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와디의 아이들 - 성장과 발전의 인간적 대가에 대하여
캐서린 부 지음, 강수정 옮김 / 반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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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이틀에 걸쳐 읽고 다시 닷새가 흘렀건만...

읽혀지기를 기다리는 책들은 한가득 쌓여있건만...

새로운 책을 읽을 엄두가 도무지 나질 않는다.


'예상외로 좋았던 책'이라는 리뷰 문장 덕분(?)에 어느 정도 '예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상'마저 훨씬 뛰어넘을 만큼 좋았던 책이다. 


끝까지 소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이야기는 극적이고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감정이 절제된 문장들은 투명한 바람처럼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캐서린 부는 인도 뭄바이의 안나와디라는 빈민촌에서 2007년11월부터 2011년 3월까지 머물면서 그들의 삶을 지켜보고 기록한다. 그녀는 관찰대상에 대한 자기 연민과 기만에 빠지지 않기위해 노력하면서 최대한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했고, 완벽하게 성공했다.



 

#-1


북부 농촌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무슬림이자 여성인 아샤는 약자가 좀더 약한 약자를 착취하는게 세상의 질서임을 일찌감치 파악한 후, 부패한 민주주의에서 살아남는 길을 택한다.



아샤는 자녀들에게 말했다. "높은 사람들은 우리가 가난하니까 세상을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아샤는 많은 걸 이해했다. 그녀는 전국적으로 진행되는 허상의 게임, 가난과 질병, 문맹과 아동 노동 같은 인도의 해묵은 문제들을 공격적으로 처리하는 그 게임의 참가자였다. (...)

서구와 인도의 일부 엘리트들은 부패라는 말을 순수하게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했다. 그건 현대화와 세계화를 향한 인도의 야심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부패로 아주 많은 기회가 약탈되는 나라에서 부패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몇 안 되는 순수한 기회였다. -67쪽


#-2


열한 살이 넘은 남자 아이들은 다루기 어렵다는 이유로 고아원에서 쫓겨났지만, 수닐은 자신을 쫓아낸 수녀를 원망하기보다는 영어로 100까지 셀 수 있는 것과 세계 지도에서 인도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다른 소년들은 이 옥상에 올라와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작으냐며 신기해했다. 그런데 수닐은 위에서 보면 왠지 사람들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여기서는 사람들을 마음껏 쳐다볼 수 있는데, 지상에서는 그게 가능하지 않았다. 지상에서 그렇게 빤히 쳐다봤다간 시선을 들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296쪽


#-3


미나는 툭하면 남자 가족들에게 맞았고 지참금을 최대한 많이 받기위해 수시로 선을 봤지만 그 무엇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그녀의 비극은 여성이라는 선천적인 조건과 가난이라는 후천적인 조건이 만나면 사람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절망할 수 있는지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여자들이 관습을 거부하며 열정적으로 산다는 그 새로운 인도에 갈 수 있는 건지, 미나는 알 길이 없었다. 대학을 나온 만주라면 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만주 말고는 대학 나온 여자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확실히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고 미린다 광고를 보면서 미나는 이따금 자신이 껍데기뿐인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276쪽


#-4


스물살 청년인 압둘은 넝마주이들로부터 폐품를 사들여 중간상에게 넘기는 일을 한다. 그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다시피하지만 이웃 여자의 어처구니 없는 분노로 자신의 노동과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물과 얼음은 성분이 같았다. 압둘은 사람도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압둘 자신도 경찰과 특수 행정관, 칼루의 사인을 조작한 시체 안치소의 의사처럼 냉소적이거나 부패한 사람들과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재활용품을 분류하듯 실질적인 성분으로만 인류을 분류한다면 거대한 하나의 더미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얼음은 원래의 성분인 물과 다르며, 압둘이 보기엔 물보다 나았다.


압둘도 자신이 이루어진 성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뭄바이의 더러운 물 속에서 얼음이 되고 싶었다. 이상을 갖고 싶었다. 이기적인 이유에서 발로한 것이겠지만 그가 바라는 가장 큰 이상은 정의 실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었다. -323쪽


신이 주사위를 던질 때, 그저 운이 조금 나빴을 뿐 특별히 악하지도 특별히 선하지도 않은 사람들...


그들 역시 우리처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에 눈물 흘리는 건 타인의 삶을 한낱 구경거리로 삼는 일밖에는 되지 않으리라.  아픈 환자에게는 함께 울어줄 정 많은 이웃보다는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의사가 더 많은 도움이 되는 법이다. 


 

캐서린 부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는 빈곤을 특수한 지역과 계층에 국한된 일시적인 현상이나 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녀는 빈곤을 바라보는 시야를 이 세계를 이루고 움직이는 요인과 인간 본성의 내면으로까지 깊숙히 확대시킨다.

 


 

미국과 영국의 굵직한 은행들이 파산하면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금이 아시아를 주목하고 있었다. 싱가포르와 상하이가 번영하는 동안 뭄바이가 누린 이윤은 그에 못 미쳤다. 이곳에도 젊고 저렴하면서 숙련된 노동자들이 넘쳐났지만 인도의 금융 수도인 이 도시는 슬러바이라고 불릴 만큼 빈민촌이 많다는 사실에서 기회비용이 발생했다.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뭄바이 광역 생활권 주민 가운데 절반 이상이 임시 주택에 살았다. 뭄바이 공항을 이용하는 글로벌 기업의 임원 중에는 빈민촌을 혐오스럽게 보는 사람도 있고 동정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풍경을 제 기능을 수행하며 적절히 관리되는 도시의 증거로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86쪽

 

무력한 개인들은 자신들의 결핍을 똑같이 무력한 다른 개인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다가 가끔은 서로를 무너뜨리려고 안간힘을 썼고, 가끔은 그 과정에서 파티마처럼 스스로 무너졌다. 아샤처럼 운이 좋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일생일대의 기회를 가로채서 팔자를 고쳤다.

뭄바이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다른 곳에도 만연했다. 전 세계로 무대를 확대한 시장 자본주의 시대에도 희망과 불만은 협소한 지역안에서 옹색하게 이해됐고, 공통된 고통에 대해서는 둔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연대하지 않았다. 일시적이고 알량한 이익 앞에서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리고 하류 도시의 이런 투쟁은 전반적인 사회구조에 희미한 파장을 일으키다 잦아들었다. 투쟁은 부자 동네로 진입하는 입구에서 어쩌다 소동을 일으킬 뿐, 그곳에 균열을 야기하지는 않았다. 정치인들은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무시했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불평등한 도시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를 그럭저럭 이어갔다. -348~349쪽



 

이 책은,

인도 사회의 부패와 이기적인 개개인을 탓하기에 앞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놀랍게도,

슬픈 이야기지만 이상하게 희망적이다. 


압둘처럼 나를 이루는 성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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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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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지난 계절, 죽을 듯이 울어대던 그 많던 매미들은 결국 죽고 말았다.

일년도 아니고 여름 단 한철을 위해서 짧게는 2년 길게는 17년씩 땅속에 묻혀 지낸다는 매미...

그래서 어떤 시인은 '미움, 미움' 하고 운다고 했던가.

지도 더 살고자픈데 더 살 수 없는, 지 팔자가 너무 서럽고 미워서 '미움, 미움'하고 운단다...


어쩌다 보니 소설책만 읽고 기록한 내가 미워져서 간만에 철학책을 펼쳐들었다.

그리고 다 읽은 후, 매미처럼 '미움, 미움'하고 울고 싶어졌다.

이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잘 알지 못하는 척하는, 내가 너무 미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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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신해철이 십대 시절에 읽고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는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反기독교 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내가 보기엔 종교 비판서 더 나아가 서양 문명史에 가까운 것 같다. 



 

정말로 사람들을 움직여 하나님을 믿도록 만드는 것은 지적 이론 따위가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그래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며 바로 그것이 주된 이유다.

그럼 그 다음으로 강력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안전에 대한 갈망, 즉 나를 돌봐줄 큰 형님이 계시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싶어지게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인이다. -1장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중-


두려움은 종교적 독단의 기반이다. 그밖에 많은 인간생활의 기초인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사람들의 두려움은 우리의 사회생활의 많은 부분을 지배한다.  -3장 '나는 이렇게 믿는다' 중-



 

모든 종교는 자연에 대한 무지와 존재에 대한 불안을 숙명처럼 떠안은 인간의 본질적 성향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러셀의 주장은 100여 년 가까이 흐른 오늘날에도 과격하게 들린다. 하지만 눈부신 과학적 성과들과 지적인 성장을 거듭한 현대인이라면 이 말을 정면으로 부인하진 못하리라.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와 종교의 역할에 회의적이면서도 지극히 신학적(?)인 인간으로 기꺼이 살아가는 까닭은 습관화되었거나 용기가 없어서다.   


한편, 러셀은 종교와 일정한 거리를 둔 사람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는다. 그 함정이란, 다름 아닌 '불변의 진리에 대한 맹신'이다. 


 

어떤 사람의 말 속에 절대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의 말을 해석하는 전문가 집단이  생겨나고 이 전문가들은 어김없이 권력을 차지한다. 진리의 열쇠를 그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특권층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가지 점에 있어 다른 특권층보다 더 질이 나쁘다. 과거에 단 한 번 완벽하게 만인 앞에 계시됐던 불변의 진리를 해석하는 것이 그들의 업이기 때문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지적, 도덕적 진보의 반대자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교회는 갈릴레오와 다윈을 반대하였고 바로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프로이트에 반대하고 있다. 한때 그 권력이 정점에 달했던 시절에는 한술 더 떠서 지적인 생활까지도 반대했다. -2장 '종교는 문명에 공헌하였는가?' 중-


'영원한 진리' '영원한 법칙' '영원한 사랑' 등등...

이처럼 변치 않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가 인간을 얼마나 독단적으로 만드는지 역사는 잘 말해준다. 


 

나는 내가 죽으면 썩어 없어질 뿐 나의 에고 따위가 남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내 나이 젊지는 않지만 삶을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허무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공포로 몸을 떠는 모습에 대해선 경멸한다.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는 건 그것에 끝이 있기 때문이며, 사고나 사랑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제 가치를 잃는 것도 아니다. -3장 '나는 이렇게 믿는다' 중-

 


그렇다고해서 러셀을 숙명론자로 볼 순 없을 것 같다.

내 눈에 비친 그는 지극히 자유롭고 쾌락적인 삶을 영위한 인물이다.

그에게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

지식과 사랑은 둘 다 무한히 확대되는 성질을 지녔다. 그러므로 어떤 삶이 얼마나 훌륭하든 간에, 그보다 좀더 나은 삶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지식없는 사랑도 사랑 없는 지식도 훌륭한 삶을 낳을 수 없다. -3장 '나는 이렇게 믿는다' 중-

 


사랑은 있되 지식이 없으면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지식은 있되 사랑이 없으면 지식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는 러셀의 지적은 소위 '지성인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훌륭한 답변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구분하자면, 나는 종교를 갖고 있진 않지만 '신의 존재'만큼은 남몰래 갈구해왔던 사람 중 한명에 속하지 않았을까 싶다.

부디 '신'으로 불리우는 절대자가 있어서 이 세상을 구원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내 마음이 미약한 존재의 울부짖음에 다름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미움, 미움'하고 아무리 시끄럽게 울어대도 결국 죽고마는, 매미의 숙명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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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책이란 나를 더욱 굳건하게 지켜주는 방패가 아니라 나를 철저하게 부수는 도끼와 같은 책이다. 

일찍이 '마왕' 신해철을 부수웠고 오늘 나를 깨트렸던 이 한 권의 책이 또다시 그 누군가를 깨우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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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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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나는 천천히 거실로 걸어나와 물 한잔을 마셨다.

'켁-켁--'

발작적으로 기침이 쏟아졌다.

잠시후, 고통이 잠잠해지자 눈꼬리에 물방울이 맺혔다.  


그짧은 순간, 나는 감히 열일곱 어린 나이에 바다로 몸을 던진 아이의 고통을 떠올렸던가.    


'아니, 아닐 것이다. 차마 그럴 순 없다.'


산자는 죽은자의 고통을 영원히 알 수 없다.

살아남은 자에게 허락된 거라곤 그저 영원히 죽은자를 기리는 일 뿐이다. 


뜨고지는 별처럼,

피고지는 꽃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처럼,

그렇게, 영원히...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2005년을 기점으로 너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졌지. 그럼에도 네가 영원히 내 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내 안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네가 나왔다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경험인지 네게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있는 입술이 내게는 없네. -228쪽 


'내 엄마는 누구일까?' 


미국으로 입양된 카멜라는 엄마의 흔적을 찾고자 한국으로 건너온다. 

선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점점히 흩어진 과거들을 찾아나서는 일은 마치 탐정의 그것과 흡사했다.  



 

한국의 남쪽 해안 지방에서만 자생한다는 동백꽃과 같은 이름을 가진 카멜라...

그녀는 사과같기도 하고 홍등같기도 한, 그 붉은 꽃들이 교정 가득 떨어져 있는 어느 여학교에서 엄마가 남긴 단 한장의 사진 속 배경을 마주한다.



 

나는 교장실에서 나와 복도 끝의 계단을 향해 걸었다. 두 눈에서 연민의 눈물이 쏟아졌다. 잘못 기재된 서류만 믿고, 잘못된 곳에 가서 엄마를 찾으려고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오빠라는 남자의 주장 역시 잘못 배달된 편지 속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나는 거기, 진남, 오랫동안 내가 태어난 고향이라고 믿었던 항구 도시에서는 절대로 태어날 수가 없는, 불미스러운 존재라 어딘가 다른 곳, 그러니까 서울이나 부산처럼 악과 불의가 판치는 대도시, 아니면 한국의 다른 어느 곳, 거기가 어디든, 아무튼 어딘가 다른 곳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어쩌면 나란 인간의 존재 자체가 애당초 잘못된 것이라고. 그러니까 계단을 다 내려가 본관 건물 앞까지 가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 뒤, 그 붉은 벽돌을 향해 돌아서다가, 바닥에 떨어진 그 꽃봉오리들을 보기 전까지는, 그제야 나는 졸업 앨범의 표지에 그려진 꽃이 사진속 발치에 떨어진 꽃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무덤덤한 깨달음 앞에 어떤 나무가 붉은 것들을 잔뜩 매달고 서 있었다. 사과라고 해도, 어쩌면 홍등이라고도 부를 만한, 붉은 것들. 꽃들. 동백들. -53~54쪽

 

카멜라의 친엄마(지은)는 미혼모였고 어린 딸을 가슴에 꼭 안고 동백나무 아래서 찍은 사진 한장을 남긴 채,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카멜라)를 가졌고 낳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고, 각자 자신의 입장에 따라 지은이의 진심을 이해(오해)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각자 한마디씩 했고...

그 말의 조각들은 소문이 되었으며..

소문은 바람을 타고 한없이 떠돌았다...


 

무심히 내뱉은 한마디가 혹은 악의를 품고 꾸며낸 한마디가, 누군가의 삶을 혹은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을수도 있다는 자각은 언제나 너무 뒤늦게 찾아온다. 그래서 똑같은 실수는 반복된다.



 

왜 인생은 이다지도 짧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건 모두에게 인생은 한 번뿐이기 때문이겠지. 처음부터 제대로 산다면 인생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단번에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는, 그게 제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는 모두 결정적이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는 그런 결정적인 실수를 수없이 저지른다는 걸 이제는 잘 알겠다. 그러니 한 번의 삶은 너무나 부족하다. 세 번쯤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의 삶은 살아보지 않은 삶이나 마찬가지다. -285쪽


'이제, 카멜라는 어떻게 해야하나?'

찾으려는 엄마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데...


한국을 떠났던 카멜라를 다시 부른 건, 다름아닌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엄마였다. 아니, 엄마와 카멜라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넓고 깊은, 그 '바다'였다.




마찬가지로 열일곱 살에 미혼모가 된 뒤,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녀를 생각해야 하는 건 나였다. 나라는 존재, 내 인생. 엄마가 나를 낳아서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면, 이제 내가 엄마를 생각해서 엄마를 존재할 수 있게 해야만 했다. (...)

그 소녀가 가장 간절하게 생각하는 건 바로 나일 것이라는. 바다 안에서, 죽음 속에서. 그렇다면 그 소녀를 가장 간절하게 생각해야만 하는 사람 역시 나여야만 한다는. 거기에는 어떤 변명도 불가능했다. 나는 무조건 그 소녀를 생각해야만 했다. 그건 의무와도 같았다. 달마다 꼬박꼬박 집세를 내듯이, 제한 속도를 반드시 준수하듯이 나는 그 소녀를 '꼬박꼬박', '반드시' 생각해야만 했다. 마치 문집에 실린 시가 그 소녀의 한때를 기억하고 있듯이. 그 시의 제목은「밤과 낮」이었다.  -117~119쪽


불행이란 태양과도 같아서 구름이나 달에 잠시 가려지는 일은 있을망정 이들의 삶에서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거기 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거기 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이들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온몸으로 껴안을 때, 그 불행은 사라질 것입니다. 신의 위로가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그 길뿐입니다. (...)

중단된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끝까지 읽히기를 간절하게 원하는데, 그 프로젝트야말로 바로 그런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제 엄마를, 그녀의 고통을, 절망과 외로움을 받아들이기 위해 한 번 더 노력할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다음 행선지는 한국의 진남입니다. -148쪽



이제, 카멜라는 친모와 자기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심연을 건너간다.


....................



 

작년 이맘 때였으리라. 

시내 대형서점의 신간(?) 코너에서 이 작품을 처음 접한 나는 수첩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김연수 신간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입양아의 부모찾기(개인의 정체성 탐구?)'



 

 



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은 후, 나는 천천히 거실로 걸어나가 물 한잔을 마셨다.

그리고 사레에 걸려 '켁켁'거렸다. 

나의 오만함과 서투름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치다가 그만........

(정말 쌤통이다)



이 작품은 '입양아의 부모찾기'나 '개인의 정체성 탐구'를 그리고자 한 것이 아니며, 부조리한 사회현상이나 현대인의 이기적 행태를 고발하고자 한 것도 아니고, 범인(혹은 '카멜라의 친아버지')을 찾아가는 추리탐정소설은 더더욱 아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실존과 절대 고독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깊디 깊은 그 '심연'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놓여 있고, 상대에게 닿을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말을 걸때 내 소설이 시작된다.'라는 저자의 말이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김연수 그는, '너'와 '나'의 이야기가 아닌, 너와 나 '사이'를 이야기할 줄 아는 작가다.

다시 말하면, 무게 잡지 않고도 실존 철학을 이야기할 줄 아는 작가다. 



 

이 작품을 다 읽은 후, 이 짧은 시를 떠올린 사람이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니리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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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노먼 F. 매클린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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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으면 '좋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듯, 좋아하는 작품일수록 마음만 가득할 뿐 글이 되어 나오지 못한다. 


노먼 매클린의『흐르는 강물처럼』도 그중 하나다. 그동안 나는 이 작품에 대해 여러차례 쓰기를 시도했지만 번번히 미완(未完)으로 끝나고 말았다.


흰 화면은 어느새 몬태나주 협곡을 타고 흐르는 푸른 강물로 반짝이고, 키보드 위의 손가락들은 긴 곡선을 그리며 수면 위를 날아가는 플라이 낚시줄마냥 스르르 풀어지곤 했다. 


그래서 어쩌면 이번 시도도 실패로 끝나버리거나, 아니면 형편없는 포스팅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부디 이해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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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관점에 따라, 이 작품은 인공 미끼를 사용하는 플라이 낚시 이야기이기도 하고, 몬태나주 서부의 빅 블랙풋 강가에 살았던 어느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자 했지만 끝내 배우지 못한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 집에서는 종교와 플라이 낚시를 가르는 분명한 경계가 없었다. 우리는 거대한 송어들이 태어난 여런 강줄기가 합류하는 몬태나 주 서부에 살았다.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는 또한 손수 플라이를 타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타잉을 가르친 플라이 낚시꾼이었다. 플라이 낚시꾼으로서 그는 예수의 열두 제자는 어부였다고 말했으며, 신도들은 내 동생과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갈릴리 바다에서 제일 가는 낚시꾼은 모두 플라이 낚시꾼이며 예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 요한은 드라이 플라이 낚시꾼이라고 믿게 되었다. -19쪽


도끼질과 골프를 배우는 초보자가 세게 휘두르면 좋을 줄 알고 허공에서 쓸데없이 힘을 빼는 것처럼, 낚시 초보자도 자신의 결점을 알기 전까지는 낚싯대를 지나치게 뒤로 멀리 젖히려는 경향이 있다. 이럴 경우 플라이가 너무 뒤쪽으로 날아가 뒤에 있는 덤불에 박히거나 바위와 부딪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아버지는 낚시란 두 시 방향에서 끝나는 예술이라고 말하면서 종종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두 시보다는 열두 시 방향에 가깝게 휘둘러라." -25쪽


나는 세 살이나 위면서도 내기를 해도 좋은 나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내 생각에 내기란 밀짚모자를 비스듬하게 쓴 어른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가 처음 두 번 "순전히 재미로 푼돈 내기"를 제안했을 때, 혼란스럽고 당황했다. 세 번째 물어왔을 때는 화를 냈던 게 분명하다. 그 이후 그는 나한테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며, 돈 문제로 정말 고생할 때조차 푼돈도 빌리려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아주 조심스럽게 대해야 했다. 종종 그가 영락없는 어린애로 보일 때에도 그런 식으로 다룰 수는 없었다. 폴이 "나의 꼬마 남동생"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예술의 거장이었다. 그는 자기에게 충고나 경제적 지원이나 도움을 줄 형을 원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나는 그를 도울 수 없었다. -29쪽


 

형제나 자매간의 우애와 경쟁은 흔한 일이다.

화자인 노먼 역시 동생인 폴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어울리지만, 어느 순간 둘 사이엔 눈에 보이지 않는 '차이'가 생긴다. 


자유분방하고 대범한 동생과 고지식하고 성실한 형...

이 둘 사이의 '차이'는 개개인의 성격이자 기질이요, 살아가는 방법을 결정했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건너와 공부를 끝마친 형은 대학 교수가 되었고, 뛰어난 낚시꾼이었던 동생은 고향 몬태나에 남지만 그만 거액의 도박빚을 지고 만다. 



형은 종종 고향으로 내려가 동생과 함께 어린 시절처럼 낚시를 하지만 단 한번도 동생을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동생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어렴풋이 느끼지만 더이상 묻지 않는다.


동생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노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형은 자신이 더이상 묻지 않음으로써 동생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버렸다는 걸 잘 안다.



"도움을 주기엔 너는 너무 젊고 나는 너무 늙었다. 산벚나무 젤리나 돈을 주는 행동으로....."

아버지가 계속 말했다.

"도움이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고 또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에게 나의 일부를 주는 걸 말하지."

그의 말은 오래된 설교투로 변해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돕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엇을 줘야 좋을지 모르고, 어떤 부분은 주고 싶지 않을 때도 있지. 그런데 정말 절실히 필요한 그 부분을 상대방은 원하지 않을 때가 많아. 나아가 정말 도움이 될 그 부분을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할 때도 많고. 이건 읍내 부품 가게에서 '죄송합니다. 그 물건은 떨어졌습니다'하고 말하는 것과 같은 거야." -166~167쪽 


형인 노먼은 동생을 이해할 수 없었고, 동생인 폴 역시 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생인 폴은 형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사랑한 반면, 형인 노먼은 동생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사랑하지 못했다. 



 

이제 이쯤해서 작가인 노먼 F. 매클린을 소개해야겠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동명 영화를 포함하여 작품이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작가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전업 작가가 아니었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평생 동안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있다가 말년에 속죄하는 심정으로 일기처럼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작품이 출간된 후 쏟아진 많은 관심과 영화로 만들자는 제의도 전부 거절하다가, 자신과 작품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 모두 사망한 후엔 영화로 만들어도 좋다는 조건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노먼은 어쩌면 영원히 묻고 가고 싶었을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함으로써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있다'는 말을 꼭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이 방법이 아닌 방식 즉 태도이듯, 사랑 역시 방법이 아닌 방식 즉 자세라는 걸 절절히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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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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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작가상은 등단 10년 미만 작가들의 단편만을 대상으로 수상작을 선정한다고 한다. 그래서 신인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신춘문예상과도 다르고 장편소설만을 심사대상으로하는 혼불문학상과도 다르며, 작품이 아닌 작가 개인에게 수여되는 여타 문학상들과도 다른, 독특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 같다.  


뭐랄까...

설익은 듯 옅은 빛깔의 풋과일인줄 알았는데 한입 깨물자마자 과일 특유의 식감과 향긋함으로 입안이 가득차는 제철 과일이랄까...


 

역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읽었던 황정은의 <상류에 맹금류>가 가장 좋았던 반면, 기대했던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는 다시 읽어보고 나서야 작품의 주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취향에 딱 들어맞는 작품은 조해진의 <빛의 호위>였다. 퇴근길 전철안에서도 이 작품이 자꾸만 떠올랐다. 짧은 작품 속에 전혀 다른(다른 듯 보이는) 에피소드와 등장인물들이 나오지만 결국엔 단 하나의 주제 즉 '사람을 살리는 일'로 귀결되고 만다.


'아, 감동적이다.'


학교를 무단 결석하는 같은 반 여자애의 집을 찾아갔다가 그녀가 부모로부터 방임되고 있다는 걸 알아버린 어린 반장...

가끔씩 그녀를 찾아가보곤 하지만 특별히 도와줄 방법을 몰랐던 소년은 자기 집에서 몰래 카메라를 들고 나온다. 왠지 카메라라면 돈이 될 것만 같았고, 그 돈이면 그녀가 먼 곳으로 일 나갔다는 쟤 아빠를 기다리는 동안 굶주림을 면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잡지사 기자인 '나'는, 위험한 전쟁터에서 주로 사진을 찍는다는 젊은 여성 사진작가를 인터뷰한다.

형식적인 인터뷰가 끝나갈때쯤 하늘에선 눈송이가 내리고, 이를 본 여자가 '태엽이 멈추면 멜로디도 끝나고 눈도 그치겠죠.'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떠난다. 


그녀와의 두번째 만남으로 '나'는 헬게 한센의 다큐멘터리 <사람, 사람들>를 알게 되었고, 그제서야 그녀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1916년 벨기에에서 태어난 알마 마이어는 유대인이면서 여성이라는 차별을 딛고 1938년에 브뤼셀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바이올리니스트로 입단했다. 하지만 1940년, 벨기에에 유대인 등록령이 내려지면서 그녀는 오케스트라에서 해고됐고 게토에 갇히거나 수용소로 끌려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졌다. 그때 그녀의 연인이자 같은 오케스트라에서 호른을 연주하던 장이 브뤼셀 외곽에 위치한 사촌형의 식료품점 지하창고에 그녀의 은신처를 마련해주었다. (...)

이 주에 한 번씩 장이 물과 빵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지하창고를 찾아오긴 했지만 그 무렵엔 누구나 그렇듯이 장 역시 가난했으므로 그 양은 보름을 버티기엔 늘 부족했다. 바구니는 가볍고 초라했지만 장은 바구니 밑바닥에 자신이 작곡한 악보 한 장씩을 깔아놓는 걸 잊지 않았다. 빛으로 에워싸인 허공의 악기상점을 본 날이면 그녀는 바이올린을 꺼내 호라이 줄에 닿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 악보들로 연주를 했다. 조명이 없는 무대에서, 관객의 박수를 받지 못한 채, 소리가 없는 연주를.


ㅡ장이 작곡한 그 악보들은 식료품점 지하창고에서 날마다 죽음만 생각하던 내게는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하는 빛이었어요. 그러니 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 악보들이 날 살렸다고 말이에요. -조해진의 <빛의 호위> 58~59쪽 中-


헬게 한센의 다큐멘터리 <사람, 사람들>은 유대인인 알마 마이어와 그의 아들 노먼 마이어의 이야기다.

모자(母子)였던 이들은 가자 지구에 갇혀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전해 줄 식료품을 싣고 국경을 넘다가 (이스라엘측의) 폭격으로 아들은 죽고 엄마만 살아남는다.


장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알마 마이어는 미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미국에 도착해서 분신과도 같은 바이올린을 팔아 출산을 하고... 아이가 다섯살 되었을 무렵, 아이 아빠인 장을 찾아나서지만 그가 다른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사실을 알고는 돌아선다. 알마는 자기 때문에 장은 이미 너무 많은 위험을 무릅썼으므로 그의 삶에 또다시 혼란을 끼치고 싶지 않다. 그녀의 아들 노먼 역시 커서 의사가 된 이후 줄곧 자신의 아버지인 장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다. 연락 한번 하지 않은 채... 


단 한번도 자신이 작곡한 곡이 무대에서 연주된 적이 없고, 마흔이 넘어서는 소도시 오케스트라에서도 쫓겨난 장...

그는 음악가로는 실패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바로 사람을 살려내는 일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확인한 후, 노먼은 수십년 전 자신의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유대인 여성의 목숨을 살려냈듯 자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목숨을 걸고 사람을 살려내는 일을 한다...




 

편지 안에서 그녀가 내게 묻는다. 반장,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뭔지 알아? 편지 밖에서 나는 고개를 젓는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이라고. 그러니까...그러니까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반장, 네가 준 카메라가 날 이미 살린 적이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은이.


그 편지가 저장된 날은 그녀와 내가 을지로에서 만나 맥주를 마신 날이었다. 내게 고맙다고 말한 뒤 택시를 타고 떠난 그녀는 연말의 서울 거리를 가로지르는 택시 안에서 언젠가 살아 있는 사람이 읽을 수도 있는 이번에는 꽤 쓸모 있는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해진의 <빛의 호위> 63~64쪽


너무 아름다워서 믿기 어렵고, 그래서 너무 소설같은, 이런 작품이 난 참 좋다.

단편소설은 분량은 짧아도 내용이 짧은 건 결코 아니다. 조해진의 <빛의 호위>, 이 작품만 하더라도 몇십 장을 넘지 않는 짧은 분량이지만 시공간을 폭넓게 아우르고 있다.


'세상의 관심과 박수갈채 따위 신경쓰지 않고 의연히 작가의 길만을 가겠다'는 그녀의 포부가 마치 관심받지 못하는 작고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위대'한 삶을 계속 그려나가겠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가끔씩 특히 말도 안되는 기가 막히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나는 생각하곤 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데, 왜 아직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 걸까?'


유대인 여성을 무려 2년 동안이나 숨겨주고 해외 이주를 도왔던 장...

자신의 조국이 내건 기치와는 달리 사람을 살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노먼 마이어와 알마 마이어...

친하지도 않은 같은반 여자애를 위해 어린 마음에 감히 하기 어려웠을 집안의 카메라를 훔친 화자인 '나'....

그리고,

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쓰고 읽고 전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무너지지 않으리라.



 

이 밖에도 최은미의 <창 너머 겨울>은 묘한 슬픔과 카타르시스를 전해주었고, 기준영의 <이상한 정열>과 손보미의 <산책>을 읽으면서는 레이먼드 카버와 제임스 셜터의 분위기를 감지했다.


한편, 수상작 일곱편 중 나의 감성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작품을 꼽으라면 윤이형의 <쿤의 여행>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나에겐 매우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SF인지 환타지인지 모호한 작품의 색깔도 그렇고, 화자로부터 쉼없이 소환되는 '쿤'의 존재는 나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만약 작가의 의도가 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 거라면, 나는 작가가 쳐놓은 그 함정(?)에 제대로 빠져든 셈이다.



 

끝으로,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는 그녀의 작품집을 읽어볼 예정이므로 그때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 같기에 여기선 아쉽지만 생략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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