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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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없이 반찬만 먹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빵 없이 잼만 먹어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반찬은 밥없이 먹을 수 없고,

빵 없이 먹는 잼은 허기를 채워주지 못한다. 

 

밥과 빵은 그 자체로는 별맛은 없지만 도움이 된다.

장편보다 별 재미는 없지만 단편이 때론 위로가 되어주듯이,,,  

 

 

 

 

레이먼드 카버는 알콜중독에 시달리다가 막 중년을 벗어나려는 순간 폐암으로 생을 마감한 미국의 단편소설작가다. <대성당>은 그의 세번째 단편 모음집으로 <대성당>을 포함하여 열 두 편의 단편들이 실려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파산한 후 거처를 마련하려고 찾아온 일가족...

가출한 아내를 대신하여 어린 남매를 돌보다가 고열에 시달리는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

십년 넘게 한번도 만나지 않았던 아들을 만나러가는 도중, 내려야할 역에서 내리지 않은 남자...

약속시간에 생일 케익을 찾아가지 않는 고객에게 밤낮으로 전화를 걸어대는 빵집 주인...

 

여기에는 특별함이라고는 조금도 묻어 있지 않다. 시선을 끌만한 구석은 눈 씻고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그런 사람들에 그렇고 그런 일상들이 뭐가 중요하다고 이렇게 시시콜콜 써내려간 것일까?

 

이제 막 마지막 책장을 넘긴 나에게 열 두편이나 되는 그의 작품들이 남긴 이미지는 딱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시다시피, 작가가 창조해낸 인물들과 이야기들은 마음먹고 찾아보면 우리 현실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난, 내가 좋아하는 단편들을 일일이 꿰고 있다.

이건 바꿔말하면 그만큼 그 수가 한정되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단편에 감동받은 경우가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 적다는 뜻이다.

 

간혹, 유명한 문학작품상 수상작품집들을 읽다보면 슬그머니 짜증이 나곤 한다. 개인적 일상과 감상의 어느 한 찰나를 포착하여, 그것만 질리도록 물고늘어지는 것에 공감하지 못한 탓이다.

 

단편소설을 통해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건, 너무 현실을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잊고 싶은 현실...

피하고 싶은 현실...

멀어지고픈 현실....

 

그런 현실 속으로 자꾸만 끌어당겨지는 것에서 오는 거부감과 불편함...

 

이런 것이다.

단편을 읽는다는 건,,,

 

눈물도 웃음도 그 어떤 것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단편은 쓰지도 달지도 않은 밋밋한 쌀밥이나 식빵과 같다. 쌀밥은 다른 반찬과 함께 먹어야 한다. 반찬이 없으면 간장에라도 비벼먹어야 한다. 식빵 역시 그냥 먹으면 별 맛 없다. 딸기잼이든 땅콩잼이든 뭔가와 함께 곁들어 먹어야 한다. 더불어 우유와 같은 마실 것도 함께...

 

그래서 슬픈 현실을 잊고자 하는 이들에게 단편은 결코 탁월한 선택이 되지 못한다. 현실이 잊혀지기는 커녕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했던 현실마저 일깨우는게 단편이라는 것이니까...

 

그러므로, 단편은 쉽지 않다. 

구체적으로 꼭 집어 표현할 순 없지만, 최소한 장편보다는 어렵다.

그래서 단편을 장편보다 더 좋아한다면,

아직 인생을 몰라도 한참이나 모르거나 아니면 삶(현실)을 관조하는 방법을 터득하여 타인의 삶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거나 둘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별거 아니지만, 정말 도움이 되는 작품집이다.

 

 

 

 

+)

 

 

이 책을 읽게 된 건, 순전히 역자 때문이었다.


그의 문장에 기대어 힘겹게 숨쉬던 청춘의 그 시절... 

별 것 아닌 것같지만, 정말 도움이 되었던 청춘의 문장들...

그립구나.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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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 가장 절실하지만 한 번도 배우지 못했던 일의 경제학
류동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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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알려진 책이다.

진보 혹은 양심적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저자가 제대로 알려주는 진짜 경제이야기다. '경제'라고 하니 뭔가 거창해보이지만 실은 '밥벌이'(고상하게는 사회생활이라고 하지...)을 해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깨닫게 되는 잔혹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노동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가 되건만, 학교에서는 노동자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경제학 역시 경제 주체를 생산자와 소비자로만 구분하기 때문에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식하기보다는 '소비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낮은 소득을 벌충하기 위한 강도 높은 노동은 인간으로서 자존감까지 갉아먹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낮은 소득과 장시간 노동이 공존하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해서라도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소득-장시간 노동이 존재하는 다른 이유 한 가지를 더 들자면 소비자들이 자신의 편익을 극대화하고자 한다는 것, '톨레랑스(tolerance)'가 매우 작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직접 물건을 사서 들고 오기보다는 자기 집 현관까지, 그것도 빠른 시간 안에 배달되는 상태를 반길 것임에 틀림없다. 그 소비자가 택배노동자보다 더한 강도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라 하더라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소비자로서의 정체성과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은 이렇듯 쉴 새 없이 충돌한다. 물론 소비자들에게 '톨레랑스'를 가지라고 요구함으로써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형태의 '착한 소비'나 '윤리적 소비'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사태의 궁극적인 원인은 자본주의 경제 자체가 끊임없이 이윤을 늘리기 위한 구조로 탈바꿈해왔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p138~140 中-

 

이 부분을 읽으면서 격하게 공감했다. 

확실히 정곡을 찔린 기분이다.

 

경제가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어째서 더 피폐해지기만 하는지...?

취업스펙은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정규직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은 왜 갈수록 심해지기만 하는지...?

노동계에서는 왜 대기업 정규직의 권익만 수호할 뿐,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외면하는지...?

가장 절실하게 연대와 도움이 필요한 자영업자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노동자'가 아닌 '소자본가'로 인식하면서 몰락해 가는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미 현실를 제대로 직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정신없이 혹은 열심히 일만 할 뿐, 현실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정작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들은 너무 바쁘게 일만 하느라 책 읽을 시간조차 없다. 책 읽을 시간은 커녕 이런 책이 출간되어 있기나 한건지 인터넷을 검색할 짧은 틈조차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숙지하고 있던 바다.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내가 새롭게 깨달은 건, 나를 포함하여 짬을 내서 이 책과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노동의 혜택을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즉, 우리가 이런 책들을 읽고 생각을 깊고 폭넓게 하면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이런 여유조차 갖지 못하고 일만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건비가 오르지 않는건,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도 굶어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도 굶어죽지 않을 수 있는 건, 쥐꼬리보다도 더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면서 '자기착취식'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기착취식 노동'이라는 표현이야말로 신자유주의 구조 속에서의 노동을 잘 설명해준다.

과거에는 생산의 3요소 중,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와 노동을 소유한 노동자간의 계약 '관계'가 성립되었다. 하여, 자본과 노동의 소유 구도가 명확했다. 반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본질은 노동자이면서도 형식적으로는 자본가인 '거래'가 성립된다.

 

00택배 유니폼을 입은 택배기사들은 00택배소속 직원이 아니다. 택배기사들이 사용하는 택배 차량은 00택배회사 소유가 아니라 개별 택배기사들의 소유다. 그러므로 택배 기사들은 자본(차량)을 소유한 자본가임 셈이다. 

 

많은 학원강사들은 학원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개인사업자들로 퇴직금은 물론이고 4대보험 혜택도 받지 못한다. 이들은 노동자가 아닌, 엄연한 개인사업자 즉 '사장님'이거나 그 이름도 거창한 '프리랜서'이다.

 

회사의 영업사원도 출판사의 편집자도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는, 개인 사업자들이다.

 

일한만큼 능력만큼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미사여구로 이들의 노동은 착취된다. 여기에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잔혹한 진실이 담겨 있다. 그건 바로 과거에는 사장이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건, 그들이 리스크를 감수하기 때문이다. 즉, 장사가 잘 안 되도 직원 월급을 책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서처럼 '고용'이 아닌 '거래'로 노동 형태로 바뀌면서 사장이 당연히 짊어져야하는 책임 즉 리스크를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극적인 효과가 숨어 있다. 그러니 마치 노동에 따른 소득이 적은 건 개인의 무능력과 게으름의 소산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자기착취식 노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하기 전엔 몰랐던 이와 같은 것들을 알게 되자, 나는 조급함에 더 빨리 책장을 넘겨나갔다.

마치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을 읽듯이...

그러나 추리소설은 끝까지 읽으면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지만 이 책은 끝까지 읽어도 문제 해결책을 알려 주지 않는다. 물론, 저자가 해결책을 전혀 제시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일상에 균열을 내라!'는 저자의 주문은 무지개처럼 어렴풋하고 까마득하게 여겨질 뿐, 도저히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얼마전 TV를 통해 본, 어느 인문학자의 마무리 말이 함께 떠오르면서 허탈해졌다.  

 

여러분!

돈을 위해 살고 싶지 않으시죠?! 인간답게 살고 싶으시죠? !

그렇다면 생산과 소비, 둘 중 어느 한 가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직장에 출근하지 않으면 즉 노동을 '보이콧'하면 자본주의는 더이상 굴러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모두 물건을 사지 않는다면 회사(공장)가 망하기 때문에 역시 자본주의가 더 이상 생명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강신주 TV 강연 中-

 

다소 황당했다.

이건 돈을 거부할 선택의 여지가 우리에겐 아예 없으며 마찬가지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 역시 없다는 말과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일하기 전에 몰랐던 것들'을 알려주었던 저자가 내놓은 해결책이라면 해결책이요 대안이라면 대안이 나에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당장 우리의 일터를 꿈의 직장으로 만들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 일의 어느 순간 어느 국면에서 우리의 꿈을 실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관계를 거래로 만들어가는 경향을 한 번에 되돌리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거래 상대와 동료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해한다면 짧은 순간이나마 어느 순간에는 거래에서 관계로 역전하는 것도 가능하다. 비록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고 금세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린다고하더라도 그러한 시도를 끊임없이 할 때 비로소 장기적으로도 새로운 삶의 방식이 등장할 전망을 열어젖힐 수 있는 것이다.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p274 中-

 

 

물론, 어려운 문제다. 그러므로 쉽게 찾을 해답이 있을 턱이 없다는 점 역시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건, 그만큼 저자의 대척점에 서 있는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나도 절박하고 안타깝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엉뚱한데로 흘러가긴 하지만...

 

대기업 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동남아 어느 도시에 머물면서 현지인을 가정부와 운전사로 고용하고 외동딸은 현지 국제학교에 입학시킨 친구가 오랫만에 한국에 나와 학교 동창들을 모아놓고는 한국의 사교육 한심하다는 둥... 해외에서 바라본 한국은 정말 창피하고 부끄럽다는 둥... 한국인은 가족이기주의가 너무 심하고 양보할 줄 모른다는 둥... 심지어 자신은 한국에 있을 때에도 영어 사교육 한번 시키지 않았다는 둥...  입을 놀려대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 아는 것도 많고 유식하고 성격도 활발하고 다 좋은데...

왠지 이 친구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이라도 진실처럼 안 들린다.

한국 사회 변하고 바뀌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할 때,

그럼, 연봉 1억이 넘는 신랑을 둔 넌, 이 사회를 위해서 무슨 양보를 했고 어떤 희생을 했는데? 하고 되묻고 싶었다. 

 

근데, 정말 뜬금없이 이 좋은 책을 읽고 나서 왜 이런 못된 생각이 떠오른 걸까?

 

(누구는...

정년과 두둑한 퇴직금이 보장된 국립대 교수이며,

이런 말 저런 말 다 해도 누가 뭐라 하는 사람없고,

오히려 잘만하면 사회적 명성과 인세로 한몫 챙길 수 있겠지...???)

 

혹시,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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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소시오패스 - 차가운 심장과 치밀한 수완으로 세상을 지배한다
M. E. 토머스 지음, 김학영 옮김 / 푸른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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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무서운 책을 읽었다.

소시오패스(sociopath)가 직접 쓴 소시오패스에 대한 책이었다. 

 

저자는 백만 명 이상이 방문한 블로그 소시오월드닷컴의 운영자로 M.E. 토마스라는 이름은 물론 당연히 가명이다. 저자에 대해 공개된 건, 성별과 나이 그리고 종교와 직업 정도다.

 

내 호기심을 끌었던 건, 저자의 성별이 뜻밖에도(?) 여성이라는 점과 그녀가 금욕주의로 유명한 몬르몬교도라는 점이었다.

 

여기서 잠깐 소시오패스에 대해 언급하자면,  소시오패스는 사이코패스(psychopath)와 함께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일컬으며, 양자의 차이는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굳이 구분하자면, 사이코패스는 범죄 용어로 자주 등장하여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반면, 소시오패스는 드라마나 영화 속 캐릭터 등을 통해 최근에야 알려지기 시작한 용어라고나 할까? 다만, 내가 보기엔 사이코패스는 잔악한 범죄자의 전형으로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반면, 소시오패스는 '멋있고 쿨한 성격'으로 미화된 경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전형적인 특징은 '공감 능력의 결여'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입장 등에 대해서 느낄 수 없고 느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극단적으로 이기적이며 대인관계를 이용하는데에 능숙하다. 공감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타인의 감정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하여 거짓과 위선으로 타인의 행동을 조정한다. 

 

클렉클리는 사이코패스를 겉으로는 다른 사람들처럼 느끼고 소망하며 기대하고 사랑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탈월한 능력을 갖춘 반사회적인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사실상 사회에서 그들을 분간하기는 어렵다. 사이코패스는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에 탁월하다. 클렉클리가 말하는 사이코패스는 비범하리만큼 매력적이고 위트가 있다. 또한 차분하면서도 말이 유창하고 절박한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물론, 이처럼 '온전한 정신의 가면' 뒤에는 거짓말쟁이, 교활한 조종자, 책임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사람이 숨어 있다. 충동적이고 변덕스러워 잘 흥분하고 똑같은 실수를 여러 번 반복하는 사람, 자아도취에 빠져 감정적으로 진정한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고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대개 자연스러운 감정을 조악하게 모방한다. 클렉클리는 이 독특한 인격적 특징의 조합은 사이코패스뿐만 아니라 기업이나 범죄의 세계에서 악명 높은 사람들의 특징과도 일치한다고 인정했다.

나는 반세기도 훨씬 전에 쓴 클렉클리의 임상학적 프로파일보다 더 내 안의 소시오패스를 잘 설명한 글을 어디서도 찾지 못했다.

-M.E. 토마스 <나, 소시오패스> p55~56 中-

 

그런데 불행하게도 무한경쟁사회에서는 소시오패스의 특성들이 탁월한 성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사람들을 정리해고해야 하는 기업의 CEO... 

롤러코스터를 타는 객장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어마어마한 투자를 할 수 있는 펀드매니저...

의뢰인의 유무죄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교묘하게 배심원과 판사의 공감과 동정을 얻어내느냐에 집중하는 변호사...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외과의사와 인정사정 보지 않고 빚독촉을 하는 채권추심원...

그리고 포커패이스에 능해야하는 운동선수와 달콤한 말로 대중을 선동하는 일부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까지...

 

이 책의 저자 역시 로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로펌회사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근무하다가 현재는 법학과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30대 초반의 새파란 나이에 그것도 보이지 않는 성차별을 극복해야하는 여성으로서 말이다.

 

이 쯤해서 고백해야겠다.

솔직히 나,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공부하지 않아도 우등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으며 고등학교 시절 밴드부에서 유일한 여성 드럼 연주자로 활약하다가 충동적으로 타악기를 전공으로 선택한 뒤, 대학 졸업후 빈둥거리다가 남들은 죽도록 공부해야 합격한다는 명문 로스쿨에 들어가는가 하면, '난다 긴다' 하는 수재들을 제치고 우등 졸업과 동시에 LA최고의 로펌에 신참 변호사로 입사한다. 그런데 일이 재미없어서 회사 경비로 테니스 레슨 비용을 결재하는 등 악행을 일삼다가 2년만에 해고된다. 그리고 대학교수로 화려하게 부활....

 

나는 필요하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삶의 성공 지표를 손에 넣었다. 시험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고 이력서는 완벽했다. 내 출세 곡선은 그야말로 눈부실 지경이었다. 사기처럼 보여 더 눈부셨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런 게임을 좋아했고 어렸을 때도 전 과목 A학점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를 짜릿하게 만든 것은 A학점을 받을 최소한의 노력의 선이 어딘지 찾는 일이었다.

변호사가 되는 것도 똑같았다. 애초에 나는 진심으로 변호사가 될 마음이 없었고 그저 변호사처럼 연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p55~56 中-

 

소시오패스 기질은 내게 타고난 경쟁적 이점이다. 뇌에 독특한 사고방식이 내장되었다는 말이다. 나는 내 능력을 확신한다. 또한 나는 집단 내에서 영향력과 힘의 흐름을 결코 놓치지 않은 매의 눈을 갖고 있다. 덕분에 중대한 위기가 닥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장담컨대 세상에는 소시오패스에게 유리한 일이 매우 많다. 소시오패스인 나는 대중 앞에서의 연설이 두렵지 않고 감정적 폭식을 할 가능성도 별로 없다. 가끔은 내게 공포나 감정이 있는지 나조차 모를 때가 있지만 그런 것이 보통 사람과 달리 내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두려움이 없고 확신에 가득 찬 모습, 카리스마, 무자비함, 뛰어난 집중력처럼 21세기에 성공의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특질을 보이는 소시오패스는 성공 확률이 높다. 나는 이러한 특질을 이용해서 부적응 어린이에서 재능있는 연주자로, 성공한 법학도로, 두둑한 연봉을 받는 변호사로 계층 이동을 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특질이 장차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M.E. 토마스 <나, 소시오패스> p219 中-

 

게다가 그녀는 스스로 밝히길 타고난 미모는 아니지만 반짝이는 눈동자와 호기심 어린 표정 그리고 새하얀 이가 보이도록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수준높은 철학과 미학을 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윈드 서핑 등 악기와 스포츠에도 능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단연코 눈에 띄는 존재였다고 한다.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이성이든 동성이든 그녀에게 반해서 자발적으로 봉사하고 복종하는 사람들을 일일히 손으로 열거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단다.

 

사랑은 어려운 속임수가 아니다. 섬세함 같은 건 없어도 상관없다. 사람들은 사랑에 너무 굶주려 있기 때문에 평범한 술수, 즉 가벼운 접촉, 감정이나 관심을 표현하는 모호한 몇 마디, 헤어질 때의 열정적인 포옹 한 번이면 충분하다. 드라마 한 편만 봐도 사랑을 알 수 있다. 덧없는 탓에 세상에서 가장 감질 나는 것이 사랑이란 사실을 말이다.  (......)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아무라도 사랑할 수 있고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을 한동안(하룻밤, 일주일 혹은 몇 주라도)만이라도 삶의 이유로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수단에 비해 사랑이 더 많은 힘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을 더 많이 이용할 수는 있다. 사랑에는 당길 수 있는 지렛대와 누를 수 있는 버튼이 많고 방법도 무한하다. 사랑은 내가 일방적이고 직접적으로 고통을 야기했다는 씁쓸한 기분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나는 그들을 조종하거나 속였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 M.E. 토마스 <나, 소시오패스> p295~302 中-

 

 

이처럼 그녀는 고백과 변명 사이를 교묘하게 왔다갔다 한다.

심지어 그저 재미삼아 타인의 인생을 망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살인이나 기타 치명적인 불법행위를 단 한번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을 강변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학교 선생님이 자신에게 모욕감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선생님을 아동성희롱범으로 몰아 고소한다든지, 자신에게 빠진 남자를 꼬드겨 그 남자를 짝사랑하는 또 다른 여자에게 거짓 고백을 하게 만들어 그녀를 정신적으로 무너뜨려놓고도 일말의 반성이나 후회는 없다.

 

왜?

그녀는 소시오패스니까... 

 

특히, 나는 대다수 소시오패스들이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고려하여 자신의 성향을 부인하거나 감추고 싶어할 때 그녀는 당당히 소시오패스 관련 블로그를 오픈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넘치는 자신감과 우월감...

남앞에서 주목받고 싶어하는 욕구...

자신들은 비정상적인 뇌구조를 타고나서 어쩔 수 없다는 변명...

소시오패스를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것은 만인의 자유를 위해서도 옳지 못하다는 논리...

 

(신이시여, 이들을 어찌하시렵니까?)

(이들을 기어이 인류의 'X맨'으로 만드시렵니까?)

 

 

이기적인 소시오패스적 성향이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생존에 훨씬 더 유리하다. 그래서 어쩌면 소시오패스적 DNA가 끈질지게 살아남아 후손에게 유전되고 또 유전되어 먼 미래에 현생 인류를 대체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불을 사용할 줄 알았으며 혹독한 빙하기에도 살아남았던 네안데르탈인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미개했던 현생인류에게 멸종당했고, 고도로 발달된 제국을 만들었던 잉카와 마야인들이 유럽인들에게 멸종되었듯이 말이다.

 

전체 인구의 4%, 즉 스물 다섯 명 중 한명이라는 그들...

지극히 소수여서 우려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인간이므로 다수로부터 이해받고 심지어 보호받아야 하는걸까?

인간에게 부여되는 생존추구권과 행복하고 사랑할 권리를 그들에게도 똑같이 부여해야 할까? 

 

이런 질문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얼마전에 본 영화의 한장면이 떠오른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에서 유인원의 우두머리 시저에게 총을 쏜 후 반란과 전쟁을 일으킨 코바가 인간의 도움으로 살아난 시저와 마지막 대결을 벌인다.

까막득히 높은 철제 빔에 간신히 매달린 코바가 마지막으로 시저의 양심에 호소한다.

"Apes do not kill Apes.(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

 

평소 자신의 신념이 담겨 있는 이 말을 들은 순간, 시저의 눈빛이 잠깐 흔들린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꼭 붙잡고 있던 코바의 손을 놓는다. 

"You are not Apes.(넌, 유인원이 아니다)"

 

 

소시오패스에게는 심장은 있지만 양심은 없다.

 

양심이란 때론 거추장스러워서 휴지조각처럼 내던지고 싶은 것이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반드시 부여잡아야하는 인간의 마지막 감각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양심을 일컬어 오감과 육감에 이은 제7감각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제 인간(human)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도구를 사용할 줄 안다거나 직립보행을 한다거나 하는 특징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 바로 양심의 유무를 포함시켜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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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들의 사생활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구나...

 

형의 여자를 흠모하는 남자...

두 다리에 장애를 입은 아들을 업고 사창가를 찾아가는 엄마...

 

짧은 인연의 남자를 잊지 못하고 평생을 기다리는 여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는 남자...

 

줄거리만 본다면 분명 이 작품은 신파에 막장 드라마다.

 

부록으로 실린 작품평을 먼저 읽은 탓에 줄거리까지 꿰고 있었던 게 실수라면 실수였을 것이다. 1/3 넘게 진도가 나갈 때까지 작품에 몰입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등장인물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과 사고방식을 납득할 수 없었고, 납득하지 못하니 공감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어째서 허물인가, 무엇이 내 사랑을 당당하지 못하게 만드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나에게 묻고 스스로 대답했다. 그것은 형의 존재였다. 나는, 하필이면 형의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는가?하고 묻지 않고, 왜 내 사랑 앞에 형이 장애물로 있는가? 하고 물었다. 모든 생각이 나로부터 비롯하고, 나를 중심으로 돌고, 나에게서 멈췄다. 내가 태초였다. 내가 있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사랑이 있기 전에 있었던 어떤 사랑도 실체가 아니었다. 실체가 아니므로 인정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나의 사랑이 있기 전에는 형의 사랑도 없었고, 없어야 했다.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체로 인정할 수 없었다........이쯤 되면 심각하지 않은가? 이쯤 되면 위험하지 않은가? 그랬다. 내 사랑은 심각한 사랑이었고 위험한 사랑이었다.

 

-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 p63 中-

 

작중 화자이자 형의 여자를 사랑하는 주인공의 사랑은 상대를 '향한' 열정이다. 

이유도 조건도 없다. 그러므로 그와 그녀 혹은 주변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모든 사랑이 특별한 건 제각각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사랑의 특수성을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한 가지 생각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게 만드는 열정은 그에게 터무니 없는 자신감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그녀 또한 나를 사랑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분별이 생략된 열정은 위험하다. 이런 맹목적인 열정을 우리는 종종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더더욱 위험하고 치명적이다... 

 

그런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두 다리가 불구가 된 아들을 등에 업고 욕구를 해소시켜 주기 위해 사창가를 찾아가는 어머니를 본다.

발작으로 엉망이 된 아들의 방을 치우고 꼼꼼하게 목욕까지 시켜주는 아버지를 본다.

좌절된 사랑으로 불행의 늪에 빠져버린 사랑하는 여자를 본다.

그리고...

그의 사랑이 눈을 뜬다.

사랑은 상대를 '향한' 열정이 아닌, 상대를 위한 '분별'임을 깨닫는다.

 

잠깐만!

여기까지 읽고나서 만약 이 작품을 앞으로 읽으실 예정이시라면 더 이상 이 글을 읽지 마시길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참고로 작은 팁((tip) 하나 더 드리자면, 부록으로 실려 있는 작품 해설도 절대로 먼저 읽지 말기를....

 

 

그녀의 굽은 어깨를 가만히 토닥거리며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다고 삶이란 생각처럼 엄숙하지도 않고 기대처럼 정연한 것도 아니라고 맑았다가 흐리고, 비가 오다 해가 뜨는 거라고, 그런 게 삶이라고 속삭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꾸만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꾸만 형의 얼굴이 떠올라서 나를 제지했다.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흐느끼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나는 조용히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 p121~122 中-

 

여기 또 다른 사랑이 있다.

사랑은 사람마다 그리고 매번 각기 다른 빛깔로 다가온다고 했던가.

그래서 여러번 사랑을 해본 사람도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스쳐지나치기도 한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한번도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도 단번에 사랑임을 알 수도 있다. 

 

학교를 중퇴하고 병든 아버지를 부양하던 스물한살 꽃같은 그녀에게 사랑이 찾아왔고, 그녀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게, 사랑이라는 걸...

 

그렇게 왔다. 사랑은. 마치 눈에 띄지 않은 사이에 꽃봉오리가 벌어지듯이, 그렇게 천천히. 사랑이었을까,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 p155~156 中-

 

짝사랑은 참 힘들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만 쳐다보는 상대방...

좌절된 사랑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아니 내가 숨쉬고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잊어야 한다. 그따위 사랑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처음 만나던 날 예감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녀가 그 사람을 그때 이후로 단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는 것과 같이... 내 눈에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녀에게는 내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에 대한 내 사랑만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나에게 사랑하는 행복을 알게 해준 첫번째 사람이고, 유일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이유만으로도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다.

 

-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 p259~260 中-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될 수 없었다는 이 남자...

이 남자의 마음을 잴 수 있는 줄자가 있다면 족히 2만킬로는 넘을테지...

지구의 둘레가 4만킬로니 딱 지구 반바퀴, 태평양을 가로 지를 만큼의 거리....

 

 

읽는 동안에는 잘 몰랐는데....

이 작품, 참 깊고 넓다.

마치 바다처럼...  

마치 하늘처럼...

 

아니, 아니,

땅속 깊이 파고드는 나무처럼...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나무처럼...

바다를 품어 안은 나무처럼...

 

사랑이란, 스펙트럼처럼 제각각의 빛깔을 띄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2000년도에 출간되었지만 올해 재출간된 작품이다.

그만큼 독자들 사이에서 읽혀지고 또 읽혀지는 작품이란 의미일테지...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르 클레지오가 '어떻게 읽어도 고갈되지 않는 무궁무진한 작품'이라고 극찬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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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의 매 - 시그마 북스 024 시그마 북스 24
대쉴 해미트 지음, 김희균 옮김 / 시공사 / 1996년 9월
평점 :
절판


Q: 대쉴 해미트? 그는 누구인가?

A: 레이먼드 챈들러와 더불어 하드보일드의 대가. 1894년도에 태어나 1922년도에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서서 20년대 후반 탐정소설로 명성을 쌓음.

 

<몰타의 매>는 1930년도에 출간되었으니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기에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작가로서 최전성기에 쓰여진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사실, 하드보일드계 작품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이는 비록 탐정이 등장하긴 하지만 정통 추리소설처럼 '사건'과 '추리'를 쫒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범죄나 탐정' 등의 요소만 없다면 전통 소설에 더 가깝다.  하드보일드 작품의 묘미는 등장인물의 성격과 묘사 및 문체(대사)에 있다.

 

사립탐정인 사무엘 스페이드는 어느날 오쇼네시라고 자신을 소개한 젊은 여성으로부터 동생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그녀가 동생을 데려간 인물로 지목한 더스비라는 남자를 미행하던 사무엘의 동료인 마일즈가 총에 맞아 죽고만다.  그런데 더스비는 마일즈를 죽인 용인자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는데, 뜻밖에도 더스비마저 죽은 채 발견된다. 

 

사무엘은 처음에는 마일즈의 부인인 이바 아처를 의심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무엘과 깊은 관계로 남편이 사라지면 사무엘이 자신과 결혼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런 이바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에게 여자란 그저 지나가는 차와 같은 존재일뿐이다.

 

한편, 더스비가 죽고 낯선 인물이 오쇼네시 앞에 기웃거리자 오쇼네시는 더더욱 사무엘에게 매달린다. 사무엘은 자신의 의뢰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자꾸만 그녀가 의심스럽기만 하다. 

 

이런 와중에 골동품 중개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인물이 사무엘에게 제안을 해 온다. 1530년 성요한 성당 기사단이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에게 바쳤다는 황금상(일명, 몰타의 매)을 찾고 있는데, 오쇼네시가 홍콩에서 빼돌린 그 황금상을 찾아서 자신에게 넘기면 현금 1만불을 주거나 판매대금의 25%를 지불하겠다는 것이다.

 

우연히(?) 황금상을 손에 넣게 된 사무엘은 황금상을 굿맨(골동품 중개인)에게 넘겨주고 1만달러를 챙기려는 순간 황금상이 가짜라는 게 드러난다. 사무엘은 도망치는 굿맨 일당을 더스비 살인범으로 경찰에게 넘긴다. 그리고 남은 문제는 누가 마일즈를 죽였는가? 이다. 더스비가 죽였을까? 그렇지만 사건 정황상 더스비를 미행하던 마일즈가 어두운 언덕 골목으로 더스비를 따라갔을 까닭이 없다.

 

결국, 범인은 더스비를 따돌리려고 했던 오쇼네시였다.  말그대로 황금에 눈이 멀어 서로 협력하다 배신하고 서로 쫒고 쫒기며 죽고 죽이는 비정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오쇼네시와 뜨거운 사이였던 사무엘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오쇼네시를 살인범으로 경찰에 넘긴다.

 

하드보일드 소설은 지금까지 몇 편 읽지도 않았을 따름이지만 탐정들의 캐릭터는 대동소이한 것 같다.

바람둥이고 여자들에게 인기있으면서 냉정하다. 

이는 아마도 남성들의 로망을 투영시킨 결과가 아닌가 싶다. 작가인 사무엘 대쉴 해미트 역시 주인공인 사무엘 스페이드와 같은 남자가 되고 싶지 않았을까? 작가가 등장인물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인다는 건, 특별한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정리 차원에서 줄거리를 써보긴 했다만,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내용도 등장인물도 아니다.  작품 속에는 사건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야기 한토막이 나온다. 사무엘이 오쇼네시에게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는데, 마치 커다란 망치로 머리 한대를 맞은 것같은 강렬함이 남는다.

 

1927년 당시 시애틀의 탐정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던 사무엘에게 남편을 찾아 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의뢰인의 남편인 플릿크래프트라는 성공한 남성은 아내와 5살, 3살짜리 두 아들을 남겨둔채 1922년 어느날 점심을 먹으러 간다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알고보니, 플릿크래프트는 찰스 피어스라는 이름으로 바꾸고는 다른 여성과 결혼해서 사내아이까지 한명 두고 있었다. 근데, 이 남자에게 사무엘이 가출한 이유를 묻자, 그는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공사중인 건물에서 철골이 떨어졌는데 다행히 맞지는 않았지만 철골이 떨어진 충격으로 보도 블록이 깨지면서 얼굴에 작은 상처를 입었단다. 상처는 아프지 않았지만 그 순간 플릿크래프트는 한가지 진실을 깨닫게 된다.

 

좋은 남편이고 시민이고 아버지인 그도 사무실과 음식점 사이에서 길을 가다가 떨어지는 철골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 것이다. 그는 인간이란 우연에 의해서 죽어가는 것이며, 그가 살아 있는 사실도 아직 우연이 그에게 덮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깨닮음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로 그를 괴롭힌 문제는 그런 식의 불합리한 운명이 아니었다. 그때 그 사건 이후로 그는 인간의 불합리한 운명을 쾌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를 괴롭힌 문제는 자기 주위의 사물을 가지런히 정돈해 놓고 보니까, 그는 점점 더 생명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시그마 출판사, 대쉴 해미트, <몰타의 매> p 92~93 中-

 

 

솔직히,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유명한 북 블로거들이 극찬한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혹시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 검색을 하던 중 알게 되었다. 내가 읽은 책은 도서관에서 빌린 것이라 1996년에 출판된 것이고, 2009년도에 열린책들에서 재번역 출판된 버전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아는 인생은 공평하고 정연하고 이성적이고 책임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철제빔의 추락이 인생은 본래 그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훌륭한 시민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도 사무실에서 식당에 가다가 떨어지는 빔에 맞아 즉사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죽음은 그렇게 마구잡이로 찾아오며, 사람은 눈먼 운명이 허락하는 동안만 목숨을 부지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그런 운명의 불공평함이 아니었다. 최초의 충격이 지난 뒤 그 점은 받아들였다. 그를 괴롭힌 것은 그가 영위해 온 정연한 일상이라는 게 인생 본래의 길이 아니라 인생을 벗어난 길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열린책들, 대실 해밋, <몰타의 매> p85~86 中-

 

위에서 인용한 부분을 처음 읽었을때 살짝 '감'이 왔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웬지 모르게 집중이 안 되고 읽는 내내 너무 고역스러웠기 때문에 빨리 끝내고만 싶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독후감을 쓰기 위해 검색을 하다가 두번째 번역 문장을 접하게 되었다. 

 

느낌이 너무 달라서 나조차도 깜짝 놀랐다.

 

분명 영어 원문은 같았을 텐데...

10여년이라는 시차를 감안하더라도 아쉬움이 너무 많이 남는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완성도 높은 번역본을 접했더라면 최소한 '하드보일드 작품은 이제 다시는 안 읽을테다'라고 결심하는 상황까지는 안 갔을 것같기 때문이다.

 

바로 직전에 읽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 독후감에서도 하드보일드 작품에 대한 실망과 혹평을 쏟아냈었는데....

혹시, 그 작품도 최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최선도 아닌, 차선이나 차악의 번역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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