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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들의 사생활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구나...
형의 여자를 흠모하는 남자...
두 다리에 장애를 입은 아들을 업고 사창가를 찾아가는 엄마...
짧은 인연의 남자를 잊지 못하고 평생을 기다리는 여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는 남자...
줄거리만 본다면 분명 이 작품은 신파에 막장 드라마다.
부록으로 실린 작품평을 먼저 읽은 탓에 줄거리까지 꿰고 있었던 게 실수라면 실수였을 것이다. 1/3 넘게 진도가 나갈 때까지 작품에 몰입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등장인물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과 사고방식을 납득할 수 없었고, 납득하지 못하니 공감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어째서 허물인가, 무엇이 내 사랑을 당당하지 못하게 만드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나에게 묻고 스스로 대답했다. 그것은 형의 존재였다. 나는, 하필이면 형의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는가?하고 묻지 않고, 왜 내
사랑 앞에 형이 장애물로 있는가? 하고 물었다. 모든 생각이 나로부터 비롯하고, 나를 중심으로 돌고, 나에게서 멈췄다. 내가 태초였다. 내가
있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사랑이 있기 전에 있었던 어떤 사랑도 실체가 아니었다. 실체가 아니므로 인정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나의
사랑이 있기 전에는 형의 사랑도 없었고, 없어야 했다.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체로 인정할 수 없었다........이쯤 되면 심각하지 않은가?
이쯤 되면 위험하지 않은가? 그랬다. 내 사랑은 심각한 사랑이었고 위험한 사랑이었다.
-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 p63 中-
작중 화자이자 형의 여자를 사랑하는 주인공의 사랑은 상대를 '향한' 열정이다.
이유도 조건도 없다. 그러므로 그와 그녀 혹은 주변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모든 사랑이 특별한 건 제각각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사랑의 특수성을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한 가지 생각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게 만드는 열정은 그에게 터무니 없는 자신감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그녀 또한 나를 사랑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분별이 생략된 열정은 위험하다. 이런 맹목적인 열정을 우리는 종종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더더욱 위험하고 치명적이다...
그런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두 다리가 불구가 된 아들을 등에 업고 욕구를 해소시켜 주기 위해 사창가를 찾아가는 어머니를 본다.
발작으로 엉망이 된 아들의 방을 치우고 꼼꼼하게 목욕까지 시켜주는 아버지를 본다.
좌절된 사랑으로 불행의 늪에 빠져버린 사랑하는 여자를 본다.
그리고...
그의 사랑이 눈을 뜬다.
사랑은 상대를 '향한' 열정이 아닌, 상대를 위한 '분별'임을 깨닫는다.
잠깐만!
여기까지 읽고나서 만약 이 작품을 앞으로 읽으실 예정이시라면 더 이상 이 글을 읽지 마시길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참고로 작은 팁((tip) 하나 더 드리자면, 부록으로 실려 있는 작품 해설도 절대로 먼저 읽지 말기를....
그녀의 굽은 어깨를 가만히 토닥거리며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다고 삶이란 생각처럼 엄숙하지도
않고 기대처럼 정연한 것도 아니라고 맑았다가 흐리고, 비가 오다 해가 뜨는 거라고, 그런 게 삶이라고 속삭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꾸만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꾸만 형의 얼굴이 떠올라서 나를 제지했다.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흐느끼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나는 조용히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 p121~122 中-
여기 또 다른 사랑이 있다.
사랑은 사람마다 그리고 매번 각기 다른 빛깔로 다가온다고 했던가.
그래서 여러번 사랑을 해본 사람도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스쳐지나치기도 한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한번도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도
단번에 사랑임을 알 수도 있다.
학교를 중퇴하고 병든 아버지를 부양하던 스물한살 꽃같은 그녀에게 사랑이 찾아왔고, 그녀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게, 사랑이라는 걸...
그렇게 왔다. 사랑은. 마치 눈에 띄지 않은 사이에 꽃봉오리가 벌어지듯이, 그렇게 천천히. 사랑이었을까,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 p155~156 中-
짝사랑은 참 힘들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만 쳐다보는 상대방...
좌절된 사랑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아니 내가 숨쉬고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잊어야 한다. 그따위 사랑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처음 만나던 날 예감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녀가 그 사람을 그때 이후로 단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는 것과 같이... 내 눈에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녀에게는 내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에 대한 내 사랑만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나에게 사랑하는 행복을 알게 해준 첫번째 사람이고, 유일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이유만으로도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다.
-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 p259~260 中-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될 수 없었다는 이 남자...
이 남자의 마음을 잴 수 있는 줄자가 있다면 족히 2만킬로는 넘을테지...
지구의 둘레가 4만킬로니 딱 지구 반바퀴, 태평양을 가로 지를 만큼의 거리....
읽는 동안에는 잘 몰랐는데....
이 작품, 참 깊고 넓다.
마치 바다처럼...
마치 하늘처럼...
아니, 아니,
땅속 깊이 파고드는 나무처럼...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나무처럼...
바다를 품어 안은 나무처럼...
사랑이란, 스펙트럼처럼 제각각의 빛깔을 띄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2000년도에 출간되었지만 올해 재출간된 작품이다.
그만큼 독자들 사이에서 읽혀지고 또 읽혀지는 작품이란 의미일테지...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르 클레지오가 '어떻게 읽어도 고갈되지 않는 무궁무진한 작품'이라고 극찬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