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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 한두 줄만 쓰다 지친 당신을 위한 필살기 이만교의 글쓰기 공작소
이만교 지음 / 그린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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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러시아 브랜디의 <작가수업>부터 <소설쓰기의 모든 것1,2>, 윌리엄진서의 <글쓰기 생각쓰기>까지 그러고보니 그동안 접한 글쓰기 관련 책들이 하나같이 외서에 편중되어 있었다. 의도적으로 외서만을 찾아 읽은 건 아니었는데 어찌하다보니 그리 되었다. 그러다가 독서목록에도 올라와 있지 않던 책을 만나게 되었다. 아마 윌리엄케인의 <거장처럼 써라>라는 책을 빌리러 갔다가 그 책 대신 집어든 책이었다. 우선은 한국인의 관점에서 쓰여진 '글쓰기론'을 접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고, 그 다음으론 유난히 두툼한 두께에 홀렸다고나 할까. 작가의 작품이나 영화를 접한 것은 아니었으니 책을 선정하는 데 있어 지은이의 영향력은 0%에 가깝다.

 

      

 

참고로, 이만교는 2005년 영화로도 만들어진 '결혼은 미친짓이다'라는 작품의 원작자로 나름 지명도를 갖고 있다. 유쾌하고 발직한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글쓰기 공작소>를 통해 언뜻 느낀 그의 글쓰기 자세는 결코 발직하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글쓰기 공작소>에서는 다양한 예문을 통해 글쓰기의 잘잘못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등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구체적이고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렇지만 글쓰기 공작소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가르침은 바로 글쓰기의 방법이 아닌, 글쓰기 자세가 아닐까 싶다. 작가 역시 깊이 있는 사유와 주제의식이야 말로 글쓰기의 핵심이라고 일갈하고 있다. 


좋은 글이란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 씨앗문장과 씨앗도서를 갖고 있어야 한다.


무릇, 글쓰기의 시작은 글읽기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독서도 올바르게 해야지 호기심이나 관심분야만을 기웃거려서는 결코 좋은 독서력을 키울 수 없다. 저자인 이만교는 밑줄긋기를 통해 사유의 폭을 넓히고, 이를 글쓰기의 씨앗문장과 씨앗도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그가 깊은 감동을 받은 씨앗도서 <전태일 평전>은 시간을 내어 곱씹어 읽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언어를 갈고 다듬는 '조탁'을 게을리 하지 말고, 일상언어와 관용구의 사용을 피해야 한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하고 있다.  소설지망생들의 가장 큰 실수란 언어에 대한 감수성이 빈약하고 평소 사용하는 일상언어를 그대로 문장속에 옮겨놓는다는 점이다. 사실, 출판언어는 일상언어와는 달리 오로히 문자만으로 독자와 소통해야 한다. 그러므로 글쓰는 사람이라면 훨씬 더 명징하고 적확한 단어와 표현을 선택해야 한다.


감수성이 무디어지면 다수언어가 된다. 그러므로 창작언어를 구사하는 소수가 되어야 한다.


글쓰기의 대가들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부분이다. 상투적인 표현을 피하고 색다른 표현을 창조해내야 하고 언어의 창조성은 예리한 감수성을 통해 표출된다. 언어에 대한 감수성은 글자 하나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집착하는 과정을 통해 키워진다. 이만교에 따르면 '언어는 너무나 다양하고 너무나 섬세하고 너무나 예민해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나오지 않으며 단 한 글자도 속일 수 없으며, 한 문장 한 문장의 변화가 곧 내 삶의 한순간 한순간의 변화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언어를 매만지는 자세가 숭고하고 웅숭스럽기 그지없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좋은 글은좋은 소재(글감)만으로는 부족하다. 문제의식 즉 주제의식을 갖고 있어야 좋은 글이 탄생한다. 잊지말자! 소설의 3요소는 주제, 구성(플롯), 문체임을...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책으로 엮으면 대하소설이 될 것이라는 말들을 종종 한다. 그렇지만 매우 진귀하고 독특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모두 책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소재의 부재가 아닌 주제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제의식은 어떻게 갖을 수 있을까? 세상과 사람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와 애정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것 역시 주제 의식의 부제를 들 수 있겠다. 


장르나 신춘문예 등과 같은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글쓰는 과정 자체를 즐겨야 한다.


저자는 솔직히 고백한다.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염불보다는 젯밥에 관심이 있는 이들'을 많이 만나게 되노라고. 그런데 젯밥에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염불 외는 실력은 형편없어 지고, 실력이 없으니 좋은 결과를 얻기란 불가능하다. 열심히 온마음 다해 좋을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그 과정의 끝에 등단이나, 문예지 당선 및 출판 등등이 자리하고 있는 법이다.


겉으로는 열심히 치열하게 읽고 쓰고 고민하는 듯하지만, 그것이 결코 열심히 치열하게 읽고 쓰고 고민한 것이 아닌 경우가 얼마든지 많다. 열심히 읽은 것이 아니라 조급하게 읽었거나, 많이 읽은 것이 아니라 방만하게 읽었거나, 성의껏 쓴 것이 아니라 욕심껏 쓴 것이거나, 자기 도약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 도취에 빠져쓴 것이거나, 치열하게 고민한 것이 아니라 치졸하게 고민한 것이거나, 다양하게 고민한 것이 아니라 산만하게 고민한 것이거나, 혼자만의 시잔을 가진 것이 아니라 혼자뿐인 시간을 가진 경우, 그러한 노력은 허사다. (...)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참으로 많은 학생들이,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참으로 자주, '열심히'와 '조급히'를 혼동하고, '최선을 다해'와 '욕심을 다해'를 혼동한다. '자기만의 생각'과 '자기만의 고집'을 혼동하고 '독창적인 글쓰기'와 '독선적인 글쓰기'를 혼동한다. '고독한 창작생활'과 '고립된 창작생활'을 혼동한다.

-이만교, <나를 바꾸는 글쓰기공작소>中-


나 역시 사유하기 위한 책읽기가 아닌, 그저 바삐 기록하고 자랑하기 위한 자아도취적 책읽기를 해온 건 아니었는가? 분명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다고는 대답하지 못하겠다. 남의 지식을 소화시키지도 못하면서 너무 욕심껏 섭취한 것은 아니었는지... 알량한 글쓰기 솜씨를 자기자신에게라도 뽐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속물이자, 염불보다는 젯밥에 관심이 많이 어중이에 불과했던 스스로를 깊이 반성해본다. 벌써, 오늘 아침에도 블로그에 독후감을 남기기 위해 얼마 남기 않은 책장을 쏜살같이 달려가지 않았던가. 눈과 마음으로 읽지 않고 쓰지 않은 문장들은 오롯히 '내'것이 아닌 '남'것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으니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도 멀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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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복을 벗은 라오바이싱
서명수 지음 / 아르테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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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복을 벗은 라오바이싱>은 신문기자인 저자가 베이징에 거주하면서 몸과 마음으로 접한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단상이다. 저자가 글을 쓰던 2006년도는 베이징 올림픽을 코 앞에 둔 시점이라 중국 사회의 변화가 그 어느때보다 컸던 시기다. 중국의 라오바이싱들은 기대와 희망 속에서 시대의 변화를 온몸으로 맞이했고 저자 역시 그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그 역사적인 순간들을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비 록 책이 나온 이후 5년이란 세월이 흘렀기에 지금의 중국 및 중국인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2002년 당시 내가 접했던 중국인들과는 또 다른 모습을 그리고 있기에 개인적으로 무척 의미있는 독서가 되었다. 특히, 저자가 윈난 여행길에서 만났던 노교수 부부의 모습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20대 중반의 지식층이었던 그들이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들에 의해 비판받고 결국은 한살배기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저장성의 한 시골마을로 떠나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믿었을까...

 

무 려 십년이다. 강산도 바뀐다는 십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건너왔을까. 저자의 질문에 말을 아꼈다는 노부부... '그래, 무슨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문화대혁명은 이들 노교수 부부처럼 무고한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세상이 바뀐 틈을 이용하여 권력과 부를 쌓은 이들도 분명 있었을 테고, 젊은 혈기를 잘못된 방향으로 발산한 홍위병 출신의 가해자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던 이들은 모두 동시대를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중국의 라오바이싱인 것이다. 류전윈이나 옌롄커(공교롭게도 이들 모두 허난성 출신이다) 등 요즘 온통 내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당대 중국작가들의 신역사주의(혹은 사실주의?)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다코우(五大口)의 지질대학 교수 사택에 거주한다는 그들 노부부를 바라보는 내 눈길은 경건함도 아니고 애틋함도 아닌, 아니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르는 뭐라 표현할 길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저장성의 원저우와 장쑤의 쑤저우식 경제발전 모델을 비교한 부분이나 중국식 지역감정의 현장인 허난인에 대한 차별은 중국에 대한 좁디 좁은 내 안목을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자 또한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저자는 기자라는 직업과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평범한 외국 유학생이라면 결코 접근하기 어려웠을 798의 예술가나 민영기업가들 그리고 벼락부자등을 취재하여 그들의 일과 삶을 진솔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민복을 벗은 라오바이싱>은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어설픈 감상이나 겉핥기식 취재기가 아니라 저자의 심도 있는 시각과 관점이 잘 어우려져 중국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도 충분한 메세지를 전달해 준다.

 

다만, 기자라는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게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것 같다. 출판사측의 세심한 뒷마무리가 있었다면 발각되지 않을 '실수'였는데 아쉽다. 아마 저자도 출판된 책을 보며 안타까워했을 것 같다. 좋은 책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도 좋아야 독자의 선택을 받고 또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어찌됐던 저자의 열정과 장기간에 걸친 취재로 탄생한 책이 어쩌면 앞으로 중국 현대사의 한켠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단서가 될 수도 있는 책이 불필요한 실수로 인해 평가절하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개인적으로  '저자의 말'에 언급되어 있는, 저자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는 그 중국인 친구-부친은 인민해방국 장교로 한국전에도 참전했고 북한에서도 5년 머물렀다 귀국했으나 문화대혁명때 탄압받아 옥살이를 하다 결국 옥사하고, 아들인 그 친구 역시 이런 아버지의 '신분'때문에 대학을 졸업했었도 직장을 배정받지 못했고, 그래서 '국가가 나에게 해준게 뭐가 있느냐?'라고 반문했다는-에 대한 이야기가 본문에서 나올 것이라 기대했으나 기대는 실망과 아쉬움으로 바뀌어 버렸다. 아마, 예민한 문제라고 판단하여 '자체검열'로 누락됐을지도 모르겠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끝으로, 중국인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라는 최근의 내 화두(?)를 정리하는 데에 이 책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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