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 독점계약 번역 개정판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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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란 보이는 결과와 보이지 않는 과정의 종합이다. 기억하는 자가 해야 할 일은 보이는 것 이면을 보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피상적인 세계만 접하는 이들은 과거를 추측할 수도, 미래를 예측할 수도 없다. 동시에 어떤 이도 양쪽의 입장을 공평하게 헤아릴 수 없다. 관측자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가치관에 순응해야 하고, 고유한 가치관에 스스로를 맡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명한 역사학자인 E.H.카(E.H.Carr)는 역사 자체에 대해 논하기보다 역사가의 의무에 대해 말한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정의로 유명한 그의 통찰에는 본질적으로 역사가의 선택이 곧 역사를 만든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 주장을 납득하도록 하기 위해 그는 역사의 사례들을 든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코에 반했다거나, 알렉산드로스가 원숭이에게 물려 사망한 것은 마치 대안적인 결과(alternative result)가 그 이후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기록되지만, 작가는 이런 종류의 문제가 결정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못 박는다. 왜냐하면 어떤 결과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원인이 존재하며,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역사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꼽으라 할 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특정한 원인 한 가지를 지적하겠지만, 그것이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후세인은 별 수 없이 결과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카는 여기에 몇 가지 제약을 둔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우연적인 요소를 인과 관계에 포함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담배를 피는 남성이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해서, "담배를 피우면 교통사고를 당한다"라고 일반화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역사적 결과를 논의할 때, 지나치게 지엽적이거나 우연한 요소를 대입한다면, 소위 말해 그것은 끼워 맞추기 내지는 음모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관측자마다 평가가 다를 뿐, 사실은 동일해야 한다. 카는 역사학에서(또는 이 세상에서) 절대적 진리도 절대적 오류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결과의 왜곡은 절대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불편하더라도 진실은 뚜렷하게 서 있어야 한다. 본질이 훼손되면 원인을 찾고자 하는 노력도 모두 헛되게 된다.


 나아가 저자는 왜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 답변한다. 이 책에는 선명하게 나오지 않지만, 결국 그가 하고자 했던 말도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그랬듯이, 미래의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었으리라. 역사가 오늘과 어제의 긴밀한 상호작용이라면, 오늘 역시 미래와 꾸준히 교류하고 있음이 분명하니까. 지금의 사회는 위기인가, 기회인가? 그저 절망하고 좌절할 텐가, 아니면 희망이 존재하는 미래를 향해 박차고 나설 것인가? 그 어느 때보다 지식과 기술이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시대이다. 다가올 결과에 주목하지 않고, 과정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비로소 대안적인 세계(alternative world)가 임하지 않을까?

 

 조금은 거시적으로 인류사를 돌아본다. 성경을 예로 들고 싶다. 나는 그동안 시편이나 복음서의 말씀은 달게 여겼으나, 민수기나 역대기의 기록, 족보 속의 인물들, 전쟁 속에서 희생된 인물들에 대한 서술을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더 살았거나 죽었다면, 그리하여 그들의 후손이 역사의 변곡점을 만들었다면, 우리가 아는 세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란 그토록 정교하고 치밀하다. 내가 보는 영상 한 편, 한 구절의 글, 사소한 선행과 악행이 인류의 운명을 영구히 바꾼다. 이 막대하고 불편한 진실의 실마리를 아는 것만으로도 나는 버겁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결과로 다가온다. 나의 처절한 실패는 타인의 극적인 성취이고, 나의 가난과 좌절은 누군가의 부와 명예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인간은 서로에게 상처이고 손해인가? 오히려 서로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에 사회가 유지된다. 어떤 이는 정치를, 어떤 이는 예술을, 누군가는 교육을, 또 다른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청소와 하수 처리와 배달과 제조와 화장과 훈련을 해야 한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쓸모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역사는 모두를 포용한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무의미하지 않다. 한 사람이 힘들게 버틴 하루가 또 다른 이의 멋진 미래를 보장하기도 한다. 드러나는 존재에 대해서만 이해하려 한다면, 글쎄, 역사는 100분의 1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래를 어떻게 준비할까? 만약 그것이 결과라면, 나는 오늘이라는 과정에 충실할 것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나의 최선을 여지없이 다하리라. 막연한 미래가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인류나 지구의 앞날을 고민하기에는 당장 눈앞에 닥친 나의 가난과 입지가 더 위태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분명히 환경은 파괴되었고, 우리는 많은 것을 잃을 것이다. 그것이 공기이든, 깨끗한 물이든, 화석연료나 에너지든, 또는 사랑하는 이들이든, 우리가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시절은 곧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그 위기 속에서 나는 좌절하고 싶지 않다. 닥쳐온 현실을 인정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싶다. 그때 되서야 알게 될까? 결과는 과정의 집합체에 불과함을, 결과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정이 곧 결과임을 납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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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2-16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90년대 까치본을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적이 있는데 좋은 책인 것은 맞지만 지금도 까치에서 독점 계약으로 출간하고 있다니 좀 놀랍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