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미숙한 번역이지만 그래도 잘 봐주시길) 

 스파르타쿠스 전쟁, 또는 3차 노예 전쟁은 가장 모호한 전쟁 중 하나이다. 그것은 노예 무리가 무엇을 일으켰는지에 대한 기록을 적어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만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로마인들이 “정확히” “단지” 노예에 의한 반역을 무력으로 짓밟는 것을 아주 길게 그리고 아주 많이 살펴보았다는 사실에서 부끄러워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그리고 이렇게, 반역에 대한 사실을 써내려가는 것을 그들이 마음에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의 역사에서 일부 로마의 고전 작가들, 아피아와 플루타르크와 같은 사람들이 3차노예전쟁에 대한 사실을 기록했다. 하지만,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서로 크게 다르다. 노예 군대도 알지 못했던 동기 부여-아피아는 그것이 로마 스스로의 조화라고 주장했다, 한편 플루타르크는 스파르타쿠스가 그저 이탈리아와 갈리아 안으로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피아와 플루타르크 둘 다 반역이 더 일찍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에 다소 동의했다 그들에 따르면, 기원전 73년에 70명의 검투사가 렌툴러스 배티애터스의 검투사 학교에서 도망가 그들의 검투사의 무기를 사용하여 카푸아에서 고대 로마 군단을 쳐부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부하들이 카푸아, 캄파니아, 베수비오 화산을 근거지로 삼아 그 주변의 부유한 지역들을 약탈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점에서도 로마인들은 노예들이 아주 무의미한 일을 진짜 위협보다는 오히려 죄에 가까운 어떤 것을 고찰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 해가 지난 후, 로마 원로원은 가이우스 글라디우스 글라베르 같은 집정관을 보내 반역을 진압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로마인들이 검투사들을 위협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들에게 조직적인 군대를 명령하는 글라베르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용군은 3000명의 남자를 포함하고 있었다. 글라베르는 오직 산으로 가는 길을 봉쇄하는 것만 알고 있었고 노예들을 굶겨 죽이는 것을 원했다. 비록(글라베르가 산으로 가는 길을 봉쇄했더라도-필자) 스파르타쿠스는 그가 가진 것을 실행할 계획이었지만 말이다. 그는 줄과 사닥다리를 만들어 덩굴 밖에서 그것을 사용하여 글라베르의 무리 맞은 편의 절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노예들은 산의 기슭로 이동하여 이상한 낌채를 못 채고 있는 글라베르 곁으로 가 로마군을 완파할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서와는 다르게 나타나는 글라베르의 군대와 바리니우스의 군대의 살육은 하루에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글라베르의 패배(혹은 죽음-필자)를 들은 후, 원로원은 집정관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에게 정규군의 명령권을 주고 검투사를 물리칠 것을 그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바리니우스가 반나체로 폭포로 도망친 부분은 사실이다-그는 친구의 집에서 목욕을 하고 있을 때 반역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바리니우스의 패배 이후,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부하들은 기원전 73년의 겨울을 놀라, 너세르아, 더리, 그리고 메타폰튬과 같은 다른 도시를 정복하는 데에 보냈다. 노예들의 반역의 지도자는 스파르타쿠스, 크릭수스, 오이노머우스, 간니쿠스는 별 문제로 하고 비록 오이노머우스는 언젠가 겨울에 지긴 했지만 말이다(?). 

 기원전 72년 봄에 원로원은 마침내 반역자들에게 루키우스 겔라우스 퍼블리콜라와 그네이우스 콜리넬리우스 렌툴루스 하의 집정관군을 파견하겠다고 위협을 했다. 이 책략의 의도에 대해 나는 크라수스의 명령하에 놓인 겔리우스, 렌툴라스 그리고 바리니우스를 두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한편, 반역자들은 두 무리(또는 군대-필자)로 나뉘어졌는데 하나는 스파르타쿠스의 지도하에 있는 무리이고 다른 하나는 크릭수스의 명령하에 있는 무리이다. 이 사건의 정확한 동기 부여는 알려지지 않았다.  

 겔리우스는 크릭수스의 군대를 물리치고 일의 경과 과정에서 크릭수스를 죽였다. 후에 일어난 사건은 분명하지 않고 아피아와 플루타르크에 의한 원전 때문에 모순되었다(어쩌면 모순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결국 다른 사건으로 언급된다는 원천). 

 그들의 기록은 합의를 이루었지만, 기원전 73년에 일찍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그의 명령에 8개의 정규군과 함께 집정관을 비난했다. 가장 큰 대립은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피세눔 근처에서 일어난 크라수스와 스파르타쿠스의 대립이다. 여기서 그는 반역자들 뒤에서 책략을 짜는 뭄미우스에게 두 군대를 주고 그에게 노예들에게 교전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뭄미우스는 불복종하여, 두 군대를 완패시키고 말았다. 크라수스는 이것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간신히 이겼다. 비록 로마인 피해자들이 많기는 했지만 말이다. 크라수스는 이 전투 후에 대량으로 죽였다고 보고했다, 비록 역사학자마다 각기 다른 대량학살된 로마인들의 수가 많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것 또한 이 전투 후에 아피아는 3000 군단의 병사가 포로에 의한 반역자들이 힘 있게 싸우고 검투사답게 죽었다고 기록했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피세눔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진 후에, 그를 수송시키라고 해적과 협상했고 그를 시칠리아에 데리고 갔다. 하지만 그는 일의 경과 중 그들을 배신했다. M.J. 트로우와 같은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크라수스가 배신의 요소에 진저리가 났을 것이고, 스파르타쿠스가 제의했던 것보다 더 액수가 컸다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그러자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는 레기움에서 퇴각 강행군을 했고, 그 곳에서 그들은 포위되어 이탈리아 반도의 발가락의 위에서 아래까지 있는 로마인에 의한 "휴먼월(Humanwall, 인간의 벽)"에 굶어죽었다. 그 후, 카스투스와 간니쿠스하에 있던 반역자들 중 일부는 휴먼월을 통해 깨뜨릴 수 있었고, 도망갔지만 끝내 죽거나 로마군의 작전에 의해 격파되었다-스파르타쿠스는 레기움에서 80킬로미터 북동쪽으로 떨어진 곳에서 로마 군대와 만나 마지막으로 그의 온 힘을 다해 군대에 저항하다가 패배했다. 스파르타쿠스의 저항은 이 싸움에서 완벽하게 완패를 당한 것이다. 

 한편 폼페이 역시 전쟁에 참가하여, 퀴니투스 세르토리우스에 의한 반역을 정복한 후 스페인에서 돌아왔다. 이것이 화제에 오르는 동안 나는 폼페이와 카이사르가 절대 카이사르의 임기기간이 사실상 3년 더 길다는 것으로 스페인에서 만날 기회에 넌더리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폼페이는 스파르타쿠스의 반역자들의 나머지를 살육하거나 포로로 잡지도 않고 완벽한 반역군으로 파괴시켰다. 

 그 여파로 인해 폼페이와 크라수스 둘 다 잇따르는 해인 기원전 70년에 영사에 선출되었다. 약 6000명의 포로들이 로마에서 카푸아의 아피아 길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그리고 이야기에 따르면, 반역자들의 몸이 그들의 다른 노예들에게 죽을 거라고 경고한 것이 훨씬 후에도 십자가에 남아있다고 한다. 하여간 그것은은 이것(이 사건, 즉 3차 노예 전쟁-필자) 때문에, 로마에서는 다시는 또 다른 노예의 반역이 없다는 것이 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로마인들이 많이 시도하려고 했던 일이 아니며, 그들이 스파르타쿠스의 몸을 찾지 못했다는 것도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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