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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평점 :
제대로된 책읽기란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권의 책을 완독하면
그때부터 생각이 깊어진다.
이 생각....
저 생각...
생각의 한 조각을 움켜잡고 억지로라도 글로 옮겨보면 뜻밖에도 생각이 정리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곤 한다. 두서없이 머릿속을 휘젓고
돌아다니던 생각들이 글로 옮겨지는 과정 속에서 더 한층 성숙해진다고나 할까... 암튼, 각설하고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대부분의
애독자(愛讀者)들이 독서 자체보다는 독서 후의 글쓰기가 더 중요하다고 하는가보다.
나 역시 한 권의 책을 다 읽으면 또 다른 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독후감을 쓰는 편이다. 보통 이틀을 넘기지 않는 편이지만, 책을
뗀지(?) 하루 이틀 심지어 일주일이 지나도 도무지 독후감을 쓸 엄두가 나지 않는 책들이 있다. 충격이나 감동의 깊이때문일수도 있지만 나의
경우엔 주로 내용의 방대함 혹은 난해함이 더 큰 이유라 하겠다.
엄기호의 <단속사회> 역시 그런 책 중 하나다.
저자는 우리사회를 '같고 비슷한 것에만 접속하고 나와 다른 것은 철저하게
차단'하는 사회라고 진단하고, 이런 사회를 '단속사회'라고 일컫는다. 단속사회는 낯섦을 통한 성장과
성숙이 차단되어 있기에 삶의 연속성이 끊어지고, 나와 타인의 경험을 통한 창조 또한 불가능한 사회다.
우리에게 부재한 것은 실존적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사적인 경험을 공적인 언어로 전환하는 관계의
부재다. 이런 관계가 부재함으로써 자신의 경험을 남도 듣고 창조하면 좋을 이야기로 만드는 능력 또한 전승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창조점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사회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누군가의 창조점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적 존재감을 획득하고 공적인 존재로 설 수
있다.
-엄기호, <단속사회> p26~27 中-
'나의 경험이 그 누군가의 창조의 시작이 되고, 나의 성장은 타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어쩌면 이렇게 단 한줄로 소통의 중요성을 표현해 놓았을까...
단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적어 놓은 인용문이 이번처럼 많은 경우도 매우 드물었다.
책 속의 인용문을 적어놓은 것만도 A4 용지 앞뒤를 가득 채우고도 남으니 말이다. 하나같이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이다.
사냥꾼의 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침묵하는 전략을 택한 것은 안전의 목적과
의미가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는 낯선 존재들을 만날 때에야 비로소 익숙한 것을 상대화하게 되고 때로는 '친숙한 관념과 기성 진실을 뒤집어 놓을 수' 있게 된다.
새로운 것을 배워가면서 우리는 낯선 것에 도전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용기를 얻는다. 그런데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동일성에만 숨어들게 되면서
우리의 경험은 축소되고 성장의 기회는 봉쇄된다. 이것이 사냥꾼의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안전의 댓가다.
-엄기호, <단속사회> p59~61 中-
정글에선 누구나 사냥감이 아닌 사냥꾼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냥꾼은 언제나 극소수다. 물론, 사냥꾼은 사냥감보다 강하다. 그런데 다수의 사냥감을 동시에 감당할 수 있을만큼 강할까?
만약, 다수인 사냥감들이 '난 사냥감이 아니야!' 라거나, 혹은 '언젠가는 나도 사냥꾼이 될 수 있을 거야!' 등등의 허튼 기대와 희망을
품지 않게 된다면 어찌될까?
다수의 사냥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지만, 모든 사냥꾼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답을 찾아낸다.
통치는 개인의 초조함을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상태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초조함의 원인으로 자신의
부족을 탓하게끔 조장한다. 사람들은 만성적인 초조함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왜 자신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초조해하는지를 돌아보지 못한다.
(...)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다면 이는 사적인 것을 넘어 공공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초조함이 자신의 바깥을 돌아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 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사회적인 것으로 보편화하지 못하고 자신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 이 또한 통치 전략 중 하나다.
엄기호, <단속사회> p237~238 中-
모든 자기개발 서적과 소위 '멘토링'이니 '힐링'이니 하는 말들로 포장된 강연들은 하나같이 "니가 지금 이모양 이꼴인 것은 남들보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면서, "앞으로 기회는 많으니 정신적 안일함과 무책임함에서 벗어나 더 열심히 매진하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뭘 얼마나 잘못했다는 거지?'
'그리고 도대체 앞으로 뭘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한다는 거지?'
과거에는 말이 곧 폭력이었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었다면, 이제 말은 '사기'에 불과하다.
이전에는 말의 뜻을 새길 필요가 없었다면, 이제는 그것의 의도와 배후를 의심해야 한다. 또한 이전에는 권력자들이 우리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
했다면, 이제는 그들이 우리의 말을 못 들은 척 묵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소통에 대한 요구'는 자연스럽게 말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요구로 치환되었다.
-엄기호, <단속사회> p177~178 中-
'현대인은 긍정과잉과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착취하며 피로감을 느낀다'고 주장한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떠오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밖에도 <단속사회>의 저자는 요즘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상과 철학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면서
그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바우만에 따르면 이제 근대 국가는 제약없이 행사되는 시장의 힘에 의해 초래된 소실과 피해를 제한하고, 약자들을 지나치게 고통스러운
재난으로부터 보호하고, 불확실한 처지의 사람들을 자유경쟁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체제유지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국가의 가장 주된 임무가 '시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국가는 자신의 정당성의 근거를 경제적 영역이 아니라 비경제적 영역에서 다시 찾아야 했고, '안전'을 통해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엄기호, <단속사회> p59 中-
바우만은 액체 근대로 진입하면서 세가지 범주의 신뢰가 모두 붕괴했다고 말한다. 첫번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두번째는 타자에 대한, 세번째는
제도에 대한 신뢰가 그것이다. (...) 제도와 타자,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불신할 때 안전을 위해 자기가 자기를 감시하고 검열하는
자기단속 현상은 확산된다.
-엄기호, <단속사회> p177~178 中-
요즘 인문학 특강 등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단어 중 하나를 꼽으라면 '파놉티콘'이 아닐까 싶다. '파놉티콘'이란 영국의 법학자인 제레미
벤담이 주장한 감옥으로, 감시와 통제로 대표되는 근대사회의 핵심 키워드라 하겠다.
정보의 공유와 편리함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개인정보수집과 범죄의 예방과 안전에 대한 요구 및 우려와 함께 등장한 CCTV
설치논란 등등을 보면서, 우리 선조들이 '생존'을 위해 '자유'를 포기했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안전'을 댓가로 '자유'를 포기해야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