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셜리 잭슨 지음, 성문영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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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작가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그녀는 20세기 중반 미국의 장르소설 그중에도 특히 고딕 소설 분야에서 탁월한 작품들을 선보여 후대 추리소설과 SF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동안 영미 문학계에서 저평가되어 온 작가라고 한다. 스티븐 킹이나 헨리 제임스(『 나사의 회전』 작가) 등 내노라하는 작가들이 깊은 영향을 받은 작가로 셜리 잭슨을 꼽고 있다. 그러고보니, 스티븐 킹의 초,중기 단편 작품들 중에는 어딘지 모르게 셜리 잭슨 풍이 묻어나는 것도 같다.

 

소위 '일상의 악'이라고나 할까?

이유도 원인도 없다. 그냥 '그것'이 무섭고 두렵다...

 

'그것'은 원초적인 두려움일수도 있고...

초자연적 현상일수도 있으며...

문명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관습'이나 '습관'일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유달리 감수성이 예민했던 셜리 잭슨은 우울증 등을 앓았을 정황이 커 보인다. 그녀는 지역사회나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배제와 거부의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끊임없이 시달렸던 '공포'를 작품화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소설쓰기란 공포의 실체에 접근함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약물중독으로 비극적인 삶을 마무리한 것도 그렇고... 최근 출간된 그녀의 단편집에, '이 작가는 미쳤거나 아니면 천재'라는 표현도 그렇고...

암튼, 여러모로 요주의(?) 작가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작중 화자는 메리 캐서린 블랙우드(줄여서 '메리캣')라는 열여덟살 소녀다. 그녀는 열살 터울의 언니 콘스턴스와 함께 산다. 자매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전부 죽고 없다.

 

마을에서 처음으로 피아노를 들여놨고, 드넓은 사유지에 철조망을 쳤던 자매의 아버지와 역시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던 어머니 그리고 막내 남동생은 6년전 일어났던 독극물 사건으로 3미터 땅 속에 잠들어 있다. 이 사건은 집안에서 일어났으며, 당시 메리캣은 식당이 아닌 자기방에 있었고 유일하게 콘스턴스만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녀는 용의자로 조사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설탕 가루가 뿌려진 블루베리를 싫어했기 때문이었음이 밝혀지면서 그녀는 누명을 벗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참, 그리고 자매의 삼촌인 줄리언도 비록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지만 그 참사에서 살아남아 저택으로 돌아온다. 또한 잠시 고아원에 맡겨졌던 메리캣 역시 돌아오면서 가족이 재구성된다.  

 

콘스턴스는 독극물 사건 이후, 바깥 출입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집과 정원 안에서만 생활한다. 금고에 얼마든지 들어있는 돈을 들고 일주일에 두번씩 마을로 나가 식재료를 사오는 일은 막내 메리캣의 몫이다. 그러나 메리캣 역시 외출을 달가워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마을 사람들의 냉대와 무시 그리고 조롱 때문이다.

 

나는 저들이 쓰는 말을 못 알아듣는 척했다. 달에서는 속삭이는 듯한 액체 언어를 쓰고, 메마른 죽음의 땅을 내려다보며 별빛 속에서 노래하니까, 울타리를 반쯤 지났다.

"메리캣, 메리캣!"

"코니 언니는 어딨어, 집에서 저녁 식사 만드는 코니는?"

"차 한잔 하실래요?"

나만의 생각에 잠긴 내겐 이상한 일이었다. 생각에 잠겨 착착 걸음을 옮기면서 엄숙하게 울타리를 통과한 다음 두 발을 땅에 강하게, 그러나 사람들이 눈치챌 정도로 빠르지는 않게 디디는 동안에도 저 아이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안다는 것은. 마음속 깊이깊이 숨어도 저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시야 한쪽 구석에는 저들의 정지 장면이 보였다. 나는 저들이 모두 죽어 땅에 누워 있었으면 싶었다.

"묘지 깊숙이, 삼 미터 아래에서."  -p40

 

마을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메리캣의 반응이다. 물론,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이유가 있을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메리캣이 스스로를 항변하지도 억울해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마을 사람들에게 저주를 보낸다. 메리캣과 콘스턴스가 느끼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은 일견 타당해보이면서도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서 '피해망상'처럼 비춰진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경우 독자는 화자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그래서 손쉽게 화자의 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은 어느 순간부터 화자에게 투영됐던 감정이 자꾸만 거부반응을 일으키면서 튀어나오려고 한다.

 

주인공이 은화며 시계 등등을 정원 곳곳에 묻고 주문을 거는가 하면... 조너던이라는 고양이와 함께 자기만의 은신처를 만든다. 그리고 외부 세계에 대한 언니 콘스턴스의 호기심에 극단적으로 불안해하는 등등... 어딘지 모르게 비정상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독자를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건, 그런 메리캣을 언니인 콘스턴스가 다 받아주고 있다는 점이다. 열여덟살을 마치 열살배기 어린아이로 취급하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사촌인 찰스가 찾아온다.

언니 콘스턴스는 찰스를 환대하고, 죽은 자매의 아버지가 쓰던 방에서 생활하던 찰스는 서서히 군림하려 들면서 평화롭던 저택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메리캣 입장에서 찰스는 외부의 침입자로, 악마이자 유령이다.

사실 찰스는 유폐된 생활을 하다시피하는 사촌 여동생 콘스턴스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꼈다기보다는 그녀와 결혼함으로써 그녀가 물려받은 재산을 차지할 속셈이 더 커보인다. 그리고 메리캣의 저항와 반발에 제대로 걸려들고 만다.

 

독극물 사건이 일어났던 저택에 다시 비극이 찾아왔으니, 그건 바로 대화재다. 

발화점은 찰스가 피우던 파이프 담배였다.  그리나 범인은 그가 아니다. 누가 범인인지는 사실 독자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 모두 잘 알고 있다. 놀라운 건, 독극물 사건의 범인과 같은 동일인물이라는 점이다. 범행동기 따윈 없다.

 

"저 사람들 음식에 못 먹을 걸 집어넣고 전부 죽어 가는 꼴을 보고 말 거야."

콘스턴스 언니가 몸을 뒤척이자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전에 네가 그랬던 것처럼?"

언니가 물었다.

우리 사이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 없는 말이었다. 육 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래."

잠깐 뜸을 들인 후 내가 대답했다.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p213~230 中 발췌 -

 

메리캣은 소시오패스일까?

그녀는 어째서? 왜?

 

이와 같은 질문들은 무의미하다. 이 작품의 관전 포인트는 이유 없는 악 즉, 인간 내면에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원초적인 공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보니, 얼마전 읽었던 에밀 아자르의 『자기앞의 생』에서 로자 아줌마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앞의 생』中 p69-

 

사람이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것에 반드시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다.  

오히려 이유를 안다면 두려움은 발생하지 않는다. 두려움이란 '미지(未知)' 즉,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이므로...

 

귀신과 악령을 무서워하는 것도 바로 그 실체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안다면 대처하고 방어하고 심지어 무찌를 수도 있다. 고딕 장르의 매력은 바로 이 알지 못하는 미지로부터 오는 공포에 있다.

 

원시 인류가 일상적으로 느꼈을 그런 공포감은 문명사회에서는 더 이상 공포를 불러올 이유가 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진화 중인 인류는 종종 원시 인류로부터 이어받은 뜻모를 공포감에 휩싸인다.  원시 인류는 공포감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제의를 치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제의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희생양을 바치는 것이었다. 

 

반면, 현대 인류는 공포 영화나 소설 혹은 익스트림 스포츠 등을 통해서 공포감을 인위적으로 찾아 느끼고 또 그것을 해소시킴으로서 정신적 긴장감을 누그러뜨린다.

그런데 종종 이성을 신봉하는 현대 인류 역시 원시성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여 원초적인 공포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박적인 행동이나 비이성적인 행동도 불사한다. 크게는 광기에 휩싸인 전쟁이나 범죄가 있으며, 작게는 각 집단에서 최약자에게 가해지는 유무형의 폭력이라 하겠다.

 

영문학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실린다는 셜리 잭슨의 단편『제비뽑기』가 바로 이와 같은 집단의 광기 어린 희생적 제의를 다루고 있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소수에 대한 집단의 폭력성에 소름이 돋는다.

 

그러므로 셜리 잭슨을 만난다는 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라 하겠다.

세상은 그리고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름답지도 선하지도 않다는 바로 그 진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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