문학 역시 묘한 '끌림'이 있다. 재미없고 어렵다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독일문학에 깊숙이 빠지곤 한다.
헤르만 헤세, 니체, 토마스 만 등등...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토마스 만의 단편으로 1912년에 쓰여졌으니 꼭 100여전 작품이다.
베네치아로 여행을 온 어느 노작가가 십대 소년의 모습에 매료되어 콜레라가 창궐하는 베네치아를 떠나지 못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작품을 읽기에 앞서 이미 전체적인 줄거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서의 호기심은 반감되었지만 '동성애를 대문호는 어떻게 표현했을까?'라는 궁금증에 이끌려 책장을 넘겼다.
처음에는 다소 지겹고 유치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노회한 남성이 새파란 젊은 청년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에 대해 나도 모르게 불쾌감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토마스 만은 단순한 통속작가가 아니며,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역시 단순한 로맨스 소설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다.
작품은 예술의 절대미(美)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자 이런 욕망에 대한 작가의 고백이라고 하겠다.
타치오에 대한 아센바흐의 사랑은 마치 절대미를 추구하는 예술가의 그것과 닮아 있다.
욕망에 무릎 꿇거나 욕망을 죽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자기 자신을 '죽임'으로써 욕망을 달성시킨다.
아센바흐는 소년의 외모가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창백하고 우아하며 내성적으로 보이는 그 소년의 얼굴은 벌꿀색 머리칼에 에워싸여 있었다. 곧게 뻗은 코와 사랑스런 입, 감미롭고 신적인 진지한 표정은 가장 고귀한 시대의 그리스 조각품을 생각나게 했다. 더없이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에도 하고, 그의 모습은 바라보는 자가 자연에서도 조형 예술품에서도 그만한 성공작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유일무이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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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오후 아센바흐는 아름다운 소년의 뒤를 따라가다가 병든 도시 안쪽의 어지럽게 뒤엉킨 곳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미로처럼 보이는 골목과 운하들. 다리와 광장들이 다 그게 그것처럼 똑같이 생각되어 그는 그만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 방위조차 더 이상 가늠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오로지 자신이 그리워하며 쫓아온 대상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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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는 몸이 불편해서 평소보다 늦은 아침 시갓에 해변 호텔을 나왔다. 그는 딱히 육체적인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현기증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와 아울러 불안감이 급격히 치솟아 올랐고 그것이 외부 세계와 관계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존재와 관계되는 건지 분명치 않은, 탈출구와 전망이 없다는 감정에 사로 잡혔다.
-토마스 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中-
사랑의 끝은 어디일까?
소년 타치오를 애처롭게 찾아 헤매는 주인공 아센바흐의 심경이 완성될 수 없는 예술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지 않은가.
예술의 끝은 어디일까?
사랑이 영원하다는 건 끝이 없다는 뜻이다. 예술 또한 영원하다. 이 말은 곧 예술의 끝이 없다는 뜻이다.
끝이 없는 사랑과 예술...
그 끝은 바로 '죽음'가 맞닿아 있는 건 아닐런지...
생전 토마스 만은 동성애적 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작가의 이력을 근거로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단순히 '동성애'적 관점으로만 바라본다면,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작품의 주제마저 왜곡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