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스크로 가는 기차 (양장)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최규석 그림 / 북인더갭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일찍부터 읽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평소에도 워낙 '기차'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터라 제목에 '기차'가 들어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끌렸습니다.

 

기차란, 문명의 상징임과 동시에 '떠남' '동경'과 같은 함축적인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죠.

저는 특히 새벽 동틀 무렵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마치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러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어떤 '대상'과 조우하는 것 같은 아련한 느낌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느낌, 저만의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이 작품 속에는 저처럼 '기차'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일단, 프리츠 오르트만이라는 저자가 그렇습니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독일 작가인데요, 소설가로 불리기보다는 교사로 불리운 세월이 훨씬 더 길고 자연스럽지 않나 싶습니다. 그는 1925년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해안가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킬에서 성장했으며, 전쟁 포로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박사 학위를 받고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작품을 쓰다가 1995년 사망합니다. 작품으로는 소설집 <럼주차>와 장편 <여러 색깔 유리잔>등이 있다고 합니다. 

 

아주 간단한 약력이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극히 일부이자 거의 전부라 하겠습니다. 나도 죽으면 이처럼 몇 줄의 간략한 객관적인 사실만으로 남겨지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웬지 '센치'해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왠지 모르게 이 사람 자꾸만 끌립니다. 여덟 편의 단편으로 엮어진 작품집을 다 읽고 나서도 자꾸만 떠오릅니다. 작품 속 주인공들을 생각하는가 싶으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오르트만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작품 속 등장인물을 작가와 연관시키는 일은 흔하지만, 오르트만처럼 작품 속 등장인물과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는 드문 편이지요. 어쩌면 철저하게 베일에 싸인 작가의 개인적 삶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누구이며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다갔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곰스크행 기차를 애타게 기다리는 주인공도 오르트만이고,,,

목적지를 모르는 여객선 위의 여행가이드 역시 오르트만이요,,,

럼주차를 마시기 위해 위험한 바다를 건넌 사람 역시 오르트만이 아닐까 착각 또 착각 하게 됩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곰스크로 가는 기차>와 <배는 북서쪽으로> 그리고 <두 시절의 만남>이라는 작품이 저에겐 특히 인상적이더군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곰스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나' 역시 철든 이후 줄곧 곰스크로 가기를 꿈꿉니다. 마침내 사랑하는 아내와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오르지만 그만 도중에 내렸다가 기차를 놓치고 맙니다. 평생 동안 곰스크를 꿈꿨지만 '나'는 결국 어느 낯선 마을에 정착하여 평생을 살게 되지요.

 

 

'곰스크행 기차인 줄 알고 탔는데, 곰스크행 기차가 아니다?!'

심지어는'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조차 알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제서야 알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잊고 지냈던 자신의 꿈과 마주하는 경험을 즐긴 듯 합니다. 길게 길게 책장을 넘기면서 말이지요. 다음 장의 내용은 궁금하지도 그닥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어느 순간,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소망을 떠올리면서 추억에 잠깁니다. 그리고 불연듯 지금 나의 삶이 바로 내가 꿈꿔왔던 '곰스크'라는 걸 깨닫게 되지요. 그러니까 '곰스크'란 모든 사람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꿈의 상징인 셈이지요. 

 

 

우린 모두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거나 ,

아니면 목적지를 알 수 없는 배를 타고 있다. 

 

 

한편,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이어 실려 있는 단편 <배는 북서쪽으로>는 매우 의미심장한 작품입니다. 여객선에 탄 승객들은 하나같이 배의 목적지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이라고 우깁니다. 유일하게 배의 목적지를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선장 또한 "나에겐 정해진 항로가 있고 그걸 따를 뿐"이라는 말로 목적지를 대신합니다. 승객들로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와 함께 연관지어 보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 한층 명료해집니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의 주제는 '사람은 누구나 결국은 스스로 선택하고 원하는 삶을 살게 된다'로 귀결됩니다.  곰스크행 기차를 놓쳤기 때문에 자신이 곰스크에서 꿈꾸던 삶을 살게 된 주인공이 만약 곰스크행 기차를 쭉 타고 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무사히 곰스크에 도착했을까요? 아니 중요한 건 곰스크라는 목적지 자체가 아니라 꿈꿔왔던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오르트르는 <배는 북서쪽으로>라는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인생이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기차(혹은 배)와 같다. 

다만, 승객들 각자가 바라는 방향으로 가고 있을 뿐이다.

 

 

석장이 채 안되는 짧은 단편 <두 시절의 만남>은 성공한 중년 사업가와 무전 여행을 하는 젊은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사업가는 목적지도 없이 여행하는 젊은이의 자유를 부러워하면서 자신이 젊은 시절 품었던 꿈을 떠올리고, 젊은이는 사업가의 돈과 멋진 차를 보면서 앞으로 그와 같은 성공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꿈을 품습니다.

 

저 역시, 얼마전 20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의 눈부신 젊음과 모든 것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가능성을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제가 보낸 찬사에 "저는 선생님이 부럽습니다"라는 답변에 깜짝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 역시 새파랗게 어리고 젊은 시절 연장자에 대해 같은 마음을 품었었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프리츠 오르트만의 <두 시절의 만남>은 바로 이와 같은 세대차이(?)를 놓치지 않고 깔끔하게 포착한 작품입니다.  만약, 그가 좀 더 많은 작품활동을 했더라면 '꽁트'라는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살짝 들었습니다. 

 

꿈이란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닌 갖지 못한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꿈이 이루어진 그 순간이 바로 꿈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새벽을 울리며 다가오던 기차소리는 영원히 꿈을 향해 달려가는 내 마음의 기적소리였다는 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에게 (특히, 나에게) 편리하다는 것 쯤은 잘 알기에 가급적 자제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거리감이 속절없이 좁혀지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갖고 있는 이들이다.

불안하고 두렵고....

하나같이 어딘가 모르게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도시를 스쳐가는 바람에도 두 눈 가득 고인 눈물을 뚝뚝 떨구는,,,

스스로를 지킬 힘도, 그럴 마음도 아직 갖추지 못한 사람들...  

 

흔들리는 그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얹고 말해주고 싶다.

 

산다는 건,

원래 그런 거라고,,,

때론 견딜 수 없이 두렵고 슬프고 또한 외로운 거라고,,,

 

그렇지만,

이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일지라도 충분히 아름답고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거라고,,,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꿈이 없는 삶일지라도 괜찮다고,,,

누구나 현실과 맞바꾼 소망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우기 일쑤라고,,,

 

매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거지같은 하루를 보내도,,,

일년을 그냥저냥 살아도,,,

괜찮다고,,,

 

산다는 건,

원래 영화처럼 소설처럼 멋지지도 근사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거라고,,,

 

그렇지만,

이처럼 별 것 없는 삶일지라도 충분히 아름답고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직,

우리의 영혼은 잠들지 않았고 삶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자스민과 석유
송재욱 지음 / 애플트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2010년이던가...

아무튼 몇 년전 중동지역에는 민주화 열풍이 거샜더랬다. 그 시작은 튀니지의 젊은 대졸 노점상의 분신이었다. 튀니지와 이집트, 리비아의 독재자들이 줄줄이 물러나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중동...

지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멀고 먼 나라다. 이 멀고 먼 나라의 이야기를 듣고자 선택한 책이 바로 <자스민과 석유>이다. 비교적 최근에 나왔고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된 책이었다.

 

'중동의 경제: 석유와 복지의 넥서스'라는 부제를 단 1부에선 중동 국가의 경제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20세기초까지 대부분 유럽 열강의 식민지였던 이 지역 국가들은 독립하여 나라가 세워지는 초기 과정에서 석유 자원이 개발되면서 소위 '지대경제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지대경제구조'란 토지를 빌려주고 임대료를 받는 것처럼 노동이나 생산없이 석유를 팔아 나온 돈으로 운영되는 경제구조를 말한다.

 

석유매장량이 많고 인구규모가 적은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의 산유부국들은 '오일머니'로 세금 없이 정부가 운영되고 국민들에게 높은 수준의 복지를 제공하면서 정권을 유지하는 한편, 석유자원이 비약하고 인구가 많아 비교적 가난한 이웃 중동국가들을 경제적으로 원조한다. 주로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이들 비산유국들은 외부의 경제 원조에 의지하면서 쿠데타 등으로 집권한 사람들이 군사력을 이용하여 장기독재 체제를 구축했는데, 리비아의 카다피 등이 대표적이다.

 

 

2부는 '아랍의 봄' 즉 '자스민 혁명'으로 명명되는 중동의 민주화 열풍이 일어난 원인과 과정 그리고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혼란한 상태를 보여준다.

 

한국 사회는 국가가 나서서 부자에게 고율을 세금을 부과하고 그 돈으로 저소득층의 생활기반을 튼실하게 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부의 재분배라는 '경제 민주화' 논리를 적용해 시장의 고유 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는 시장의 재편과 일자리 창출 과제를 국가가 적극적으로 풀어내라고 숙제를 던져 준 것이다. 반면 아랍의 시민들은 자본과 자원을 독점하고 경제를 비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국가가 보다 생산적인 시장에 자리를 양보하라는 주문을 내어놓고 있다.

 

-송재욱, <자스민과 석유> p117 中-

 

정부의 역할을 자유방임으로 한정할 것이냐? 아니면 적극적인 개입과 조정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논란거리다. 자유방임의 경우 시장에게 주도권이 넘어가 '무한경쟁'을 야기시키고 '부의 재분배'라는 국가 본연의 임무는 소홀히 하면서 이로써 작아진 국가의 존재 이유를 치안에 두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범죄예방과 치안이라는 이름으로 국민 개개인의 삶을 지나치게 감시하는 사회가 될 개연성이 커진다. 반면, 정부가 직접 나서서 모든 것을 관리하면서 시장의 역할을 자처한다면 과거 계획경제 사회주의나 중동 산유국의 전철을 밟게 된다.

 

 

3부는 아랍 국가들의 왜곡된 경제구조와 이로 인한 문제점들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중동의 석유 중심 경제구조는 제조업등의 발전을 정체시켜 결국 청년실업문제 및 국제유가와 식량 생산량에 따라 크게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허약한 경제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1970년대 석유 국유화 조치이후 아랍의 독재국가들은 석유수출을 통해 번 돈으로 과도한 복지 시스템을 경쟁적으로 도입하면서 권력을 지탱해왔다. 국가가 독점하는 공기업을 통해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빵과 주택에 대한 과도한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려 온 것이다. 하지만 청년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함께 낡은 산업구조가 개선되지 않아 실업률이 증가했고 불안정한 국제유가가 바닥을 칠 때마다 서민복지에 쏟아 붓는 돈이 고갈되었다.

 

-송재욱, <자스민과 석유> p186 中-

 

 

4부에서는 중동의 복잡다단한 현대사를 설명하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우리와 닮은 구석이 엿보였다. 제국열강의 식민지였으며, 독립 후에도 유럽과 미국 등 열강세력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등등...

 

특히, 석유자원을 둘러싼 갈등은 중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석유 자원의 중요성을 모르던 시절에는 동서양 간의 중개무역 등으로 상업이 발달하면서 한때 화려한 문명을 꽃피우던 지역이 오히려 석유로 인해 국민들은 정부가 제공하는 복지정책에 의지해 살아가면서 그 대신 정부의 부패와 장기 독재를 용인하는 비극을 초래했으니 말이다.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유럽을 중심으로 한 열강들은 팔레스타인 문제 처리에 부심했다. 1947년 UN이 제시한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면 아랍과 유태인 국가의 분할과 예루살렘을 국제도시화하는 '두 국가 체제'를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아랍국가들의 거부로 무산되고 결국 1948년 5월14일 위임통치가 사실상 종료되자 유태인들은 독립국가인 이스라엘을 선포하였고 다음날인 5월15일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연합군이 팔레스타인으로 진주하면서 제1차 중동전이 발발한다. (...)

1957년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고 이에 맞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공격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공군기지를 공격하면서 제2차 중동전이 발발한다. 제2차 중동전은 오스만 제국이 붕괴한 후 이 지역을 대표하던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미국과 소련이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냉전체제가 중동지역에 확립하는 계기가 된다. (...)

1967년 제3차 중동전으로 이스라엘은 시리아로부터 요충지인 골란고원을, 요르단으로부터는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이집트로부터는 시나이반도를 획득하게 된다. (...)

제4차 중동전쟁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쿠웨이트 등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국가에 대한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하면서 세계적인 오일파동을 불러왔다.

 

-송재욱, <자스민과 석유> p165~170 中 요약함-

 

전반적으로 중동 정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신문 기사 등을 자료로 활용해서 그런진 몰라도 통계자료 등을 직접 인용한 부분이 너무 많고, 지나치게 미국적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중동측 자료나 입장은 누락(?)된 채, 미국의 언론매체에 실린 자료만 참고/인용한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국보다 낯선 오늘의 젊은 작가 4
이장욱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이하고 낯설다.

마치 하루키 소설과 같은 느낌이랄까...

참고로,

나는 하루키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좋아하려고 무지막지 노력했건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러니까...

나에게 하루키 풍의 소설이란 남들은 좋다고 난리인데 나에겐 그저 그런 작품을 의미한다.

이장욱의 이 소설 역시 나에겐 하루키 풍의 소설에 속하는 셈이다.  

 

 

 

웬지 나만 속은 것 같고... 웬지 나만 작품 속에서 뭔가를 놓친게 아닐까... 싶어, 웬지 자꾸만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그런, 괘씸한 작품이다.

 

 

 

이장욱이라는 이름은 책소개 블로그를 통해서 최근에 알았다.

블러거들의 급칭찬에 급영업을 당했다고나 할까...

 

 

 

 

 

 

 

이야기 구조는 아주 마음에 든다.

A라는 친구의 급작스런 사망소식에 김, 정, 최, 염이라는 네명의 절친이 문상을 가면서 제각각 A를 회상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현실과 상상,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반전과 역설 그리고 물론 패러디까지 담겨 있다.

 

 

 

주제목격인 <천국보다 낯선>을 비롯해서 13개의 소제목 역시 모두 영화 제목을 차용했다. 내가 본 영화는 단 한편도 없었다. 그나마 <천국보다 낯선>이라는 오래된 영화 제목만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고, 나머지는 하나같이 어렵고 난해한 영화들이다.  일반 독자들보다는 평론가들이 좋아할 법한 작품들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영화제목만을 따온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 나오는 대사와 장면은 물론이고 분위기와 영화 자체가 주는 느낌까지 효과적으로 차용한 듯 싶다. 결론은 이 열 네편의 영화들을 다 섭렵한 다음에야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다.

 

 

 

A는 모든 친구들의 뮤즈가 아닌가 싶다.

경영대를 나와 금융권에 입사한, 김이 가장 먼저 A의 연인이 되었다. 

예민한 최 역시 A를 남몰래 좋아했지만 고백 한번 하지 못한 채, A가 김의 연인이 된 게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한다. 그는 제일 마지막까지 학교에 남아있다가 결국 대학교 강사가 된다.

 

 

 

한편, 염은 대책없는 망난이로 나온다. 학교 생활 엉망으로 하고 어찌어찌하여 졸업은 했지만 뭐 하나 잘 풀리지 않는 인생 중 하나다.  친구의 문상가는 길에도 약속을 어겨 혼자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간다. 그도 A를 짝사랑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A와 가장 거리감이 있기에ㅡ혹은 사심이 없었기에ㅡ 그는 앞으로도 혼자서 잘 살아갈 것이다.

 

 

 

문제는 정이다.

정은 A와 가장 가까운 친구다. 그리고 A와 헤어진 김과 결혼한다. 정이 직접 밝힌 김과의 결혼 이유는 김이 속한 세계의 공기때문이었다. 그가 속한 세계의 공기는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지 않는 세계, 불안이나 비관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 의아해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독자들은 알게 된다. 정이 김과 결혼한 진짜 이유는 바로 A 때문이라는 걸...

 

 

 

아, 여기까지 줄거리를 대충 끄적이고나니 머리속을 휘젓고 다니던 것들이 한줄로 정리되는구나...

 

 

 

그러니까, A란 존재하는 실존인물이 아니라 각 주인공들이 상상하고 마음 속에 담아뒀던 그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

꿈꿔왔던 삶의 이상일수도 있고...

추구해오던 삶의 본질일수도 있고...

아니면,

영원히 알 수 없는 '세상의 끝'일지도 모른다.

 

 

 

 

 

 

연애소설인 줄 알았더니, 성장소설이고...

추리소설인 줄 알았더니, 순수소설이며...

한편의 소설인줄 알았더니, 여러편의 영화이고...

여러편의 영화인줄 알았더니, 한편의 영화로구나....

아니, 한편의 영화같은 소설이였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연초에 올해는 최대한 고전을 많이 찾아 읽기로 작심한 바 있고,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1순위에 올라있었다. 사실, 이 작품은 중학생이던 시절(아마도 골딩이 노벨문학상을 타던 즈음일 것이다)  읽었고, 그 여운이 오랫동안 남았던 작품이다. 그렇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작품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만 또렷이 기억날 뿐, 어떤 내용이었는지 줄거리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꼭 읽어봐야지...'하고 결심만 십여년 이상을 해오던, 나와는 나름 특별한 인연이 있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을 마침내 다시 읽을 기회를 갖게 되었고,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듯 거침없이 단 하루만에 완독했다.  

 

소년들이 불시착한 무인도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처음에는 다소 지루하게 전개되는가 싶더니 인물들이 하나 둘씩 등장하기 시작한다.

맨 먼저, 앞으로 소년팀의 리더로 뽑히는 랠프와 그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돼지(필)'가 조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이 두명은 '소라'를 발견하고 줍는다. 천식을 앓는 '돼지(필)' 대신 랠프가 소라를 부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라를 불어 그윽한 소리를 뿜어올리자,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오다가 불시착한 아이들이 한명 두명씩 소라 소리를 듣고 모여든다. 작품 속에서 소라는 민주, 평등, 법과 제도를 상징한다.

 

만5살에서 12살로 이루어진 소년들은 처음엔 랠프를 지도자로 뽑고, 지나가는 배가 볼 수 있도록 산정에 불을 피우고 오두막집을 짓는 등 나름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섬 안에는 식용가능한 과일 열매들과 마실 물이 있어서 굶어 죽을 걱정은 없다. 그러나 성가대의 리더인 잭 메리듀는 멧돼지 사냥에 집착하면서 소년들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는 권력과 폭력 지향적인 인물로 악(惡)을 대표한다. 자신이 리더가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팀을 분열시킨다. 초반부터 완력으로 필의 안경을 망가뜨리는가 하면 그나마 한쪽 알만 남은 안경마저 어둠을 틈타 급습하여 빼앗아간다. 힘과 폭력에 의지하여 인간 문명과 진보에 대항하고 이를 파괴하려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이성적으로 랠프를 따르던 소년들이 잭을 따르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일들이 왜 일어나는 걸까?

인간은 어째서 한순간에 악에 휘둘리고 어둠에 봉사하는 걸까?

 

소년들은 다들 이성적으로는 멧돼지를 잡는 것보다는 불을 꺼뜨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마음 속에 자리잡은 '두려움'에 서서히 이성은 마비되어 간다. 그리고 어느덧 이성이 사라진 자리엔 본성이 소리없이 차올라 결국엔 사람마저 멧돼지처럼 사냥하는 폭력성을 보인다. 

 

처음에는 멧돼지의 시선을 교란시키기 위해 얼굴에 바르던 진흙을 얼굴 뿐만 아니라 온몸에 색칠한 순간, 소년으로서 그들이 갖고 있던 호기심과 짓궂음은 피에 굶주린 잔인함으로 변해버린다.

 

낙하산을 타고 추락사한 시체를 괴물로 착각하고, 이 괴물에게 잡은 멧돼지의 머리를 재물로 받치는 장면 등은 초기 인류의 원시성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하다. 그리고 괴물의 실체를 깨닫고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하는 사이먼을 멧돼지로 인식(?)하여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장면은 인간 근원이 악인지 아니면 선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소년들이 전부 잭의 수하로 들어가버린 후, 랠프와 돼지(필)는 잭의 무리를 찾아가 마지막 남은 인간성에 호소해보지만, 그들의 기대는 가학성을 타고난 인물인 로저가 밀어낸 바윗덩이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만다. 산꼭대기에서 굴러내려오는 돌에 돼지(필)가 맞아 죽은 후, 숲속에 간신히 숨은 랠프를 잭 일당은 마치 멧돼지 사냥하듯 포위망을 쳐서 점점 좁혀온다. 유색의 진흙으로 온몸을 색칠한 잭 일당은 살기등등하여 랠프를 죽이기 위해 달려든다. 이건, 더 이상 놀이도 사냥도 아니었다.

 

인류 문명을 상징하는 랠프의 죽음이 임박한 순간, 숨 가쁘게 달려오던 작품은 거칠지만 드라마틱하게 막을 내린다.  

 

사이먼은 죽고ㅡ잭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몸부림치며 목메어 울었다. 이 섬에 와서 처음으로 그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온몸을 비트는 듯한 크나큰 슬픔의 발작에 몸을 맡기고 그는 울었다. 섬은 불길에 싸여 엉망이 되고 검은 연기 아래서 그의 울음소리는 높아져갔다. 슬픔에 감염되어 다른 소년들도 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 소년들의 한복판에서 추저분한 몸뚱이와 헝클어진 머리에 코를 흘리며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소년들의 울음소리에 둘러싸인 장교는 오히려 약간 난처해했다. 그는 그들이 기운을 회복할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 외면을 하였다. 멀리 보이는 산뜻한 한 척의 순양함에 눈길을 보내며 그는 기다렸다.

 

-윌리엄 골딩, <파리대왕> p303-

 

 

윌리엄 골딩은 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다가 해군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는 교사로서 남학생들의 또래문화와 집단행위를 관찰했을 것이고, 군인으로서 전쟁의 참상과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핵무기의 위력을 보면서, 인류가 자랑하는 문명이란 언제든지 한순간에 야만성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걸 꿰뚫어보지 않았나 싶다. 

 

무인도에 불시착한 소년들이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집단 무의식'에 매몰되어 문명을 상실하고 야만으로 회귀하는 과정은 원시성에 입각한 인간성(공포, 두려움, 질투, 과시, 지배욕 등등)을 조금도 버리지 못한 인류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짐승으로 추락했던 소년들은 섬을 찾은 해군과 순양함에 의해 구조되어 다시 인간 문명의 세계로 되돌아오지만, 해군과 순양함으로 상징되는 전쟁지향적 인류는 과연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보물섬> 등으로 대변되는 모험소설로부터 모티브를 따왔지만, 이 작품을 단순히 모험소설이 아닌 인류 문명에 대한 세기말적 예언서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