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동서 미스터리 북스 7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이경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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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말 하면 잔소리일 만큼 유명한 작가가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20세기 초중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대표주자로 손꼽힌다. 특히, 하루키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루키의 <댄스 댄스 댄스>라는 작품은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에 대한 '오마주'라고 한다. 

 

이렇게나 유명한 작품이건만 난 재밌게 읽지 못했다.

하루키의 작품 역시 나와는 잘 맞지 않는 편인데 그래서 그런가....

특히, 남들이 극찬하는 그 '문체'가 나는 불편했다.

뭐랄까...

책을 읽으면서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다른 쪽으로 생각이 분산되었다. 

 

스토리 역시 다소 비현실적이다.

 

억만장자의 방탕한 딸이 나오는가 하면,

그녀와 결혼한 그것도 두번씩이나 결혼한 상이용사가 사건을 주도(?)한다. 

베스트셀러 작가 부부의 삶 또한 비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아이린 웨이드는 실비아 레녹스를 왜 죽였을까?

테리 레녹스는 왜 자신이 누명을 쓰고 범인 행세를 자청했을까?

아이린 웨이드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아이린의 자살 뒤 그의 모습은 너무도 홀가분에 보인다.

테리 레녹스의 위장 자살도 로저 웨이드의 자살 소동과 실종 사건도 개연성이 너무 부족하고, 웨이드 부부의 집사(혹은 하인)인 캔디의 역할 또한 불분명해서 혼선을 자아낸다.

 

1950년대에 쓰여졌음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작위적이라하겠다.  하기사,  20세기 최고의 영미소설 목록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역시 읽고나서 무척이나 실망을 했더랬다. 도대체 뭐가 위대한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더라. 특히, 등장인물들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비춰졌다.

'왜 그럴까? '

그 당시에는 소설의 주독자층이 상류층으로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중하류층 독자들의 꿈과 환상을 자극시키고 대리만족감을 전해주려는 '의도'였을까...?

 

암튼,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중반에 널리 알려진 특히 미국 작가들의 작품은 뭔가 비현실적이고 주제도 모호할 뿐만 아니라 문체 마저도 낯설다.

 

전형적인 사립탐정의 모습을 새롭게 구축했다고 평가받는 '필립 말로우' 역시 나에게는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았다.

부와 미모를 겸비한 젊은 여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 사랑에 목 매달아하지 않는 말로우...

돈과 권력 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모습은 멋있기보다는 불편했다.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필립 말로우는 작가 더 나아가 모든 남성들의 욕망을 투영시켜 만들어낸 인물에 불과하다. 이런 남성상이 당시에는 각광받았을지 모르겠으나 요즘에는 거칠고 건방지고 자기세계에 빠져 사는 현실감각 전무한 문제 인간으로 치부되기 십상일 것 같다. 

 

추리소설의 주독자층은 남성보다는 여성이라고 하던데 왠지 이 작품과 작가만큼은 남성들이 더 좋아할 것 같다.

 

아무튼,

이 작품, 남들은 좋다고하는데 난 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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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쇼크 -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
테드 피시먼 지음, 안세민 옮김 / 반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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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만큼 전세계를 무대로 고령화를 전반적으로 다룬 책은 없는 것 같다.

단행본으로는 다소 부담스러운 5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한줄로 요약하면, '이제 인류는 의료보건 기술의 발달(수명연장)과 개개인의 선택(저출산)이 불러온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을 피할 수 없다.'라고 하겠다.

 

 

날씨가 따듯한 남부의 플로리다 노인주거단지로 이주하는 북미의 노인들....

 

한때 독일 등으로 젊은층을 수출(?)했으나 노령연금을 받는 계층이 늘어나면서

제정위기를 겪고 있는 스페인...

 

'자식이 늙은 부모를 봉양한다'는 유교식 사고방식에서 일찌감치 벗어난 일본의 고령사회 풍경...

 

연금과 부동산 폭등 혜택을 누리고 있는 도시거주 노년층과 

외지로 떠난 자식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간신히 살아가는 농촌 노년층의 격차가 극명한 중국...

 

 

각 지역마다 고령화는 발등의 불이 된 것 같다.

 

미국은 드넓은 영토와 자원 그리고 여전히 세계 각지역 사람들이 선호하는 나라로, 고령화와 저출산에 따른 젊은 노동력 부족 문제를 그나마 잘 헤쳐나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미국 역시 일자리 창출과 빈부격차 등을 겪고 있지만,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노년층을 돌보는 일자리를 필리핀과 동유럽에서 건너온 여성 인력이 채우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때, 일자리에 대한 미국인 특히 젊은층의 눈높이는 여전히 높아 보인다.  

 

이에 반해, 일본의 경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얼마전 일본의 무연사를 집중적으로 다룬 NHK의 <무연사회>라는 책을 통해 일본 고령사회의 단면을 살펴본 나로서는 각 나라의 고령화 현황과 대응을 다룬 부분들이 유난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유럽과 북미 선진국과는 달리, 일본은 외국인 이민이나 인력을 받아들이는데 상당히 수동적인 나라다. 이와 동시에 '세계 최장수 국가'라는 타이틀도 함께 갖고 있다.

그렇다면 초고령사회인 일본은 고령 인구를 어떻게 부양하고 있는 걸까?

중국처럼 자식에게 부양의 책임을 지우는가?

 

<무연사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은 한국, 중국처럼 동아시아 국가지만 유교 전통에 입각한 가족 구조와 가치관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일본인들은 노후를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후 고도성장을 통해 획득한 자산과 연금 등에 힘입어 전문주거단지나 각종 기관들이 운영하는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들을 돌보는 인력은 외국인이 아닌 거의 일본인이라고 한다. 일본의 젊은층은 부모 세대가 공장이나 회사에 취업했던 것과는 달리, 제가방문목욕 서비스나 노인전문도시락 배달 등등의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다만, 한가지 특이했던 점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남미로 이민을 갔던 일본인 후손들을 역이주 시켜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는 미국, 스페인의 노인들이 타인종 혹은 타민족에 의해 돌봄을 받고 있는 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한편, 중국의 고령 문제는 중국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70억 세계 인구의 1/5 혹은 1/4를 차지하는 중국의 인구구조 변화는 전 세계에 미치는 파급력이 크기 때문이다.

중국 자체적으로도 인구는 자고이래로 통치계급의 주요 현안이었다. 식량 부족 문제를 걱정했던 중국 정부는 1970년대 후반부터 '한자녀 낳기'정책으로 인구 증가를 억제해왔으나, 얼마 전 이 정책의 폐지를 공식 선언한 바 있다. 지난 30년간 젊고 값싼 노동력에 의지해 경제성장을 이룩한 중국으로선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는 부양해야 할 인구의 증가와 함께 일할 노동력의 부족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릴 확률이 크다.

 

중국은 복지제도가 공평하고 일률적으로 갖추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역간 격차도 너무 큰 나라다. 여기서 지역간 차이란 도시와 농촌에 대한 차별적 정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내가 알기로, 중국의 퇴직금제도는 도시 근로자 위주로 구축되어 있다. 이는 농지를 국가로부터 임대 형식으로 소유(?)하고 있는 중국 농민은 기본적으로 퇴직연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토지라는 생산수단을 갖고 있는 바, 연금이 필요없다는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의 도농 분리 정책은 소수의 도시인들에게 혜택이  쏠리는 결과를 초래했고, 국가로서는 통치세력을 지탱해주는 도시의 엘리트 집단만 부양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농민을 경제와 국가 발전의 '희생양'으로 삼은 측면이 없지 않다.  

 

물론, 저자는 중국의 농촌에는 여전히 자식이 부모를 부양한다는 유교적 전통이 짙게 남아 있어 정부의 이와같은 정치적 결정이 현재까지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문제를 야기시키지는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가르치는 윈샹옌의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사행활>이란 책을 인용하여, 외동이 자녀가 출산한 손주를 돌봐주느라 바쁘고 힘겨운 노년을 보내고 있는 중국 노인들과 부모로부터 경제적 도움과 무급 육아 및 가사 노동을 제공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중국 젊은층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중국의 노인 특히 농촌 노년층이 처한 비극을 놓치지 않는다.

끝으로, 저자는 현인류를 문명과 기술 발달의 혜택을 누린 첫번째 장수세대이며 고령화는 분명 인류 최고의 행운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여러나라와 지역을 두 발로 뛰어다니면서 두 눈으로 직접 살펴본 저자에게 비친 고령화는 책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쇼크'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책에서는 한국의 상황을 직접 겨냥하여 기술한 부분은 없지만 한국 역시 고령화의 위협과 변화의 최전선에 서 있다고 하겠다. 

일본처럼 노년층이 경제적 육체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경제력과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으면서, 동시에 부모 부양이라는 유교적 전통은 중국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노인으로 산다는 건 비애와 우울을 넘어 비참함의 극치가 아닐까 싶다. 

 

 

굳이 이 책을 끝까지 읽지 않더라도, 무병장수와 수명연장에 사활을 걸었던 인류의 이기심이 결국은 고령화라는 비극을 초래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인류의 보건과 건강 증진을 위해 노력했던 일부 정책 결정자들과 제약회사 및 의약분야 연구자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인류 발전과 진보를 기대했던 그들의 행동이 오히려 자칫하면 전인류를 혼란과 비극으로 빠뜨릴지도 모르는 고령화에 단초를 제공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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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사회 -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
NHK 무연사회 프로젝트 팀 지음, 김범수 옮김 / 용오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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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일본 NHK가 방송한 특집 프로그램을 책으로 엮은 책이다. 우리나라도 EBS의 <명의>처럼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왔거나 지속적인 관심을 일으킬 만한 방송 프로그램의 경우 이처럼 책으로 엮어내기도 하는데, 이는 영상매체보다는 책이라는 형식이 '시간적 제약'을 덜 받기 때문일 것이다.

 

무연사회(無緣社會)란, 말 그대로 인연이 끊어진 사회를 말한다. 

이와 같은 무연사회는 필연적으로 '무연사(無緣死')와 '무연감(無緣感)'을 불러온다. 무연사란 '홀로 맞이한 죽음'과 '아무도 인수하지 않아 갈 곳 잃은 유골'을 모두 포괄하며, 무연감이란 가족 및 사회적 인연이 아주 미약하거나 완전히 끊어졌다고 느끼는 감정 상태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이었던 건, 혼자 살면서 늙어가는 노년층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도 무연감을 깊게 느끼고 있으며, 무연사를 자신의 머잖은 미래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NHK 취재팀은 무연사회의 등장과 심화를 핵가족화와 미혼율 및 저출산율의 증가 탓으로 돌리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일본의 무연사회를 야기시킨 가장 커다란 원인은 이와 같은 사회적 원인 뿐만 아니라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라는 일본인 특유의 인식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 책에는 '짐이 되고 싶지 않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가족이 없는 사람 뿐만 아니라 형제/자매 심지어 자식이 있는 경우에도 '가족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면서, 홀로 살다가 결국 무연사를 맞이하는 일본인의 모습은 같은 동아시아 국가이자 유교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다소 충격적이다. 특히,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오랫동안 '남에게 절대로 폐를 끼치지 않는 일본인'의 모습을 성숙한 시민의식의 상징이자 본받아야할 태도로 인식되어왔기 때문이다.

 

이런 일본인에 반해서 한국인은 지나치게 타인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수시로 사생활을 침해하는 예의 없는 민족이라고 여겨져왔지 않았던가?

명절이면 예외없이 나타나는 '교통체증'과 인맥, 지연, 학연 등의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식구 제사람 챙기기'라는 의식구조가 한국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배우지 않았던가?

 

사회보장제도와 시민의식이 우리보다 훨씬 발전한, 일본의 현실은 애잔함을 넘어 당혹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리고 장점보다는 단점을 더 빨리 배우고 모방하는 우리사회의 특징(?)으로 볼 때, 무연사는 더 이상 이웃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죽은지 한참만에 발견되는 소위 '고독사'가 언론매체를 통해 알려지고 있는 현실 역시 이와 같은 불안감이 터무니 없지 않음을 말해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또 다른 점은 고독하게 노년을 살아가는 일본의 노년층들은 비록 외로움을 느끼긴 하지만 극단적인 경제적 빈곤을 호소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무연사회 속 무연자들을 위한 NPO(비영리단체)의 결성과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최소한 일본에서는 비록 홀로 늙어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굶어 죽을 걱정, 얼어 죽을 걱정만큼은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라는 부러움이 든 것 또한 사실이다.

 

이에 반해, 우리 사회는 다른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노년층의 외로움과 고독사라는 사회적 현상은 당연하거나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무관심 이면에는, 고독하게 살아도 좋고,,, 홀로 죽음을 맞이해도 좋으며,,, 죽은 후 유골이 무연고묘에 안장되어도 괜찮으니,,, 일단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만이라도 배 고프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게만 해달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이게 비단 나만의 환청(幻聽)일까?

 

일본의 현실에 애잔하게 떨리던 가슴이 우리의 현실 앞에선 여지없이 막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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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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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된 책읽기란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권의 책을 완독하면  그때부터 생각이 깊어진다.

 

이 생각....

저 생각...

 

생각의 한 조각을 움켜잡고 억지로라도 글로 옮겨보면 뜻밖에도 생각이 정리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곤 한다. 두서없이 머릿속을 휘젓고 돌아다니던 생각들이 글로 옮겨지는 과정 속에서 더 한층 성숙해진다고나 할까... 암튼, 각설하고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대부분의 애독자(愛讀者)들이 독서 자체보다는 독서 후의 글쓰기가 더 중요하다고 하는가보다. 

 

 

나 역시 한 권의 책을 다 읽으면 또 다른 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독후감을 쓰는 편이다. 보통 이틀을 넘기지 않는 편이지만, 책을 뗀지(?) 하루 이틀 심지어 일주일이 지나도 도무지 독후감을 쓸 엄두가 나지 않는 책들이 있다. 충격이나 감동의 깊이때문일수도 있지만 나의 경우엔 주로 내용의 방대함 혹은 난해함이 더 큰 이유라 하겠다.

 

엄기호의 <단속사회> 역시 그런 책 중 하나다.

 

저자는 우리사회를 '같고 비슷한 것에만 접속하고 나와 다른 것은 철저하게 차단'하는 사회라고 진단하고, 이런 사회를 '단속사회'라고 일컫는다. 단속사회는 낯섦을 통한 성장과 성숙이 차단되어 있기에 삶의 연속성이 끊어지고, 나와 타인의 경험을 통한 창조 또한 불가능한 사회다.

 

우리에게 부재한 것은 실존적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사적인 경험을 공적인 언어로 전환하는 관계의 부재다. 이런 관계가 부재함으로써 자신의 경험을 남도 듣고 창조하면 좋을 이야기로 만드는 능력 또한 전승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창조점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사회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누군가의 창조점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적 존재감을 획득하고 공적인 존재로 설 수 있다.

-엄기호, <단속사회> p26~27 中-

 

'나의 경험이 그 누군가의 창조의 시작이 되고, 나의 성장은 타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어쩌면 이렇게 단 한줄로 소통의 중요성을 표현해 놓았을까... 

 

단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적어 놓은 인용문이 이번처럼 많은 경우도 매우 드물었다.

책 속의 인용문을 적어놓은 것만도 A4 용지 앞뒤를 가득 채우고도 남으니 말이다. 하나같이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이다. 

 

사냥꾼의 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침묵하는 전략을 택한 것은 안전의 목적과 의미가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낯선 존재들을 만날 때에야 비로소 익숙한 것을 상대화하게 되고 때로는 '친숙한 관념과 기성 진실을 뒤집어 놓을 수' 있게 된다. 새로운 것을 배워가면서 우리는 낯선 것에 도전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용기를 얻는다. 그런데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동일성에만 숨어들게 되면서 우리의 경험은 축소되고 성장의 기회는 봉쇄된다. 이것이 사냥꾼의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안전의 댓가다.

-엄기호, <단속사회> p59~61 中-

 

정글에선 누구나 사냥감이 아닌 사냥꾼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냥꾼은 언제나 극소수다. 물론, 사냥꾼은 사냥감보다 강하다. 그런데 다수의 사냥감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을만큼 강할까? 

만약, 다수인 사냥감들이 '난 사냥감이 아니야!' 라거나, 혹은 '언젠가는 나도 사냥꾼이 될 수 있을 거야!' 등등의 허튼 기대와 희망을 품지 않게 된다면 어찌될까?

다수의 사냥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지만, 모든 사냥꾼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답을 찾아낸다.

 

통치는 개인의 초조함을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상태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초조함의 원인으로 자신의 부족을 탓하게끔 조장한다. 사람들은 만성적인 초조함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왜 자신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초조해하는지를 돌아보지 못한다. (...)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다면 이는 사적인 것을 넘어 공공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초조함이 자신의 바깥을 돌아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 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사회적인 것으로 보편화하지 못하고 자신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 이 또한 통치 전략 중 하나다.

 

엄기호, <단속사회> p237~238 中-

 

 

모든 자기개발 서적과 소위 '멘토링'이니 '힐링'이니 하는 말들로 포장된 강연들은 하나같이 "니가 지금 이모양 이꼴인 것은 남들보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면서, "앞으로 기회는 많으니 정신적 안일함과 무책임함에서 벗어나 더 열심히 매진하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뭘 얼마나 잘못했다는 거지?'

'그리고 도대체 앞으로 뭘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한다는 거지?'

 

과거에는 말이 곧 폭력이었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었다면, 이제 말은 '사기'에 불과하다. 이전에는 말의 뜻을 새길 필요가 없었다면, 이제는 그것의 의도와 배후를 의심해야 한다. 또한 이전에는 권력자들이 우리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 했다면, 이제는 그들이 우리의 말을 못 들은 척 묵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소통에 대한 요구'는 자연스럽게 말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요구로 치환되었다.

 

-엄기호, <단속사회> p177~178 中-

 

 

'현대인은 긍정과잉과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착취하며 피로감을 느낀다'고 주장한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떠오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밖에도 <단속사회>의 저자는 요즘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상과 철학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면서 그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바우만에 따르면 이제 근대 국가는 제약없이 행사되는 시장의 힘에 의해 초래된 소실과 피해를 제한하고, 약자들을 지나치게 고통스러운 재난으로부터 보호하고, 불확실한 처지의 사람들을 자유경쟁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체제유지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국가의 가장 주된 임무가 '시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국가는 자신의 정당성의 근거를 경제적 영역이 아니라 비경제적 영역에서 다시 찾아야 했고, '안전'을 통해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엄기호, <단속사회> p59 中-

 

바우만은 액체 근대로 진입하면서 세가지 범주의 신뢰가 모두 붕괴했다고 말한다. 첫번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두번째는 타자에 대한, 세번째는 제도에 대한 신뢰가 그것이다. (...) 제도와 타자,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불신할 때 안전을 위해 자기가 자기를 감시하고 검열하는 자기단속 현상은 확산된다. 

-엄기호, <단속사회> p177~178 中-

 

 

요즘 인문학 특강 등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단어 중 하나를 꼽으라면 '파놉티콘'이 아닐까 싶다. '파놉티콘'이란 영국의 법학자인 제레미 벤담이 주장한 감옥으로, 감시와 통제로 대표되는 근대사회의 핵심 키워드라 하겠다.

 

정보의 공유와 편리함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개인정보수집과 범죄의 예방과 안전에 대한 요구 및 우려와 함께 등장한 CCTV 설치논란 등등을 보면서, 우리 선조들이 '생존'을 위해 '자유'를 포기했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안전'을 댓가로 '자유'를 포기해야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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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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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피로사회>는 얼마 전에 읽은 엄기호의 <단속사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저자인 한병철교수는 재독 철학자로 90년대에 독일로 건너가 서양 근대 철학을 전공한 인물인데, <피로사회>라는 짧은 에세이를 통해 독일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연대 조한혜정교수의 추천도서 목록에서 이 책을 본 것 같다.

 

 

그의 주장은 신선하고 정확하다.

그는 후기 현대 사회를 긍정과 자유를 바탕으로 한 '긍정과잉의 성과사회'라고 진단한다. 인류는 명령과 복종의 '규율사회'를 지나 긍정과 자유를 추종하는 '피로사회'로 진입했다는 그의 주장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동안 긍정과 자유는 추구되고 높이 평가되어 온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지나친 자기 긍정과 성과주의에 빠져 스스로를 착취하는 상태에 빠져버렸으며, '부정성'이 결여된 '긍정성'으로 인해 피로하다는 그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한병철, <피로사회> p11~12 中-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 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한병철, <피로사회> p27~28 中-

 

성과와 긍정 과잉의 시대에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노동하는 노예로 전락해 버렸다는 주장은 참으로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이와 같은 자발적인 성과주의와 긍정과잉 시대가 도래하게 된 건, 생산과 소비가 극에 다다른 자본주의가 (발전과 확대를 지속시키기 위해) 스스로 자가 발전한 결과라는 점이다.

 

긍정과잉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어쩔 수 없이 우울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감정은 발췌문에서 보다시피 '무엇을 할 수 없는' 통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에서 '무엇을 해야 하며, 왜 해야하는지 모르는 것'에서 기인한다.

 

특히 저자는 여전히 현대 사회의 주요 분석 코드로 자리잡고 있는 푸코의 '규율사회' 이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 등 기존 철학 이론들이 더 이상 후기현대사회를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서양근대철학의 한가운데라고 할 수 있는 독일 사회에서 그의 이와같은 주장들이 거부되지 않고 수용/지지된다는 점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전,후기현대사회의 폐해를 직접 체험한 당사자의 관점이라는 점도 고려해 볼 수 있겠지만, 그만큼 독일 사회가 한국 사회보다 수평적이고 평등하며 자유롭게 '부정성'을 표출할 수 있다는 면에서 훨씬 더 건강한 사회라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사회다. 그것은 한트케가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분열적인 피로"라고 부른 바 있는 바로 그 피로다.

 

-한병철, <피로사회> p66 中-

 

그렇다!

우린 긍정과잉과 성과주의를 부르짖는 피로사회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적절한 대처방안은 없는 걸까? 이 질문에 저자는 과잉 긍정을 불러오는 원인은 극단적으로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사회 구조에 있는데, 사회구조란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개개인이 바로 이점을 명확하게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는 말로써 답변을 대신하고 있다. 

 

사회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면, 결국엔 또 다시 정치 문제로 귀결되는 것 아닌가?

결론은 민주시민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며 성숙한 시민의식은 또한 민주주의라는 토양 속에서 자라란다고 할 수 있겠다.

 

 

끝으로,

엄기호의 <단속사회>는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를 언급하고 있으나, 내가 이해한 그 책의 주제는 역설적이게도 '피로사회'의 도래와 위험성을 경고하기보다는 단속과 규제로 통칭되는 과거 '규율사회'의 타파를 핵심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우리사회가 '피로하지 않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규율사회에서 확실하게 벗어난 서구 유럽에 비해 여전히 규율사회의 끄트머리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읽혀진다. 

 

그렇다면,

우리사회가 아직 '피로사회'에 진입하지 않았음을 기뻐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구조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서구보다 뒤처지고 뒤늦었음을 슬퍼해야 하는가?

 

 

오랜만에 제대로된 철학서적을 읽었다.

요즘의 화려한 디자인과 고급 종이로 중무장한 책과는 달리,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소박하게 생겨서 깜짝 놀랐고, 널리 알려진 평판에 비해 너무 얇아서 두번 놀랐으며, 끝으로 현대사회의 병리적 증상과 원인을 적확하게 짚어내서 놀랐다. 철학책에 익숙하지 않아도 한번 도전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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