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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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작가상은 등단 10년 미만 작가들의 단편만을 대상으로 수상작을 선정한다고 한다. 그래서 신인에게만 기회가 주어지는 신춘문예상과도 다르고 장편소설만을 심사대상으로하는 혼불문학상과도 다르며, 작품이 아닌 작가 개인에게 수여되는 여타 문학상들과도 다른, 독특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 같다.  


뭐랄까...

설익은 듯 옅은 빛깔의 풋과일인줄 알았는데 한입 깨물자마자 과일 특유의 식감과 향긋함으로 입안이 가득차는 제철 과일이랄까...


 

역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읽었던 황정은의 <상류에 맹금류>가 가장 좋았던 반면, 기대했던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는 다시 읽어보고 나서야 작품의 주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취향에 딱 들어맞는 작품은 조해진의 <빛의 호위>였다. 퇴근길 전철안에서도 이 작품이 자꾸만 떠올랐다. 짧은 작품 속에 전혀 다른(다른 듯 보이는) 에피소드와 등장인물들이 나오지만 결국엔 단 하나의 주제 즉 '사람을 살리는 일'로 귀결되고 만다.


'아, 감동적이다.'


학교를 무단 결석하는 같은 반 여자애의 집을 찾아갔다가 그녀가 부모로부터 방임되고 있다는 걸 알아버린 어린 반장...

가끔씩 그녀를 찾아가보곤 하지만 특별히 도와줄 방법을 몰랐던 소년은 자기 집에서 몰래 카메라를 들고 나온다. 왠지 카메라라면 돈이 될 것만 같았고, 그 돈이면 그녀가 먼 곳으로 일 나갔다는 쟤 아빠를 기다리는 동안 굶주림을 면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잡지사 기자인 '나'는, 위험한 전쟁터에서 주로 사진을 찍는다는 젊은 여성 사진작가를 인터뷰한다.

형식적인 인터뷰가 끝나갈때쯤 하늘에선 눈송이가 내리고, 이를 본 여자가 '태엽이 멈추면 멜로디도 끝나고 눈도 그치겠죠.'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떠난다. 


그녀와의 두번째 만남으로 '나'는 헬게 한센의 다큐멘터리 <사람, 사람들>를 알게 되었고, 그제서야 그녀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1916년 벨기에에서 태어난 알마 마이어는 유대인이면서 여성이라는 차별을 딛고 1938년에 브뤼셀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바이올리니스트로 입단했다. 하지만 1940년, 벨기에에 유대인 등록령이 내려지면서 그녀는 오케스트라에서 해고됐고 게토에 갇히거나 수용소로 끌려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졌다. 그때 그녀의 연인이자 같은 오케스트라에서 호른을 연주하던 장이 브뤼셀 외곽에 위치한 사촌형의 식료품점 지하창고에 그녀의 은신처를 마련해주었다. (...)

이 주에 한 번씩 장이 물과 빵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지하창고를 찾아오긴 했지만 그 무렵엔 누구나 그렇듯이 장 역시 가난했으므로 그 양은 보름을 버티기엔 늘 부족했다. 바구니는 가볍고 초라했지만 장은 바구니 밑바닥에 자신이 작곡한 악보 한 장씩을 깔아놓는 걸 잊지 않았다. 빛으로 에워싸인 허공의 악기상점을 본 날이면 그녀는 바이올린을 꺼내 호라이 줄에 닿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 악보들로 연주를 했다. 조명이 없는 무대에서, 관객의 박수를 받지 못한 채, 소리가 없는 연주를.


ㅡ장이 작곡한 그 악보들은 식료품점 지하창고에서 날마다 죽음만 생각하던 내게는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하는 빛이었어요. 그러니 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 악보들이 날 살렸다고 말이에요. -조해진의 <빛의 호위> 58~59쪽 中-


헬게 한센의 다큐멘터리 <사람, 사람들>은 유대인인 알마 마이어와 그의 아들 노먼 마이어의 이야기다.

모자(母子)였던 이들은 가자 지구에 갇혀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에게 전해 줄 식료품을 싣고 국경을 넘다가 (이스라엘측의) 폭격으로 아들은 죽고 엄마만 살아남는다.


장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알마 마이어는 미국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미국에 도착해서 분신과도 같은 바이올린을 팔아 출산을 하고... 아이가 다섯살 되었을 무렵, 아이 아빠인 장을 찾아나서지만 그가 다른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사실을 알고는 돌아선다. 알마는 자기 때문에 장은 이미 너무 많은 위험을 무릅썼으므로 그의 삶에 또다시 혼란을 끼치고 싶지 않다. 그녀의 아들 노먼 역시 커서 의사가 된 이후 줄곧 자신의 아버지인 장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다. 연락 한번 하지 않은 채... 


단 한번도 자신이 작곡한 곡이 무대에서 연주된 적이 없고, 마흔이 넘어서는 소도시 오케스트라에서도 쫓겨난 장...

그는 음악가로는 실패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바로 사람을 살려내는 일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확인한 후, 노먼은 수십년 전 자신의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유대인 여성의 목숨을 살려냈듯 자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목숨을 걸고 사람을 살려내는 일을 한다...




 

편지 안에서 그녀가 내게 묻는다. 반장,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뭔지 알아? 편지 밖에서 나는 고개를 젓는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어.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이라고. 그러니까...그러니까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반장, 네가 준 카메라가 날 이미 살린 적이 있다는 걸 너는 기억할 필요가 있어. 은이.


그 편지가 저장된 날은 그녀와 내가 을지로에서 만나 맥주를 마신 날이었다. 내게 고맙다고 말한 뒤 택시를 타고 떠난 그녀는 연말의 서울 거리를 가로지르는 택시 안에서 언젠가 살아 있는 사람이 읽을 수도 있는 이번에는 꽤 쓸모 있는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해진의 <빛의 호위> 63~64쪽


너무 아름다워서 믿기 어렵고, 그래서 너무 소설같은, 이런 작품이 난 참 좋다.

단편소설은 분량은 짧아도 내용이 짧은 건 결코 아니다. 조해진의 <빛의 호위>, 이 작품만 하더라도 몇십 장을 넘지 않는 짧은 분량이지만 시공간을 폭넓게 아우르고 있다.


'세상의 관심과 박수갈채 따위 신경쓰지 않고 의연히 작가의 길만을 가겠다'는 그녀의 포부가 마치 관심받지 못하는 작고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위대'한 삶을 계속 그려나가겠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가끔씩 특히 말도 안되는 기가 막히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나는 생각하곤 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데, 왜 아직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 걸까?'


유대인 여성을 무려 2년 동안이나 숨겨주고 해외 이주를 도왔던 장...

자신의 조국이 내건 기치와는 달리 사람을 살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노먼 마이어와 알마 마이어...

친하지도 않은 같은반 여자애를 위해 어린 마음에 감히 하기 어려웠을 집안의 카메라를 훔친 화자인 '나'....

그리고,

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쓰고 읽고 전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무너지지 않으리라.



 

이 밖에도 최은미의 <창 너머 겨울>은 묘한 슬픔과 카타르시스를 전해주었고, 기준영의 <이상한 정열>과 손보미의 <산책>을 읽으면서는 레이먼드 카버와 제임스 셜터의 분위기를 감지했다.


한편, 수상작 일곱편 중 나의 감성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작품을 꼽으라면 윤이형의 <쿤의 여행>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나에겐 매우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SF인지 환타지인지 모호한 작품의 색깔도 그렇고, 화자로부터 쉼없이 소환되는 '쿤'의 존재는 나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만약 작가의 의도가 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한 거라면, 나는 작가가 쳐놓은 그 함정(?)에 제대로 빠져든 셈이다.



 

끝으로,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는 그녀의 작품집을 읽어볼 예정이므로 그때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 같기에 여기선 아쉽지만 생략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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