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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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피로사회>는 얼마 전에 읽은 엄기호의 <단속사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저자인 한병철교수는 재독 철학자로 90년대에 독일로 건너가 서양 근대 철학을 전공한 인물인데, <피로사회>라는 짧은 에세이를 통해 독일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연대 조한혜정교수의 추천도서 목록에서 이 책을 본 것 같다.

 

 

그의 주장은 신선하고 정확하다.

그는 후기 현대 사회를 긍정과 자유를 바탕으로 한 '긍정과잉의 성과사회'라고 진단한다. 인류는 명령과 복종의 '규율사회'를 지나 긍정과 자유를 추종하는 '피로사회'로 진입했다는 그의 주장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동안 긍정과 자유는 추구되고 높이 평가되어 온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지나친 자기 긍정과 성과주의에 빠져 스스로를 착취하는 상태에 빠져버렸으며, '부정성'이 결여된 '긍정성'으로 인해 피로하다는 그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한병철, <피로사회> p11~12 中-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강조적 의미의 자아 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한병철, <피로사회> p27~28 中-

 

성과와 긍정 과잉의 시대에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노동하는 노예로 전락해 버렸다는 주장은 참으로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이와 같은 자발적인 성과주의와 긍정과잉 시대가 도래하게 된 건, 생산과 소비가 극에 다다른 자본주의가 (발전과 확대를 지속시키기 위해) 스스로 자가 발전한 결과라는 점이다.

 

긍정과잉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어쩔 수 없이 우울할 수 밖에 없다. 이런 감정은 발췌문에서 보다시피 '무엇을 할 수 없는' 통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에서 '무엇을 해야 하며, 왜 해야하는지 모르는 것'에서 기인한다.

 

특히 저자는 여전히 현대 사회의 주요 분석 코드로 자리잡고 있는 푸코의 '규율사회' 이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 등 기존 철학 이론들이 더 이상 후기현대사회를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서양근대철학의 한가운데라고 할 수 있는 독일 사회에서 그의 이와같은 주장들이 거부되지 않고 수용/지지된다는 점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전,후기현대사회의 폐해를 직접 체험한 당사자의 관점이라는 점도 고려해 볼 수 있겠지만, 그만큼 독일 사회가 한국 사회보다 수평적이고 평등하며 자유롭게 '부정성'을 표출할 수 있다는 면에서 훨씬 더 건강한 사회라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적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사회다. 그것은 한트케가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분열적인 피로"라고 부른 바 있는 바로 그 피로다.

 

-한병철, <피로사회> p66 中-

 

그렇다!

우린 긍정과잉과 성과주의를 부르짖는 피로사회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적절한 대처방안은 없는 걸까? 이 질문에 저자는 과잉 긍정을 불러오는 원인은 극단적으로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사회 구조에 있는데, 사회구조란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개개인이 바로 이점을 명확하게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는 말로써 답변을 대신하고 있다. 

 

사회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면, 결국엔 또 다시 정치 문제로 귀결되는 것 아닌가?

결론은 민주시민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며 성숙한 시민의식은 또한 민주주의라는 토양 속에서 자라란다고 할 수 있겠다.

 

 

끝으로,

엄기호의 <단속사회>는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를 언급하고 있으나, 내가 이해한 그 책의 주제는 역설적이게도 '피로사회'의 도래와 위험성을 경고하기보다는 단속과 규제로 통칭되는 과거 '규율사회'의 타파를 핵심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우리사회가 '피로하지 않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규율사회에서 확실하게 벗어난 서구 유럽에 비해 여전히 규율사회의 끄트머리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읽혀진다. 

 

그렇다면,

우리사회가 아직 '피로사회'에 진입하지 않았음을 기뻐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구조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서구보다 뒤처지고 뒤늦었음을 슬퍼해야 하는가?

 

 

오랜만에 제대로된 철학서적을 읽었다.

요즘의 화려한 디자인과 고급 종이로 중무장한 책과는 달리,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소박하게 생겨서 깜짝 놀랐고, 널리 알려진 평판에 비해 너무 얇아서 두번 놀랐으며, 끝으로 현대사회의 병리적 증상과 원인을 적확하게 짚어내서 놀랐다. 철학책에 익숙하지 않아도 한번 도전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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