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
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 이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추구(straw dogs)와 같이 여긴다. -노자, [도덕경] 中-

 

 

이런 책이 있다. 

읽는 도중 딱히 답을 얻은 것도 아닌데 통쾌해지는... 그러나 종국엔 무릎이 꺾일 만큼 허무해지는...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라피엔스』가 바로 이런 책이다.

 

저자의 주장이 전혀 새로운 건 아니다. 기존 철학자들의 사상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후 생각을 정리한 일종의 '에세이'에 가깝지만, 그의 주장의 상당부분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윈의 말을 빌어 보자면, 생물종은 서로서로, 그리고 변화하는 환경과 무작위로 상호작용하는 유전자 조합에 불과하다. 생물종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생물종은 실존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종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인류의 진보'를 운운할 때마다 이 사실은 잊혀진다. 이 신념은 현실을 벗어난 관념이 되어 버려서,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이 기독교적 희망의 변종은 아닌지 의심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p16~17


 

동물들은 태어나 짝을 찾고 음식을 구하다 죽는다. 그게 다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다르(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는 인격체person며, 우리의 행동은 스스로 내린 선택 결과(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다른 동물은 자신의 삶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지만 우리는 의식적conscious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이러한 이미지는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의식consciousness과 자아selfhood와 자유의지freewill며, 이것들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모든 생명체보다 우월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라는 뿌리 깊은 믿음에서 나온다.-p59


 

'인류의 진보는 환상이며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건 고대 서양 철학과 기독교가 만들어낸 '정념'에 불과하다'

얼마전에 읽은, 진화론을 다룬 과학서적도 같은 주장을 담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동물과 큰 차이가 없으며, 우리는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한 다음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먼저 행동하고 그 행동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 낼 뿐이다.  

 

한편, 이 책의 원서 제목(Straw Dogs: '추구' 즉, 짚으로 만든 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인 존 그레이는 동양의 도교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닮은 철학이라고 보았다.


 

삶을 잘 살아가는 솜씨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도교는 좋은 삶에 대한 지침을 얻기 위해 다른 동물로 눈을 돌렸다. (...) 도덕에 속박된 사람들에게는, 좋은 삶이란 영속적인 분투를 의미한다. 그러나 도교에서의 좋은 삶은 애를 쓰지 않고 본성에 따라 사는 삶이다. 가장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이유들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것을 결코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여러가지 대안들을 놓고 재느라 고생하기보다는, 상황이 흘러가는대로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선택한 대로 살기보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가는 이치대로 산다. -p152

 

동양사상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몰입의 경지'에 이르렀을때 인간은 가장 큰 행복감을 느끼며 최고의 성과를 거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있다. 몰입이란 다름아닌 '물아일체(物我一體)'가 아니던가. 마치 동물(본능)처럼 기계처럼 존재하는 것 말이다.


나를 잊어버린다는 건,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모든 이성적 활동의 부정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동물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장하는 기존의 인간 중심적 사고 즉 휴머니즘이 얼마나 오만하고 단편적 사고인지를 깨닫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와 같은 사고를 심어준 게 다름 아닌 종교라는 점. 그리고 운명과 우연으로 불안에 떠는 인간을 지켜주겠다고 주장하는 종교와 정치가 어떻게 서로 빼닮았는지를 확인하는 순간, 깊은 회의감과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실제로는 기만과 환상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자유롭고 의식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자신이 그러하다고 믿는 바로 그 모습(자유로운 존재)에서 도망치려고 끊임없이 애를 쓴다.

인간의 종교는, (정작 인간이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자유를 없애고자 하는 시도다. 20세기에는 좌파와 우파의 정치적 유토피아가 이 기능을 수행했다. 그리고 정치가 오락으로조차도 관심을 못 끄는 오늘날에는 과학이 인류를 구원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p157~158 中 발췌-

   

자신은 현실 정치도 종교도 믿지 않으니 그럴 일은 없다고 단정 짓지 마시라. 

왜냐하면 종교와 정치로부터 톡톡히 쓴맛을 본 배신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일수록 테크롤로지를 신봉하기 쉬운데, 과학기술이야말로 현대인에게 '고통없는 삶' 더 나아가 '불로(不老)와 불멸(不滅)의 삶'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철학과 대부분의 종교와 상당수의 과학이, 인간의 구원에 대해 지치지도 않고 절박한 관심을 보여왔다.


과학은 인간이 가장 오래도록 가져왔던 환상이 드디어 실현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질병과 노화가 없어지고, 결핍과 가난도 사라지며, 인류는 불멸할 것이라고 말이다. 예전에 기독교가 그랬듯이, 오늘날의 과학이라는 신념도 기적을 바라는 희망을 먹고 살아간다. 하지만 과학이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마술을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휴머니즘의 '환상'에 대해, 시간은 나약하고 정신없고 구원받지 못한 인간이라는 '현실'을 들이대며 보복한다. 과학이 가난을 없애고 질병을 완화할 수 있다해도, 정작 쓰이는 곳은 독재를 정교하게 하고 전쟁의 기술을 완벽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p161

 

과학은 인간이 욕구와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도와준다. 그렇지만 인간의 욕구를 바꾸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욕구는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다. 지식에는 발전이 있지만 윤리에는 없다. 과학, 역사, 그리고 세계의 모든 종교가 이를 증명한다. (...)


역사란 진보나 쇠락의 과정이 아니라 얻다가 잃기를 반복하는 과정이다. 지식의 발전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의 역사를 보면 실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p196~199 中 발췌

 

책이 종반부로 향할수록 안타깝게도 '그래, 정말 인간이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일 뿐이구나...'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야 만다.


그리고...

어느덧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 한복판으로 '오기'같은 게 솟구친다.

그렇다면, 지금 이순간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 움직이는 나란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좋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렇게 살아도 되겠네...?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종교를 만들어내고 도덕을 만들어내고 철학을 만들어냈다고 치자.

저자의 주장대로 다 거짓이고 관념에 불과할 뿐이지만, 이런 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진지한 자세로 삶에 임하도록 만들어준다는 것까지 부인할 순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진지한 삶의 자세란 뭘까?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견뎌내는 삶일까?

(아니다...)

 

타인과 집단을 위해 기꺼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일까?

(아니다...)


'내일은 없다'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내키는대로 사는 걸까?

(아니다...)

 

 


고통스런 오늘을 보낸다고 더 나은 내일이 보장되는 건 절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삶...

개인의 존재에 깊은 의미나 특별한 목적이 있다고 확신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심신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는 삶...

인간의 삶은 이성적 판단과 선택보다는 우연과 운명에 더 많이 좌우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미신에 천착하지 않는 삶...

불투명한 미래와 허튼 희망에 모든 걸 내맡기지는 않되, 매순간 살아있음을 만끽하고 영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

 

 


진지한 삶의 자세란, 어쩌면 이런 게 아닐런지...


 


왠지 이 책은 카잔차스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철학에세이 버전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할 때가 찾아온 것 같다.

그리스인 '조르바'야말로 존 그레이가 주장하는, 하찮은 인간일 뿐인 '호모라피엔스'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삶을 산 인물이니까.

그는 나에게...

진정한 자유란, 불안과 불안전함을 받아들이고 생명과 인생(시간)에 대해 초연해지는 순간 찾아온다는 걸 깨닫게 해주리라.  


 

    

참고로,

이 책의 저자인 존 그레이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저자와는 동명이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른 세번의 요란한 자축 파티를 보낸 후,

서른 네번째 생일부턴 생일날을 더이상 '날 위한 날'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서른 네번째 생일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떠올랐던 생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 엄마는, 지금 나와 같은 나이에 바로 오늘 나를 낳음으로써 그렇게 엄마가 되었구나...'



 

만약 생일날.

'엄마는 왜 날 낳았을까?' 혹은 '나는 어째서 태어났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면...?

미안한 말이지만 아직 어린 것이다.

젊은 것도 아닌, 한참이나 덜 자란...



 

인간이 존재하는 데에는 그 어떤 설명도, 그 누구의 인정도 필요치 않다. 설령, 그 주체가 신일지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이 된다.

-루쉰, <고향> 中-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읽는다는 건, 길의 끝까지 걸어가 희망의 끝을 보겠다는 것과 같다.

 

길이 끝나는 그 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만약 미래나 선악 아니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 중 하나 이상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래도 괜찮은가?

 

희망 너머 그곳에 희망따윈 애초부터 없었다는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이 작품을 읽도록 하자.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 사라진 그 자리에 찬바람이 불어닥치고 눈보라가 휘몰아쳐 주저 앉고 말 것이므로...

 

 

남자와 소년은 비와 진눈깨비로 칙칙해진 벌판 위에 서 있다. 

과거 도시였던 흔적들은 머나먼 과거에서 날아온 별빛처럼 아련한 현기증만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남자가 알고 있는 거라곤, 남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소년을 지켜야 한다는 것. 설령, 자신이 죽을지언정...

  

남자는 회색 빛이 비치자마자 일어났다. 소년은 그냥 자게 놓아두고 길까지 걸어가 쭈그리고 앉아 남쪽 땅을 살폈다. 황폐하고, 고요하고, 신조차 없는 땅. 10월일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자신은 없었다. 날짜를 확인하지 않은 지 몇 년은 되었다. 그들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한 번 더 겨울을 난다는 것은 죽음을 뜻했다. -p8

 

 

자기실현적예언은 언제나 예외 없이 들어맞는 법인가 보다. 

작품 도입 부분에서 마주친 남자의 예언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만다.

 

나는, 걸어갈 힘보다 먼저 걸어갈 길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걸 떠올려 본 적이 없다. 존재하지 않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듯이 나에게 길이란 '영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코맥 매카시의 문장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는 회색 빛 속으로 걸어나가 우뚝 서서 순간적으로 세상의 절대적 진실을 보았다. 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 사정없는 어둠. 눈 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모든 것을 빨아들여 소멸시키는 시커먼 우주. 그리고 쫓겨다니며 몸을 숨긴 여우들처럼 어딘가에서 떨고 있는 두 짐승. 빌려온 시간과 빌려온 세계 그리고 그것을 애달파하는 빌려온 눈(目). -p149

 

하루하루가 헤아림도 없이 달력도 없이 진창을 기어가듯 지나갔다. 멀리 주간 고속도로를 따라 길게 줄지어 있는 검게 타버리거나 녹이 슨 차들. 바퀴의 드러난 테가 시커메진 철사의 고리에 둘러싸인 채, 녹았다가 다시 잿빛으로 굳은 고무 진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타서 재가 된 주검들은 아이만 한 크기로 줄어들어 좌석의 용수철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쭈그러든 심장 속에 매장된 수많은 꿈도. 그들은 계속 걸었다. 바퀴를 돌리는 쥐처럼 죽은 세계를 밟고 나아갔다. 죽음처럼 고요하고 더 깊은 죽음처럼 검은 밤. -p308~309

 

 

이 작품은 지구 종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떤 이유인진 모르겠으나 지구는 종말을 맞았고  운 좋게도-아니 재수 없게도- 살아 남아 조금 늦게 죽게될 극소수 생존자들의 이야기다. 이들 중에는 원래 가족이었던 이들도 있을 것이요, 남남 있었으나 어찌하다가 가족처럼 된 이들도 있을 것이며, 엄마와 딸처럼 아빠와 아들도 있었는데, 남자와 소년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남자는 꿈에서 전에 한 번도 본적 없는 생물의 방문을 받았다. 그 생물들은 말이 없었다. 남자는 자신이 자는 동안 그 생물들이 침대 옆을 기어다니다가 자신이 깨자 슬그머니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소년을 보았다. 어쩌면 남자는 그 자신이 소년에게는 외계인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이해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는 사라진 행성 출신의 존재. 그 행성에 관한 이야기는 수상쩍었다. 아이를 기쁘게 해주려고 자신이 잃어버린 세계를 구축할 때마다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소년이 자신보다 이 점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꿈을 기억하려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남은 것은 꿈의 느낌뿐이었다. 어쩌면 그 생물들이 그에게 경고를 하러 온 것인지도 몰랐다. 무엇을 경고하러? 그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미 재가 된 것을 아이의 마음속에서 불로 피워올릴 수는 없다는 것. 지금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들이 이 피난처를 찾아내지 못했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늘 어서 이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p174~175

 

 

걸어갈 힘보다 먼저 걸어갈 길이 사라져버린 순간, 남자와 소년에게 남아 있는 거라곤 본능 밖에 없었다. 이 본능마저 '살아남아야 한다'에서 '죽지 못해 죽을 때까지 산다'로 천천히 바뀌어 가지만...

 

밤은 눈이 멀 정도로 추웠고 관 속처럼 어두웠다. 아침이 오기까지 그 긴 시간에는 무시무시한 정적이 깔렸다. 마치 전투 전의 새벽처럼. 소년의 양초색 피부는 거의 투명했다. 커다란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낯선 사람 같았다. -p148

 

남자는 이제 마침내 죽음이 다가왔다고,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숨을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소년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곤 했다. 하지만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남자는 무엇 때문인지 잘 몰랐지만 아마 아름다운 선(善)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어떤 식으로든 도저히 생각할 방법이 없는 것들. 그들은 황량한 숲에 쭈그리고 앉아 천으로 걸러낸 도랑물을 마셨다. 남자는 꿈에서 소년이 관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공포에 사로잡혀 잠을 깼다. 깨어있는 세계에서는 견딜 수 있는 것도 밤에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남자는 다시 꿈이 찾아올까 두려워 잠을 자지 않고 앉아 있었다. -p149

 

몹시 추었다. 그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계속 기침을 했고 소년은 남자가 침을 뱉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비틀비틀 걸어갔다. 넝마를 걸친 채 더럽게, 희망도 없이. -p309

 

 

어떻게 이렇게 차갑고...

이렇게 건조하며...

끝없이 내려갈 수 있는지...

 

작가가 만들어낸 문장들은 극지방의 얼음보다 더 차갑고... 사막의 모래보다 더 건조하며... 깊은 땅 속보다 더 어둡다.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엄두조차 내지 못할 문장들이다.

 

 

코맥 매카시는 우리가 상상하는 최악보다 늘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라는 역자의 말이 옳았다.

그나마 마지막 결말이 작가가 우리에게 베풀어준 마지막 '희망'의 헌사라면 헌사일 터. 

 

나는 그처럼 독자로 하여금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작가를 지금껏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저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나에게 허락된 것이라곤, '독자가 언제나 옳지만 절대 작가를 이길 수는 없다'는 진리를 재확인하는 것 뿐이었다.

 

 

 

 

-책 속의 문장들....

 

 

화강암으로 빚은 짐승이 삼키는 바람에 내장 속에서 길을 잃은 동화 속 순례자들 같았다. -p7

 

남자가 아는 것이라고는 아이가 자신의 근거라는 것 뿐이었다. 남자가 말했다. 저 아이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신은 한번도 말을 한 적이 없는 거야. -p8

 

작은 약속을 어기면 큰 약속도 어기게 된다. -p42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신도 살 수 없다. -p196

 

있지도 않았던 세계나 오지도 않을 세계의 꿈을 꿔서 네가 다시 행복해진다면 그건 네가 포기했다는 뜻이야. -p215

 

다른 세상이었다면 아이는 이미 남자를 자신의 삶에서 비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다른 삶이 없었다. -p308

 

오래전부터 이렇게 될 거였어. 지금 이렇게 된 것 뿐이야. -p3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셜리 잭슨 지음, 성문영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단 작가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그녀는 20세기 중반 미국의 장르소설 그중에도 특히 고딕 소설 분야에서 탁월한 작품들을 선보여 후대 추리소설과 SF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동안 영미 문학계에서 저평가되어 온 작가라고 한다. 스티븐 킹이나 헨리 제임스(『 나사의 회전』 작가) 등 내노라하는 작가들이 깊은 영향을 받은 작가로 셜리 잭슨을 꼽고 있다. 그러고보니, 스티븐 킹의 초,중기 단편 작품들 중에는 어딘지 모르게 셜리 잭슨 풍이 묻어나는 것도 같다.

 

소위 '일상의 악'이라고나 할까?

이유도 원인도 없다. 그냥 '그것'이 무섭고 두렵다...

 

'그것'은 원초적인 두려움일수도 있고...

초자연적 현상일수도 있으며...

문명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관습'이나 '습관'일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감수성이 예민했던 셜리 잭슨은 우울증 등을 앓았을 정황이 커 보인다. 그녀는 지역사회나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배제와 거부의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끊임없이 시달렸던 '공포'를 작품화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소설쓰기란 공포의 실체에 접근함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약물중독으로 비극적인 삶을 마무리한 것도 그렇고... 최근 출간된 그녀의 단편집에, '이 작가는 미쳤거나 아니면 천재'라는 표현도 그렇고...

암튼, 여러모로 요주의(?) 작가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작중 화자는 메리 캐서린 블랙우드(줄여서 '메리캣')라는 열여덟살 소녀다. 그녀는 열살 터울의 언니 콘스턴스와 함께 산다. 자매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전부 죽고 없다.

 

마을에서 처음으로 피아노를 들여놨고, 드넓은 사유지에 철조망을 쳤던 자매의 아버지와 역시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던 어머니 그리고 막내 남동생은 6년전 일어났던 독극물 사건으로 3미터 땅 속에 잠들어 있다. 이 사건은 집안에서 일어났으며, 당시 메리캣은 식당이 아닌 자기방에 있었고 유일하게 콘스턴스만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녀는 용의자로 조사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설탕 가루가 뿌려진 블루베리를 싫어했기 때문이었음이 밝혀지면서 그녀는 누명을 벗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참, 그리고 자매의 삼촌인 줄리언도 비록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지만 그 참사에서 살아남아 저택으로 돌아온다. 또한 잠시 고아원에 맡겨졌던 메리캣 역시 돌아오면서 가족이 재구성된다.  

 

콘스턴스는 독극물 사건 이후, 바깥 출입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집과 정원 안에서만 생활한다. 금고에 얼마든지 들어있는 돈을 들고 일주일에 두번씩 마을로 나가 식재료를 사오는 일은 막내 메리캣의 몫이다. 그러나 메리캣 역시 외출을 달가워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마을 사람들의 냉대와 무시 그리고 조롱 때문이다.

 

나는 저들이 쓰는 말을 못 알아듣는 척했다. 달에서는 속삭이는 듯한 액체 언어를 쓰고, 메마른 죽음의 땅을 내려다보며 별빛 속에서 노래하니까, 울타리를 반쯤 지났다.

"메리캣, 메리캣!"

"코니 언니는 어딨어, 집에서 저녁 식사 만드는 코니는?"

"차 한잔 하실래요?"

나만의 생각에 잠긴 내겐 이상한 일이었다. 생각에 잠겨 착착 걸음을 옮기면서 엄숙하게 울타리를 통과한 다음 두 발을 땅에 강하게, 그러나 사람들이 눈치챌 정도로 빠르지는 않게 디디는 동안에도 저 아이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안다는 것은. 마음속 깊이깊이 숨어도 저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시야 한쪽 구석에는 저들의 정지 장면이 보였다. 나는 저들이 모두 죽어 땅에 누워 있었으면 싶었다.

"묘지 깊숙이, 삼 미터 아래에서."  -p40

 

마을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메리캣의 반응이다. 물론,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이유가 있을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메리캣이 스스로를 항변하지도 억울해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마을 사람들에게 저주를 보낸다. 메리캣과 콘스턴스가 느끼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은 일견 타당해보이면서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서 '피해망상'처럼 비춰진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경우 독자는 화자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그래서 손쉽게 화자의 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은 어느 순간부터 화자에게 투영됐던 감정이 자꾸만 거부반응을 일으키면서 튀어나오려고 한다.

 

주인공이 은화며 시계 등등을 정원 곳곳에 묻고 주문을 거는가 하면... 조너던이라는 고양이와 함께 자기만의 은신처를 만든다. 그리고 외부 세계에 대한 언니 콘스턴스의 호기심에 극단적으로 불안해하는 등등... 어딘지 모르게 비정상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독자를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건, 그런 메리캣을 언니인 콘스턴스가 다 받아주고 있다는 점이다. 열여덟살을 마치 열살배기 어린아이로 취급하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사촌인 찰스가 찾아온다.

언니 콘스턴스는 찰스를 환대하고, 죽은 자매의 아버지가 쓰던 방에서 생활하던 찰스는 서서히 군림하려 들면서 평화롭던 저택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메리캣 입장에서 찰스는 외부의 침입자로, 악마이자 유령이다.

사실 찰스는 유폐된 생활을 하다시피하는 사촌 여동생 콘스턴스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꼈다기보다는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그녀가 물려받은 재산을 차지할 속셈이 더 커보인다. 그리고 메리캣의 저항와 반발에 제대로 걸려들고 만다.

 

독극물 사건이 일어났던 저택에 다시 비극이 찾아왔으니, 그건 바로 대화재다. 

발화점은 찰스가 피우던 파이프 담배였다.  그리나 범인은 그가 아니다. 누가 범인인지는 사실 독자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 모두 잘 알고 있다. 놀라운 건, 독극물 사건의 범인과 같은 동일인물이라는 점이다. 범행동기 따윈 없다.

 

"저 사람들 음식에 못 먹을 걸 집어넣고 전부 죽어 가는 꼴을 보고 말 거야."

콘스턴스 언니가 몸을 뒤척이자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전에 네가 그랬던 것처럼?"

언니가 물었다.

우리 사이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 없는 말이었다. 육 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래."

잠깐 뜸을 들인 후 내가 대답했다.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p213~230 中 발췌 -

 

메리캣은 소시오패스일까?

그녀는 어째서? 왜?

 

이와 같은 질문들은 무의미하다. 이 작품의 관전 포인트는 이유 없는 악 즉, 인간 내면에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원초적인 공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보니, 얼마전 읽었던 에밀 아자르의 『자기앞의 생』에서 로자 아줌마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앞의 생』中 p69-

 

사람이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것에 반드시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다.  

오히려 이유를 안다면 두려움은 발생하지 않는다. 두려움이란 '미지(未知)' 즉,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이므로...

 

귀신과 악령을 무서워하는 것도 바로 그 실체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안다면 대처하고 방어하고 심지어 무찌를 수도 있다. 고딕 장르의 매력은 바로 이 알지 못하는 미지로부터 오는 공포에 있다.

 

원시 인류가 일상적으로 느꼈을 그런 공포감은 문명사회에서는 더 이상 공포를 불러올 이유가 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진화 중인 인류는 종종 원시 인류로부터 이어받은 뜻모를 공포감에 휩싸인다.  원시 인류는 공포감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제의를 치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제의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희생양을 바치는 것이었다. 

 

반면, 현대 인류는 공포 영화나 소설 혹은 익스트림 스포츠 등을 통해서 공포감을 인위적으로 찾아 느끼고 또 그것을 해소시킴으로서 정신적 긴장감을 누그러뜨린다.

그런데 종종 이성을 신봉하는 현대 인류 역시 원시성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여 원초적인 공포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박적인 행동이나 비이성적인 행동도 불사한다. 크게는 광기에 휩싸인 전쟁이나 범죄가 있으며, 작게는 각 집단에서 최약자에게 가해지는 유무형의 폭력이라 하겠다.

 

영문학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실린다는 셜리 잭슨의 단편『제비뽑기』가 바로 이와 같은 집단의 광기 어린 희생적 제의를 다루고 있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소수에 대한 집단의 폭력성에 소름이 돋는다.

 

그러므로 셜리 잭슨을 만난다는 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라 하겠다.

세상은 그리고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름답지도 선하지도 않다는 바로 그 진실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나는 왜 이제서야 이 책을 읽었을까...?

나는 왜 이제서야 이 작가를 만났을까...?

 

에밀 아자르의 『자기앞의 생』은 나에게 아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안겨줬다. 

 

사실, 내가 에밀 아자르의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건 대학 재학 때였으니 그닥 늦었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다만, 내가 제대로 못 알아봤을 뿐...

<제3세계문학> 이라는 교양수업이었고, 그 당시 막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담당 강사는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의 열정(?) 덕분에 나는 카뮈와 카프카 그리고 안톤 체홉 등을 읽을 수 있었다. 

 

졸음이 몰려 오던 어느 오후, 교수님은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라는, 제목부터 이상야릇한 작품에 대해서 혼자 감동하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아마 그 당시 난 이 작품을 찾아 읽었을 것이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는 걸로 보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만큼은 지금까지 가슴 깊이 박혀 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이상야릇한 제목의 작가는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는 바로 그의 필명이다.

로맹 가리는 30여년 동안 본명인 로맹 가리로 작품 활동을 하다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4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그 중  한편이 바로  <자기앞의 생>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동일 작가에게는 두번 수여하지 않는다는 공쿠르 상을 두번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이 뿐만 아니라 무려 스물다섯살 연하인 헐리우드 여배우 진 세버그와의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자, 66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삶 자체가 한편의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마치 자신의 삶 자체를 예술 작품화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는 동일인이었지만 각기 다른 작품 색채로 그 당시 프랑스 문단을 감쪽같이 속였다고 하는데, 사실 꼼꼼하게 살펴보면 오히려 상당히 비슷한 문장과 문체를 구사하여 당시 한 젊은 인터뷰 기자로부터 의심(?)을 받기도 했단다. 그런데 재밌는 건 당시 프랑스 문단에선 로맹 가리를 이미 노쇠한 논평할 가치조차 없는  작가로 치부한 반면, 에밀 아자르는 로맹 가리를 능가하는 작가로 높게 평가했다는 점이다.

 

만약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예명이 아닌 본명으로 이 작품을 발표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공쿠르상 수상은 커녕, 평단의 혹독한 평과 함께 사장되지 않았을까? 로맹 가리가 본명을 버리고 에밀 아자르라는 예명을 선택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소위 '평'이라는 것에 얼마나 많이 좌우되는가.

개인의 취향과 안목이라는 것도 어쩌면 평판(시장)에 의해 만들어진 감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자, 그럼 이제부터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나...

 

『자기앞의 생』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배경에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인물들'로 이루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한 소년의 성장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슴 아프고 슬프지만, 말도 안되게 웃기고 또한 빼어나다. 이 작품의 추천사를 쓴 작가 조경란은 '슬픈 결말로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모모(모하메드)는 아랍인으로 창녀에게서 태어났지만 유태인인 로자 아줌마의 손에서 키워진다. 로자 아줌마는 아우슈비치에서 살아 남았으며 50살이 될때까지 모모의 엄마처럼 거리의 여자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은퇴(?)한 후에는 모모처럼 창녀의 아이들을 몰래 맡아 키우는 것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는 65세 노인이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건물의 꼭대기층에 살면서도 자기 앞의 생을 직시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생이 제멋대로 흘러가도록 좌시하지 않았다. 

 

유태인으로서의 로자 아줌마에 대해 말하자면, 그녀는 성녀였다. 물론 아줌마는 우리에게 가장 싼 것만 먹이고, 라마단이라는 끔찍한 것으로 나를 지겹게 했지만 말이다. (...)

로자 아줌마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떨고 나서 나한테 괜히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녀를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 목숨은 그녀에게 남아 있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목숨을 소중히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 볼때 그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p59~63

 

어느 일요일. 로자 아줌마는 아침나절 내내 울고 있었다. 그녀는 때때로 아무 이유도 없이 하루종일 울기도 했다. 그럴 때는 실컷 울도록 내버려둬야 했다. 아줌마에게는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p59~60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p69

 

 

세상에는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바캉스 장소를 산과 바다 중에서 선택하듯이 사람들도 그렇게 선택당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관심을 끌지 못하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한다. 사람들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듯이,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낸 나치나 베트남 전쟁 같은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을 선택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층에 사는, 과거에 너무 고통스럽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유태인 노파 같은 건 누구의 관심사도 될 수 없다. 돈이 적게 드는 일일수록 그만큼 중요하지 않은 일이니까......-p246

 

 

로자 아줌마가 개였다면, 진작에 사람들이 안락사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사람에게보다 개에게 더 친절한 탓에 사람이 고통없이 죽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 한 가지 말해둘 게 있다. 이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는 가능한 안락사가 왜 노인에게는 금지되어 있는지 말이다.  -p126~295 中 발췌-

 

삶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통제한다는 건 무엇보다 중요하다.

즉, 어떤 방식과 형태로 자기 앞의 생을 마감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떻게 생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 못지 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움켜잡고 있던 생의 고삐를 마지막 순간 병원이나 의사 혹은 자기 아닌 타인에게 내맡겨 버리곤 한다. 자기 앞의 생을 타인 앞의 생으로 돌려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p13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난 쿠스쿠스를 무척 좋아한단다. 빅토르야. 하지만 매일 먹는 건 싫구나."

"하밀 할아버지, 제 말을 못 들으셨나봐요.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그의 얼굴이 속에서부터 환하게 밝아졌다.

"그래, 그래, 정말이란다. 나도 젊었을 때는 누군가를 사랑했었지. 그래, 네 말이 맞다. 우리......"

 

인간은 원래 가진 거라곤 사랑밖에 없어서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어버린다.

하밀 할아버지처럼 오래 살아서 기억력이 흐려진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아직도 그녀가 보고 싶다. 나딘 아줌마는 내게 세상을 거꾸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라몽 아저씨는 내 우산 아르뛰르를 찾으러 내가 있던 곳까지 다녀와기도 했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뛰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 -p307

 

이 작품을 단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랑'이라고 하겠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말 것...

인간의 생은 결국 끝이 나지만, 사랑없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로자 아줌마는 모모를 사랑했고,

하밀 할아버지도 모모를 사랑했으며,

모모 역시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또한 하밀 할아버지를 사랑했다.

그것도, 아주 깊이 깊이...

 

 

 

 

앞으로 생의 길목에서 상처 받을 때마다 나는 이곳으로 도망쳐 오리라...   

책 속의 문장들 속으로 숨어들어가 소리내어 읽다가는 어느덧 소리내어 울으리라...

그리곤, 다시 살아가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