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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 가장 절실하지만 한 번도 배우지 못했던 일의 경제학
류동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꽤 알려진 책이다.
진보 혹은 양심적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저자가 제대로 알려주는 진짜 경제이야기다. '경제'라고 하니 뭔가 거창해보이지만
실은 '밥벌이'(고상하게는 사회생활이라고 하지...)을 해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깨닫게 되는 잔혹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노동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자'가 되건만, 학교에서는 노동자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경제학 역시 경제 주체를 생산자와 소비자로만 구분하기 때문에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식하기보다는 '소비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낮은 소득을 벌충하기 위한 강도 높은 노동은 인간으로서 자존감까지 갉아먹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낮은 소득과 장시간 노동이 공존하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해서라도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소득-장시간 노동이 존재하는 다른 이유 한 가지를 더
들자면 소비자들이 자신의 편익을 극대화하고자 한다는 것, '톨레랑스(tolerance)'가 매우 작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직접 물건을 사서 들고
오기보다는 자기 집 현관까지, 그것도 빠른 시간 안에 배달되는 상태를 반길 것임에 틀림없다. 그 소비자가 택배노동자보다 더한 강도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라 하더라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소비자로서의 정체성과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은 이렇듯 쉴 새 없이 충돌한다. 물론 소비자들에게 '톨레랑스'를 가지라고 요구함으로써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형태의 '착한 소비'나 '윤리적 소비'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사태의
궁극적인 원인은 자본주의 경제 자체가 끊임없이 이윤을 늘리기 위한 구조로 탈바꿈해왔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p138~140
中-
이 부분을 읽으면서 격하게 공감했다.
확실히 정곡을 찔린 기분이다.
경제가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어째서 더 피폐해지기만 하는지...?
취업스펙은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정규직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은 왜 갈수록 심해지기만 하는지...?
노동계에서는 왜 대기업 정규직의 권익만 수호할 뿐,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외면하는지...?
가장 절실하게 연대와 도움이 필요한 자영업자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노동자'가 아닌 '소자본가'로 인식하면서 몰락해 가는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미 현실를 제대로 직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정신없이 혹은 열심히 일만 할 뿐, 현실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정작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들은 너무 바쁘게 일만 하느라 책 읽을 시간조차 없다. 책 읽을 시간은 커녕 이런 책이 출간되어 있기나 한건지 인터넷을 검색할 짧은 틈조차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숙지하고 있던 바다.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내가 새롭게 깨달은 건, 나를 포함하여 짬을 내서 이 책과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노동의 혜택을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즉, 우리가 이런 책들을 읽고 생각을 깊고 폭넓게 하면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이런
여유조차 갖지 못하고 일만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건비가 오르지 않는건,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도 굶어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도 굶어죽지 않을 수 있는 건, 쥐꼬리보다도 더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면서 '자기착취식'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기착취식 노동'이라는 표현이야말로 신자유주의 구조 속에서의 노동을 잘 설명해준다.
과거에는 생산의 3요소 중,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와 노동을 소유한 노동자간의 계약 '관계'가 성립되었다. 하여, 자본과 노동의 소유 구도가
명확했다. 반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본질은 노동자이면서도 형식적으로는 자본가인 '거래'가 성립된다.
00택배 유니폼을 입은 택배기사들은 00택배소속 직원이 아니다. 택배기사들이 사용하는 택배 차량은 00택배회사 소유가 아니라 개별
택배기사들의 소유다. 그러므로 택배 기사들은 자본(차량)을 소유한 자본가임 셈이다.
많은 학원강사들은 학원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개인사업자들로 퇴직금은 물론이고 4대보험 혜택도 받지 못한다. 이들은 노동자가 아닌, 엄연한
개인사업자 즉 '사장님'이거나 그 이름도 거창한 '프리랜서'이다.
회사의 영업사원도 출판사의 편집자도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는, 개인 사업자들이다.
일한만큼 능력만큼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미사여구로 이들의 노동은 착취된다. 여기에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잔혹한 진실이 담겨
있다. 그건 바로 과거에는 사장이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건, 그들이 리스크를 감수하기 때문이다. 즉, 장사가 잘 안 되도 직원 월급을
책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서처럼 '고용'이 아닌 '거래'로 노동 형태로 바뀌면서 사장이 당연히 짊어져야하는 책임 즉 리스크를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극적인 효과가 숨어 있다. 그러니 마치 노동에 따른 소득이 적은 건 개인의 무능력과 게으름의 소산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자기착취식 노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하기 전엔 몰랐던 이와 같은 것들을 알게 되자, 나는 조급함에 더 빨리 책장을 넘겨나갔다.
마치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을 읽듯이...
그러나 추리소설은 끝까지 읽으면 범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지만 이 책은 끝까지 읽어도 문제 해결책을 알려 주지 않는다. 물론, 저자가
해결책을 전혀 제시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일상에 균열을 내라!'는 저자의 주문은 무지개처럼 어렴풋하고 까마득하게 여겨질 뿐, 도저히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얼마전 TV를 통해 본, 어느 인문학자의 마무리 말이 함께 떠오르면서 허탈해졌다.
여러분!
돈을 위해 살고 싶지 않으시죠?! 인간답게 살고 싶으시죠? !
그렇다면 생산과 소비, 둘 중 어느 한 가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직장에 출근하지 않으면 즉 노동을
'보이콧'하면 자본주의는 더이상 굴러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모두 물건을 사지 않는다면 회사(공장)가 망하기 때문에 역시
자본주의가 더 이상 생명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강신주 TV 강연 中-
다소 황당했다.
이건 돈을 거부할 선택의 여지가 우리에겐 아예 없으며 마찬가지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 역시 없다는 말과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일하기 전에 몰랐던 것들'을 알려주었던 저자가 내놓은 해결책이라면 해결책이요 대안이라면 대안이 나에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당장 우리의 일터를 꿈의 직장으로 만들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 일의 어느 순간 어느 국면에서 우리의 꿈을 실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관계를 거래로 만들어가는 경향을 한 번에 되돌리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거래 상대와 동료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해한다면
짧은 순간이나마 어느 순간에는 거래에서 관계로 역전하는 것도 가능하다. 비록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고 금세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린다고하더라도
그러한 시도를 끊임없이 할 때 비로소 장기적으로도 새로운 삶의 방식이 등장할 전망을 열어젖힐 수 있는 것이다.
-류동민,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p274
中-
물론, 어려운 문제다. 그러므로 쉽게 찾을 해답이 있을 턱이 없다는 점 역시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건, 그만큼 저자의 대척점에 서 있는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나도 절박하고 안타깝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엉뚱한데로 흘러가긴 하지만...
대기업 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동남아 어느 도시에 머물면서 현지인을 가정부와 운전사로 고용하고 외동딸은 현지 국제학교에 입학시킨 친구가
오랫만에 한국에 나와 학교 동창들을 모아놓고는 한국의 사교육 한심하다는 둥... 해외에서 바라본 한국은 정말 창피하고 부끄럽다는 둥...
한국인은 가족이기주의가 너무 심하고 양보할 줄 모른다는 둥... 심지어 자신은 한국에 있을 때에도 영어 사교육 한번 시키지 않았다는 둥...
입을 놀려대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 아는 것도 많고 유식하고 성격도 활발하고 다 좋은데...
왠지 이 친구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진실이라도 진실처럼 안 들린다.
한국 사회 변하고 바뀌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할 때,
그럼, 연봉 1억이 넘는 신랑을 둔 넌, 이 사회를 위해서 무슨 양보를 했고 어떤 희생을 했는데? 하고 되묻고 싶었다.
근데, 정말 뜬금없이 이 좋은 책을 읽고 나서 왜 이런 못된 생각이 떠오른 걸까?
(누구는...
정년과 두둑한 퇴직금이 보장된 국립대 교수이며,
이런 말 저런 말 다 해도 누가 뭐라 하는 사람없고,
오히려 잘만하면 사회적 명성과 인세로 한몫 챙길 수 있겠지...???)
혹시,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