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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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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이 된다.

-루쉰, <고향> 中-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읽는다는 건, 길의 끝까지 걸어가 희망의 끝을 보겠다는 것과 같다.

 

길이 끝나는 그 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만약 미래나 선악 아니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 중 하나 이상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래도 괜찮은가?

 

희망 너머 그곳에 희망따윈 애초부터 없었다는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이 작품을 읽도록 하자.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 사라진 그 자리에 찬바람이 불어닥치고 눈보라가 휘몰아쳐 주저 앉고 말 것이므로...

 

 

남자와 소년은 비와 진눈깨비로 칙칙해진 벌판 위에 서 있다. 

과거 도시였던 흔적들은 머나먼 과거에서 날아온 별빛처럼 아련한 현기증만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남자가 알고 있는 거라곤, 남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소년을 지켜야 한다는 것. 설령, 자신이 죽을지언정...

  

남자는 회색 빛이 비치자마자 일어났다. 소년은 그냥 자게 놓아두고 길까지 걸어가 쭈그리고 앉아 남쪽 땅을 살폈다. 황폐하고, 고요하고, 신조차 없는 땅. 10월일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자신은 없었다. 날짜를 확인하지 않은 지 몇 년은 되었다. 그들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한 번 더 겨울을 난다는 것은 죽음을 뜻했다. -p8

 

 

자기실현적예언은 언제나 예외 없이 들어맞는 법인가 보다. 

작품 도입 부분에서 마주친 남자의 예언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만다.

 

나는, 걸어갈 힘보다 먼저 걸어갈 길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걸 떠올려 본 적이 없다. 존재하지 않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듯이 나에게 길이란 '영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코맥 매카시의 문장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는 회색 빛 속으로 걸어나가 우뚝 서서 순간적으로 세상의 절대적 진실을 보았다. 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 사정없는 어둠. 눈 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모든 것을 빨아들여 소멸시키는 시커먼 우주. 그리고 쫓겨다니며 몸을 숨긴 여우들처럼 어딘가에서 떨고 있는 두 짐승. 빌려온 시간과 빌려온 세계 그리고 그것을 애달파하는 빌려온 눈(目). -p149

 

하루하루가 헤아림도 없이 달력도 없이 진창을 기어가듯 지나갔다. 멀리 주간 고속도로를 따라 길게 줄지어 있는 검게 타버리거나 녹이 슨 차들. 바퀴의 드러난 테가 시커메진 철사의 고리에 둘러싸인 채, 녹았다가 다시 잿빛으로 굳은 고무 진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타서 재가 된 주검들은 아이만 한 크기로 줄어들어 좌석의 용수철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쭈그러든 심장 속에 매장된 수많은 꿈도. 그들은 계속 걸었다. 바퀴를 돌리는 쥐처럼 죽은 세계를 밟고 나아갔다. 죽음처럼 고요하고 더 깊은 죽음처럼 검은 밤. -p308~309

 

 

이 작품은 지구 종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떤 이유인진 모르겠으나 지구는 종말을 맞았고  운 좋게도-아니 재수 없게도- 살아 남아 조금 늦게 죽게될 극소수 생존자들의 이야기다. 이들 중에는 원래 가족이었던 이들도 있을 것이요, 남남 있었으나 어찌하다가 가족처럼 된 이들도 있을 것이며, 엄마와 딸처럼 아빠와 아들도 있었는데, 남자와 소년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남자는 꿈에서 전에 한 번도 본적 없는 생물의 방문을 받았다. 그 생물들은 말이 없었다. 남자는 자신이 자는 동안 그 생물들이 침대 옆을 기어다니다가 자신이 깨자 슬그머니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소년을 보았다. 어쩌면 남자는 그 자신이 소년에게는 외계인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이해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는 사라진 행성 출신의 존재. 그 행성에 관한 이야기는 수상쩍었다. 아이를 기쁘게 해주려고 자신이 잃어버린 세계를 구축할 때마다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소년이 자신보다 이 점을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꿈을 기억하려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남은 것은 꿈의 느낌뿐이었다. 어쩌면 그 생물들이 그에게 경고를 하러 온 것인지도 몰랐다. 무엇을 경고하러? 그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미 재가 된 것을 아이의 마음속에서 불로 피워올릴 수는 없다는 것. 지금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들이 이 피난처를 찾아내지 못했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늘 어서 이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p174~175

 

 

걸어갈 힘보다 먼저 걸어갈 길이 사라져버린 순간, 남자와 소년에게 남아 있는 거라곤 본능 밖에 없었다. 이 본능마저 '살아남아야 한다'에서 '죽지 못해 죽을 때까지 산다'로 천천히 바뀌어 가지만...

 

밤은 눈이 멀 정도로 추웠고 관 속처럼 어두웠다. 아침이 오기까지 그 긴 시간에는 무시무시한 정적이 깔렸다. 마치 전투 전의 새벽처럼. 소년의 양초색 피부는 거의 투명했다. 커다란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낯선 사람 같았다. -p148

 

남자는 이제 마침내 죽음이 다가왔다고,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숨을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소년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곤 했다. 하지만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남자는 무엇 때문인지 잘 몰랐지만 아마 아름다운 선(善)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어떤 식으로든 도저히 생각할 방법이 없는 것들. 그들은 황량한 숲에 쭈그리고 앉아 천으로 걸러낸 도랑물을 마셨다. 남자는 꿈에서 소년이 관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공포에 사로잡혀 잠을 깼다. 깨어있는 세계에서는 견딜 수 있는 것도 밤에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남자는 다시 꿈이 찾아올까 두려워 잠을 자지 않고 앉아 있었다. -p149

 

몹시 추었다. 그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계속 기침을 했고 소년은 남자가 침을 뱉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비틀비틀 걸어갔다. 넝마를 걸친 채 더럽게, 희망도 없이. -p309

 

 

어떻게 이렇게 차갑고...

이렇게 건조하며...

끝없이 내려갈 수 있는지...

 

작가가 만들어낸 문장들은 극지방의 얼음보다 더 차갑고... 사막의 모래보다 더 건조하며... 깊은 땅 속보다 더 어둡다.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엄두조차 내지 못할 문장들이다.

 

 

코맥 매카시는 우리가 상상하는 최악보다 늘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라는 역자의 말이 옳았다.

그나마 마지막 결말이 작가가 우리에게 베풀어준 마지막 '희망'의 헌사라면 헌사일 터. 

 

나는 그처럼 독자로 하여금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게 만드는 작가를 지금껏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저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나에게 허락된 것이라곤, '독자가 언제나 옳지만 절대 작가를 이길 수는 없다'는 진리를 재확인하는 것 뿐이었다.

 

 

 

 

-책 속의 문장들....

 

 

화강암으로 빚은 짐승이 삼키는 바람에 내장 속에서 길을 잃은 동화 속 순례자들 같았다. -p7

 

남자가 아는 것이라고는 아이가 자신의 근거라는 것 뿐이었다. 남자가 말했다. 저 아이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신은 한번도 말을 한 적이 없는 거야. -p8

 

작은 약속을 어기면 큰 약속도 어기게 된다. -p42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서는 신도 살 수 없다. -p196

 

있지도 않았던 세계나 오지도 않을 세계의 꿈을 꿔서 네가 다시 행복해진다면 그건 네가 포기했다는 뜻이야. -p215

 

다른 세상이었다면 아이는 이미 남자를 자신의 삶에서 비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다른 삶이 없었다. -p308

 

오래전부터 이렇게 될 거였어. 지금 이렇게 된 것 뿐이야.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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