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인류 역사의 기준을 재확립한 이 역작의 시작은 한 뉴기니인의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들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지고 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말문이 막힐 것이고, 어떤 사람은 당연한 것처럼 "백인은 우월한 인종이고, 흑인은 열등한 인종이니까"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의 요지는 이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환경에 있었다. 얄리의 질문은 다시 말해 인류의 역사가 왜 지금처럼 불공정한가, 언제부터 이러한 불공정이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제 그 단순한 질문은 한 마디로 정리하기 불가능한 대답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보충 설명이 필요한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바로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 각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라는 주장이다.

 

 다이아몬드는 이 결론을 도출해내기 위해 기록조차 남겨지지 않은 과거로 되돌아간다. 민족의 뿌리와 그 분파들이 지구 곳곳에 흩어져 누군가는 원주민이 되고, 누군가는 떠돌이가 되었다. 인류의 시작은 동일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의 순리가 작용했다. 최초로 차이를 낳은 것은 살벌한 총, 균, 쇠가 아니라 수확할 수 있는 농작물과 기를 수 있는 가축의 여부였다. 우리는 전자를 통해 인류 문명의 기원이 모두 강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초승달 지대가 왜 비옥한 땅의 상징이었는지 알 수 있다.

 

 초승달 지대(출처: 네이버).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작물화와 가축화의 과정에서 중요한 인류사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모두 다르다"라는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이다. 이것을 그대로 적용하면, "기를 수 있는 식물과 동물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키울 수 없는 이유는 제각기 다르다." 즉, 한 가지 조건이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이 식물 또는 동물은 인류의 문명에 이바지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이 원칙에 힘입어, 세계는 기를 수 있는 작물과 가축의 여부에 따라 편차가 발생했다. 이것이 첫 번째 불평등이었다.

 

 얼마 안 가 평화는 끝났다. 위의 환경적 차이로 동일한 시간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서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앞선 문명, 즉 총, 균, 쇠를 보유한 자들(주로 유라시아인들)이 원주민(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들을 정복했고,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존재한다. 저자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뉴기니와, 우리나라와 "고대에 쌓았던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해야 하는 일본이 바로 그 사례이다. 여기에 저자는 특정한 개인을 개입한다. 알렉산더 대왕, 카이사르, 나폴레옹, 히틀러, 이들이 없었다면 세계사의 흐름은 오늘날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저자도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존재가 환경적 차이와 무관하다고 일축한다. 이렇게 해서 다시 한 번 저자의 결론이 언급된다.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 인종의 차이도, 영웅의 존재도 아닌, 단순한 환경적 차이이다. 

 

 저자의 논지를 그림으로 정리한 것

 

 따라서 우리는 현대의 모습에 대해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너의 환경을 탓하느니, 환경적 차이를 넘어서는 '특정한 개인'이 되라. 이것이 『총, 균, 쇠』를 통해 내가 얻은 교훈이다. 다이아몬드의 주장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오늘날 세계에 나타나는 오늘날 세계에 나타나는 다양한 불공평을 민족이나 문화의 우열로 가리지 말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시에, 역사의 책임을 환경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설파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가 불공평한 것은 환경적 차이에 불과할 뿐, 환경의 책임은 아니다. 역사를 바꾸는 주체는 여전히 사람이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그 밑에 흐르는 세계사의 보편적 원리는 변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볼까? 총, 균, 쇠다. 총이라는 이름의 폭력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여 통치자의 도구로 쓰인다. 균은 예기치 못한 시점에 창궐하여 면역력 없는 약자들과 원주민들을 살상한다. 그리고 쇠라는 이름의 문명은 불평등 그 자체이다. 물론 저자는 모든 문명을 해체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누구에게나 가능성은 있고, 문명의 우열은 있을지언정 민족과 문화의 우열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다이아몬드가 에필로그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다. 역사학도 과학이다. 실제로 『총, 균, 쇠』를 들여다 보면, 생명과학이나 지구과학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존재한다. 그 부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역사의 발전이나 퇴보의 원인을 알 수 없다. 역사와 과학은 연결되어 있으며, 나아가 역사학도 과학의 일원이다, 라는 것이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주장이다. 나도 그 의견에 동감한다. 그리고 내가 그의 말에 동감하는 한, 나는 결코 역사학자가 될 수 없다. 단지 역사에 흥미를 가진 학도일 뿐이다. 과학, 정치,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역사도 이해할 수 없다. 선사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땅'에 대한 이야기는, 인류가 얼마나 부동산에 영향을 많이 받는지 보여주는 실례인 것이다.


 바야흐로 21세기, 시대는 변했다. 어디까지나 이 책도 개정이 되었을언정 20세기, 구세계의 흔적이다. 농업혁명은 끝났고, 어느새 정보 혁명까지 왔다. 세상은 땅의 주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진 자가 다스리는 곳이 되었다. 가축의 양이 아니라 기술의 질이 훌륭한 사람이 돈과 명예를 얻는다. 그러나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신세계에 전달해 줄 몇 가지 메시지를 이 책 안에 담았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가치가 흐려지지 않을 역사적 원리들 말이다. 왜 『총, 균, 쇠』에 '일본인의 뿌리'에 관련된 논문이 실렸는가? 마치 저자는 2014년까지 지속된 한일 관계의 악화를 예상하고 있는 듯 하다. 그 논란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적 논쟁이다. 그리고 그가 한일 양국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두 나라는 형제라는 것이다. 화해하지 못한 형제, 그것이 우리다. 언제쯤 우리는 타인과 악수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풍조는, 역사적으로 보나 과학적으로 보나, 분명 고쳐져야 할 요소일 것이다. 고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은 고사하고, 문화나 민족조차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총, 균, 쇠』는 제목만큼이나 살벌하고 냉혹한 미래를 예견하고 있는 무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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