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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하지 않으면 떠날 수 있다 - 나를 찾아가는 사랑과 희망 여행
함길수 글.사진 / 터치아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터치아트에서 출판된 책은 그간 상당수 만나왔다. 만나왔던 책들은 여행관련 서적이라도 큰 공통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정보위주의 책이라는 점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만난 여행작가 함길수님의 <소유하지 않으면 떠날 수 있다>는 여행에세이라는 내용에 지극히 부합하는 그런 책이었다. 터치아트에서 의외성이 보이니 더 새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요 며칠 밤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방문한 오래된 친구를 대접하느라 분주했다.
첫날은 민물매운탕과 술 한잔을, 둘째날은 거한 점심을, 마지막 날 밤에는 커피 한잔과 함께 따뜻하고도 일상적인 대화를 함께 했다.
이 친구는 베트남에서 생활기반을 가지고 있는 20년 지기인데...몇 년에 걸쳐서 한번씩 한국에 나오면서 또 친구들을 만나러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방문하곤 했다.
올 여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중에 한 곳, 혹은 두 곳을 여행계획하고 있던 차, 친구에게 궁금한 내용을 물어보기에 바빴다.
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 라오스는 책이나 사진에서 느꼈던 그 느낌 그대로 이 친구 입을 통해서 생생하게 전달받을 수 있었고, 베트남의 가치관, 영리함, 예의범절은 비록 경제적으로는 우리에게 뒤쳐진 나라이지만, 우리의 옛모습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고도 맞춤한 나라였다.
캄보디아는 앙코르와트 만으로도 매력적인 나라가 아니겠는가....
친구는 중국인들이 대거 몰려오고 있다며, 조용하고 소박하고 아름답기만 이들 나라들이 그 모습을 잃을 날도 멀지 않은 거 같으니 오려거든 속히 오라고 연신 채근질이다.
20여 년간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낸, 삶을 만들어낸 작가는 미국, 유럽, 남미, 호주와 뉴질래드 등 모든 나라가 아름답고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지만, 아시아의 오지 및 아프리카의 가난한 시골 마을들에서의 추억이 가슴 설렌다고 말해준다.
그래서 다시 꼭 가보고 싶은 나라들도 에티오피아, 케냐, 수단 ,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그 고백 뒤에 숨어 있는 저자의 마음들을 바로 이 책 한 권에 담아 놓고 있다.
이 책에는 '아낙'이라는 말이 나온다. 얼마 만에 접해 보는 고운 우리 말인지.
언젠가부터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단어들은 소박하고도 진실했던 우리말이 아니다. '아낙'도 '미시'라는 말로 대체된 지 오래이다.
'아낙'이란 말에서 느껴지는 정감어린 풍부한 정서는 이제는 느껴보질 못한 사어의 세계가 되어버릴 것인지.
문득 베트남 친구의 개인홈피에서 발견했던 '아낙'이란 표현이 생각났다. 베트남에서 사귀었던 여친을 표현하는 말에 '옆집사는 아낙'이라는 말이 있었다.
사용하는 단어도 그 사회의 정서와 문화를 반영하기라도 하는 양, 이렇듯 베트남에 가면 우리의 잃어버린 사어를 만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 아낙 : 명, 아낙네(남의 집 부녀자를 통속적으로 이르는 말).
소유하지 않으면 떠날 수 있다.
늘 타인의 삶과 비교되면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잠시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떨치고 떠나는 연습은 진정 필요한 일이다.
자꾸만 끌어안고 당기고 품어안아도 여전히 빈손이기만 한, 그래서 늘 허기진 도시문명의 삶의 연속선에서 우리는 떠날 수 있는 용기를 내어야만이 지금 나의 삶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떠남으로써 진정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는 것. 비워내야만 내 안을 새로운 기쁨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것.
해서 돌아올 때, 좀 더 나은 나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을 가지는 것.
저자가 카메라 앵글로 잡아낸 행복한 얼굴들, 아늑해지는 풍경들, 그들을 접하며 속도만이 미덕인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피폐해졌던 나의 일상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순간이다.
라오스, 네팔, 에티오피아,수단, 인도, 케냐, 보츠와나, 짐바브웨, 이집트, 탄자니아, 베트남, 캄보디아
단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이국의 나라들. 그 나라들의 한적하고도 호젓한 풍경들이 이토록이나 편안한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
인류의 시원은 마치 그러한 듯. 먼 옛날 나의 조상들로부터 이어지는 나의 뿌리를 만난 듯....아늑해지는 느낌은 잠시 행복감에 젖게 만든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건만, 이젠 과거에는 당연했던 인간사회의 도덕률이나 가치들이 자본의 힘에 밀려 땅에 떨어져버린 현실속에서 이 책의 저자가 말해주는 따스한 한 사회의 풍경들은 그래도 이 땅 위에 희망이 남아 있음을, 그리고 다시금 우리의 지난 날을 돌아보게 해주는 힘이 있다.
화려한 네온싸인이나 어마어마한 건축물, 혹은 세련된 모습의 사람은 단 한 컷도 나오지 않지만, 각각의 사진들은 그들만의 깊이로 가슴에 각인되는 근사한 매력이 있다.
소박하면서도 행복한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의 환한 미소를 통해 저자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그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싶은 2011년 1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