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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평점 :
목화솜보다도 더 큰 눈송이가 하늘에서 뚝뚝 날리던 날이 엊그제 같이만 느껴지는데, 계절은 느리지만 꾸준히 변하고 있었다.
봄이다.
왠지 몸이 나른해지고, 늘어지는 가운데, 따뜻해진 햇살이 나를 꾸욱꾸욱 누르며 어디론가 움직여 보고픈 충동을 스멀스멀 부채질하고 있다. 그렇게 움직임을 통해 나른함을, 늘어짐을 이겨내고 싶은 오늘, 타오르는 불꽃에 석유를 붓는, 헤매는 방랑자에게 지도를 쥐어주는 느낌의 책을 만났다. 바로 <굴라쉬 브런치>이다.
브런치는 알지만 굴라쉬를 몰랐다. ‘동유럽 독서 여행기’라는 부제를 보았지만 정확히 동유럽에 속하는 나라를 알지 못했다. 모르는 것 투성이인 상태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해서 참 다행이었다.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었기에 나는 깨끗한 백지에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시켜 나가듯 그녀의 여행을 마음에 그려낼 수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수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프롤로그를 읽으며 ‘지루하지는 않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여행기를 읽으며 지루할 수가 있지?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있다.
여행을 하면서도 지나치게 철학적인 사람이, 여행을 하는건지 공부를 하는건지 심히 알쏭달쏭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분명히 있다. 그런 사람이 여행 이야기를 하면 듣는 사람 역시 똑같은 상황에 빠지게 된다. 내가 지금 여행책을 읽는건지, 철학책을 읽는건지. 아니면 여행을 하는건지, 공부를 하고 있는건지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그런 책을 읽다가 나는 정말로 잠이 든 적이 있다.
또 다른 지루한 여행기는 분명 ‘여행기’라 이름 붙었음에도 ‘사진집’인가 의심하게 만드는 경우였다. 청각보다 시각이 먼저 반응하는 느낌. 너무 많은 이미지를 제공하여 눈이 피로하고, 따라서 마음도 피로하게 한다. 누구나 다 가는 장소에서, DSLR지만 오토로 맞춰놓고 찍은 듯 느껴지는 사진과 그 사진에 대한 설명인 듯한 글이 이어지는 여행기는 한숨과 함께 순식간에 끝나 버린다. 네가 여행을 다녀왔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이런 것은 네 블로그에나 올리는게 어떻겠냐...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어진다.
이 책 <굴라쉬 브런치>의 그녀는 지루할 틈이 없는 사람이다. 할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많은 사람이고, 더불어 상식과 읽은 책, 본 영화 또한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도시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찾아 섭렵하며, 마치 오래전부터 여행을 준비해온 사람처럼 각각의 도시에 맞는 시의적절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고 있다.
젠장. 너무 멋있잖아?
이런 사람은 연인이 아니라 스승으로 삼고 싶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지옥불에 뛰어들어서라도 구해와 내 머릿 속에 담고 싶어요~
질투와 존경의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정신줄을 잡고 시크하게 내뱉는다.
오, 이 책... 완전 내 취향인데? (쳇, 어느 부분이 시크란 말이더냐!!)
나는 여행기에서 너무 깊지도, 또 너무 얕지도 않게 인생을 말하는 걸 좋아한다.
여행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깨달을 수 있는 인생의 묘미를 마치 나에게만 조곤조곤 속삭여 주는 것 같은 글솜씨도 좋다.
“ 그런데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은 곧 삶에 대한 애착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산다는 게 허기를 채우는 것과 다를 게 뭐냐 싶다. 여행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관계를 맺는 것도 결국은 서로 다른 종류의 허기를 채우는 일이 아니겠는가. ” (p60)
“ 약간의 알코올과 단백질로 금세 원기가 회복되었다. 이렇게 사는 건가 보다. 미쯔꼬처럼. ” (p131)
여행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그 비밀스러움과 우연의 상황들을 함께 하는 즐거움도 좋았다. 일상 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선함, 나를 위해 나타나 준 거라 느껴지게 곳곳에 숨어 있는 천사들을 만나는 기회,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일탈의 짜릿함 등은 여행을 통해서만 배우고 경험하는 행복이다. 내가 한 경험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여행에서 같은 감정을 발견하면 왠지 모를 공감대가 형성되고, 세상 속에서 내 편 하나를 발견한 기쁨마저도 느낄 수 있다.
“ 여행자는 행동 하나하나에 온 마음을 담아 집중한다. 세상에서 제일 사소한 일을 최고로 진지하게 해낸다. ”
이 부분을 읽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맞아, 그래. 여행자란 그런 존재야. 그 최고의 진지함을 가지고 길을 헤매는 존재지.
여행지에서 헤매임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어디어디에서 살짝 옆길로만 빠졌어도, 호기롭게 도와주는 누군가의 설명을 제대로만 이해했어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텐데, 그 ‘ 한끗 차이의 어긋남’으로 인해 갈 곳을 잃고 헤매는 일이 발생한다. 하지만 지도에 표시된, 누군가가 이미 경험한 여행을 통해 알려준 그 곳만이 최적의 장소, 최상의 맛집이 아니라는 것을 저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히려 ‘누군가의 기억’과 똑같은 여행이 아니라 ‘나만의 새로운 추억’을 만드는 여행으로 승화시키는 여행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고 있었다.
그녀와 공유하는 여행의 즐거움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책이 점점 더 마음에 드네.
덧붙여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바로 여행지와 관련된 ‘책’과 ‘영화’ 에 대한 이야기다. [이라크 : 빌려온 항아리]란 책과 저자 ‘슬라보예 지젝’의 모국, 슬로베니아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이 그녀를 여행길로 몰아낸 계기가 되었다.
프란츠 카프카, 보후밀 흐라발이 살았던 체코, 그 속의 프라하. 영화 <이터널 선샤인>, <판타스틱 소녀 백서>, 작가 메레 오펜하임을 떠오르게 만든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 작가 슬라보예 지젝이 살았던 슬로베니아, 그 속의 블레드. 도시는 사람을 만들었고, 사람은 책을 짓고, 영화를 만들고, 이야기를 만들어 다시 사람을 끌어들인다.
다른 사람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 외에, 이 책? 나도 읽어봐야지, 이 영화? 나도 찾아서 봐야지. 하며 지식과 정보까지 탐하며 욕심내게 될 줄은 몰랐다.
동유럽 3개국을 떠돌며 아름다운 도시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만으론 부족한지 그 안에 숨어 있는, 이미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작가와 영화까지 우리에게 소개하는 만행(?)을 스스럼없이 저지르고 있다.
이건 더 지독하다.
벚꽃이 피고, 목련이 피고, 진달래, 개나리, 산수유가 피어나 세상이 알록달록 아름다워지는 이 계절에 나는 <굴라쉬 브런치>를 통해 ‘쪽방 하나 얻어 한 1년쯤 불법 체류자로 살고 싶어지게 ’ 만든다는 프라하, 베르메르의 울트라마린 색을 닮아 애간장타게 만드는 두브로브니크의 바다, 동유럽의 알프스라 불린다는 블레드, 골목길, 트램, 자전거, 책, 영화...... 손에 잡힐 듯한 그 곳의 잔재에 파묻혀 신음하고 있다.
아~ 떠나고 싶구나.
내 마음 속에 봄바람을 불어 넣어주고 슬그머니 이탈리아로 떠난 그녀가 한없이 미워지는 봄볕 따사로운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