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고양이 눈 - 2011년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최제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에 신인작가 “최제훈”의 첫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에 대한 나의 서평을 읽어보니 “막 데뷔한 작가의 글 솜씨가 어찌 이리 서툴거나 미흡한 기색 하나 없이 절묘하면서도 재미가 있는지”, “놀랍고 기발한 상상력으로 우리들을 즐겁게 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 에 비견”,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능수능란하게 고전들을 재해석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작가가 등장했다는 것은 분명 모두가 반길 그런 일대 사건”라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칭찬 일색이었다. 내 평이 호들갑스럽기는 했지만 읽고 나서 지인(知人)들과 인터넷 카페 이웃들에게 열심히 권했던 것을 봐도 꽤나 인상적이었던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서평에서는 “그가 보여줄 다음 작품들이 얼마나 나를 놀라게 하고 즐거워하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고 끝을 맺었는데, 드디어 그의 “다음 작품”을 만났다. 바로 <일곱 개의 고양이 눈(자음과모음/2011년 1월)>이 바로 그 책이다. 반가운 마음에 읽고 있던 책을 내팽개치고 집어든 이 책, 우선 이번만큼은 좀 냉철(?)하게 읽고 비평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첫 장부터 눈길을 사로잡아 앉은 자리에서 꼼짝없이 다 읽게 만드는 이 책, 처음 마음가짐은 온데 간데 없고 다 읽고 나서도 몇 번을 다시 표지를 쓰다듬고 책 내용을 들춰 보게 만드는 것을 보면 결국 “비평”은 실패하고 말았고, 지금부터 써 내려가는 서평은 다시 한번 호들갑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책은 네 편의 중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한편 한편이 독립된 형식이 아니라 서로 연계되어 있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실린 <여섯번 째의 꿈>은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소재인 고립된 지역에서의 연쇄 살인 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대표적이다 - 을 다루고 있다. 연쇄살인에 대한 정보 교환 인터넷 동호회인 ‘실버 해머’ 회원 6명이 카페 주인 “악마”의 초대로 산장에 모이게 된다. 6명은 역사상 유명했던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악마”를 기다리는데, 눈보라가 휘몰아치면서 산장은 점점 고립이 된다. 다음날 아침, 남자 회원이 자신의 방에서 머리에 둔기를 맞아 시체로 발견되고, 그와 말다툼을 했던 여자 회원이 꿈 속에서 그가 죽는 장면을 보았다는 알쏭달쏭한 말을 내뱉으면서 살인자로 몰려 자신의 방에 감금당한다. 오겠다던 “악마”는 나타나지 않고 날씨는 더욱 험악해지고, 설상가상으로 자신들이 몰고온 차들이 전부 배터리가 방전되는 사고가 발생하자 회원들은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다음날 감금당했던 여자 회원도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남은 네 명은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극단적인 불신에 휘말리게 된다. 두 번째 작품 <복수의 공식>에서는 앞선 작품에 등장했던 6명의 인물들이 화자(話者)로, 또는 복수의 대상이 되는데 앞서 언급했던 각각의 사연들과는 조금씩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 번째 작품 <파이(π)>에서는 첫 작품 <여섯번째 꿈>이 일본 단편 추리소설로 등장하고 이 작품의 번역을 의뢰받은 번역가 “M"에게 신비의 여인이 찾아와 같이 동거하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네 번째 작품이자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서는 화자인 ”나“가 도서관 서고에서 우연찮게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이라는 미스터리 소설을 발견하여 읽게 되고, 연체한 책이 있어 이 책을 빌리지 못하고는 자신 또한 망막을 다쳐 한 달 여를 앞을 못 보게 되자 다 읽지 못한 책 속의 단편 <폭우>편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구현해 내 우리들에게 들려준다. 눈 치료가 끝난 후 자신이 상상했던 이야기의 결말을 확인하고자 도서관에 다시 들렸지만 책을 찾아내지 못하고 만다.  

   이처럼 각 편이 독립된 중편임에도 서로 고리처럼 연결되어 전체 이야기를 엮어내는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는 이 책은 각 편에서 끝맺음을 한 이야기들이 다음 편에서는 다시 각색되어 다른 이야기로 전개되고, 마침내 이 책 자체가 책 속의 책으로 등장하는 등 다 읽고 나면 책 속에서의 허구와 실재 경계가 절로 모호해지고, 말하는 이(話者)도 같은 작품에서 여러 번 바뀌는 점들이 일견 혼란스럽게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책 표지 그림의 남자가 쓰고 있는 안경인 “뫼비우스의 띠”나 입 모양이자 세 번째 제목이기도 한 “파이(π)”가 무한수로 이뤄진 것처럼 무한 반복되는 구조라고나 할까? “각각의 고유한 개성을 간직한 중편 네 개를 커다란 틀 안에서 하나의 장편으로 승화” 시켰다는 홍보 문구처럼 개별 단편으로서도, 네 편을 아우르는 전체 이야기 얼개에 있어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면서도 색다른 재미가 책 읽는 내내 몰입하게 하고 다 읽고 나서도 쉽게 책장을 덮지 못하고 책을 계속 펼쳐보게 만들며, 마지막 편에서 책을 읽을 때마다 그 내용이 달라지는 신비한 책인 <일곱개의 고양이 눈> 처럼 이 책을 책꽂이에 꼽아두고 나중에 다시 읽게 된다면 처음 느낌과는 전혀 다른 재미가 느껴질 것 같다는 기대감마저 갖게 만든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와 유사한 구조의 다른 작품 하나가 계속 머릿 속에 맴돌았다. 책 속에서 등장하는 단어인 일종의 “기시감(旣視感)”이라고 할까? 바로 일본 추리 소설의 대표 주자인 “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었다. 책 속의 책으로 등장하는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 얽힌 네 개의 중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도 “바깥”의 삼월(실재)과 “안쪽”의 삼월(허구)의 경계가 허물어져 어디까지가 실재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워 마지막 장에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무한 반복하게 되는 “삼월”로 다시 빨려 들어가는 그 느낌이 묘하면서도 색다른 재미를 주어 온다 리쿠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이번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삼월은~>과 같은 몽환적인 구성을 취하면서도 그 재미나 완성도 면에서는 요새 유행하는 말로 “종결자(終結者)”라고나 할까? 전작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에 비견되었다면 이번 작품은 “온다 리쿠”에 비견된다고 평가하고 싶다. 물론 유명 작가 누구와 비교된다는 그런 평을 작가는 싫어할 수 도 있겠지만^^ 다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명확한 서사(敍事) 구조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호불호(好不好)가 나뉠 수도 있을 것 같다. 

  유례를 쉽게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장르 실험, 한 편 한 편 독립적인 재미가 충분하면서도 전체가 어우러지면 그 재미가 배가(倍加)되는 이번 작품은 이제 더 이상 신인작가 “최제훈”이 아닌 “일가(一家)”을 이룬 기성작가 “최제훈”으로 평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완성도와 재미가 탁월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이어 또 한 명의 “전작주의(全作主義)” 작가가 될 최제훈 작가의 이번 작품 서평도 아무래도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말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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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1. 아주 오래된 농담 - 개정판(박완서/실천문학사/2011-01-26) 

 

지난 2011년 1월 22일 문학계의 큰 별이신  박완서님께서 별세하셨다. 그동안 참 깊이있는 문장으로 사람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보여주셔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던 분이라 그 슬픔이 더 크다 하겠다. 그분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주 오래된 농담"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첫 출간년도가 2000년이라 많은 분들이 읽었겠지만 박완서님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다시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2. 붉은 엄지 손가락 지문(리처드 오스틴 프리먼/시공사/2011-01-24) 

 

애거서 크리스티, 도로시 세이어즈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작가로 손꼽히는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의 1907년 작으로  CSI의 원조, 최초의 과학적 탐정으로 평가받는 인물인 "손다이크 박사"가 처음 등장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추리소설 매니아인 나로서는 눈이 번쩍 뜨일만한 작품이다. 최근 신경향 추리소설이 많이 출간되고 있지만 고전 추리소설을 읽어보는 재미와 감동을 이 책을 통해서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3. 숏버스(조너선 무니/부키/2011-01-21) 

 

읽기장애(난독증)를 이겨내고 명문 브라운 대학을 졸업한 이후 장애 극복의 표본이 되어 활동가로, 강연자로 살아가고 있는 저자 조너선 무니가 숏버스를 타고 미국 전역을 다니며 '비정상' 딱지가 붙은 사람들을 만난 이야기이다. 장애는 불편할 뿐 결코 불행이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잊고 사는 "정상인"들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교훈적인 책일 것으로 기대가 된다. 

4. 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제스 윌터/바다출판사/2011-01-18) 

 

타임」지 선정 2009년 10대 소설. 전 세계를 강타한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경제 위기에 처한 미국의 몰락하는 중산층을 다룬 소설로 결코 어둡지 않은, 오히려 '가장 웃긴 올해의 책'(「타임」)이라는 평을 얻을 정도였다니 유쾌하고 재미있는 책일 것 같다. 

5.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시라이시 가즈후미/레드박스/2011-01-12)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이라는 나오키상 142회 수상작. 주로 연애소설을 쓴 작가의 작품 특징은 섬세하고 차가운 여성심리, 현대인의 특징인 냉소와 우울, 가슴을 후벼파는 대사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데, 과연 어떤 재미와 감동을 줄지 이 책으로 확인해보고 싶다. 

 

역시나 1월에도 읽고 싶은 책들이 잔뜩 출간되서 선정하는 데 꽤나 애먹었네요^^ 제가 추천한 책 들중에서 선정되길 바래보지만 과연 어떻게 될지^^ 3월 발표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2월에도 재미와 감동이 가득한 책들과 만나시는 행복한 한달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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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거짓말 - 카네기 메달 수상작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10
제럴딘 머코크런 지음, 정회성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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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럴딘 머코크런의 <새빨간 거짓말(원제 A Pack of Lies / 미래인 / 2010년 11월)>을 받고서 색상을 표현하는 수많은 단어 중에서 왜 거짓말에는 “새빨간”이라는 말이 붙을까 하는 엉뚱한 궁금증이 들었다. 그래서 궁금증의 해결사로 가장 각광받는 “네이버 지식in"을 검색해보니 역시 정답이 나왔다. 네이버 ID “omgg님”의 답변에 의하면 영어에도 black lie (악의적인 거짓말), white lie (선의의 거짓말)라는 표현이 있듯이 "색채어 + 거짓말"의 표현은 만국 공통으로 사용되는 걸로 보여진다. 우리말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고 마구 사는 상놈과 체면 차리고 점잔 빼는 양반'이라는 뜻으로 '빨간 상놈 파란 양반'이라는 말 - 사실 난 처음 들어봤다 - 이 있다고 하는데 이처럼 빨간색에는 강렬하게 눈에 확 드러남, 눈에 잘 띈다는 속성이 있어서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면 '눈에 띌 정도로 터무니없는 온통 거짓말'이라는 의미가 된다고 한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골동품에 얽힌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즉 ‘새빨간 거짓말’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골동품 가게 “포비 골동품점”을 운영하는 소녀 “에일사”는 동네 도서관에서 의문의 청년인 “MCC 버크셔”를 만나게 된다. 에일사는 갈 곳이 없는 떠돌이인 그에게 자신의 골동품점에서 사람이 필요하니 사장이신 어머니 “포비” 부인에게 가보라고 이야기하고, 어머니는 돈벌이가 시원찮아 사람을 부릴만한 여유가 없다고 거절하지만 버크셔는 잠자리만 제공해준다면 무보수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설득해서 결국 가게에 머물게 된다. 가게 구석진 곳의 낡은 철제침대에서 잠을 청하며 오래된 책에 열중하며 빈둥거리는 버크셔는 전기요금조차 낼 돈이 없는데도 물건 판매 대금으로 벼룩시장에서 책들을 가득 사오는 민폐까지 끼치면서 이 처치 곤란한 남자에 어머니는 골머리를 앓게 된다. 그런데 그의 진가가 곧 드러나게 되는데, 바로 골동품 가게에 들린 고객에게 골동품에 얽힌 기막힌 사연을 들려주어 사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그의 유창한 말솜씨였다. 그런데 과연 그가 이야기하는 골동품에 얽힌 사연들은 과연 진실일까? 버크셔는 거짓말이 아니냐라고 묻는 포비 부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픽션, 즉 허구이지요. 내가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것, 모든 사람이 내게 원하는 바로 그 허구란 말입니다, 부인. 요컨대 꾸민 이야기지요. 

거짓말이나 허구(虛構), 똑같은 뜻이니 일종의 말장난 같은 위의 말처럼 그가 늘어놓은 말들은 하나같이 거짓말, 그것도 제목처럼 “새빨간 거짓말”인 셈이다. 그런데 손님들에게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는 그의 거짓말들이 골동품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여서 손님들은 그의 말솜씨에 홀딱 반해 자기도 모르게 물건을 구입하게 된다. 지금 당장 문을 닫아도 전혀 이상할 것 없던 포비 골동품점은 버크셔 덕분에 형편이 나아지고 사고친 줄 알았던 벼룩시장에서 구입한 책들에서 전 주인이 감춰진 뭉칫돈이 발견되면서 오히려 화(禍)가 복(福)이 되는 큰 행운까지 얻게 된다. 그러나 결국 모녀의 만류에도 버크셔는 가게를 떠나버리고 포비부인은 과연 그가 늘어놓은 거짓말들이 정말로 거짓일까, 사실은 진실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한다. 과연 버크셔의 이야기들은 사실일까? 거짓말일까? 

이 책은 신비로운 입담꾼 MCC 버크셔와 에일사 모녀 만남을 주된 이야기 축으로 하고, 버크셔가 들려주는 11가지의 골동품에 대한 사연을 소개하는 일종의 액자소설 형식을 띠고 있다. 골동품에 대한 한편 한편의 사연이 마치 <전설의 고향>에서의 구전설화(口傳說話)처럼 기막히고 신비로운 이야기들이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한데, 이 책의 백미(白眉)는 역시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놀랍다, 충격적이다”이라고 평하고 있는 결말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거짓말이라고 의심하는 포비 부인처럼 새빨간 거짓말로만 생각되던 버크셔의 이야기들이 골동품에서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증거들이 하나씩 발견되면서 점점 허구와 실재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결말에서 버크셔의 정체가 밝혀지는 장면은 다 읽고 나서 한동안 멍한 기분이 좀처럼 쉽게 가시지가 않았을 정도로 꽤나 인상 깊었다. 독자의 마지막 호흡까지 놓치지 않는 작가의 글솜씨 때문에라도 이 책이 카네기 메달, 가디언 상을 석권했다는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소설이지만 성인인 내가 읽어도 전혀 유치하거나 어색함이 없는 재미를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연령에 상관없이 누구나 부담 없이 재미있게 읽을 만한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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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발레리 통 쿠옹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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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이휘재”를 오늘날 인기 MC 자리에 오르게 했던 “인생극장”이란 프로그램을 참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선택의 기로에서 이휘재가 “그래, 결심했어!”라고 외치면 화면이 양분되면서 그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를 보여주는 형식이었는데, 우리가 일상 중에서 종종 하게 되는 “과연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 어땠을까?”하는 궁금증을 대리 만족시켜주는 그런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상상이 방송용 소재이겠거니 했는데 이미 SF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자주 사용되었던 소재이며 과학적으로도 이와 관련한 “다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 또는 “평행우주론(平行宇宙論, Parallel World)"이란 이론이 존재한다고 한다. “양자역학”, “우주파동함수이론” 등 문과생(文科生)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론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이 이론들을 간단히 말하면 모든 사건에 대해 가능한 모든 결과들이 각자의 "역사" 혹은 "세계"에 실재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즉 내가 지금도 종종 하는 후회, 고3 때 담임선생님 충고대로 눈높이를 낮춰서 지원해서 재수(再修) - 재수 시절 참 많은 방황을 해서 결국 고3 때 지원했던 대학보다 낮춰서 지원하게 되었다 -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후회처럼 다른 우주에서는 재수하지 않고 고3때 곧바로 합격한 또 다른 “나”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우주에서는 나와 연관된 주변 사람들도 결국 내 선택에 따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면 그만큼 내 삶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닌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엉뚱한 교훈(?)을 새삼 깨닫게 된다. 발레리 통 쿠옹의 <운명(원제 Providence/비채/2010년 11월)>은 이처럼 한 사람의 선택이 여러 사람의 운명에 마치 도미노처럼 연속으로 영향을 미쳐 인생 자체를 송두리째 바꿔 놓는 기막히면서도 교훈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한 남자가 지하철에 투신하면서 기차가 멈춰서버린다. 회의 시간 전에 중요 서류를 상사에게 전달해야 하지만 기차 사고로 늦어버린 비서 “마릴루”는 이번에는 성질 고약한 상사에게 짤리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데, 오히려 늦게 도착한 덕분에 회사에서 발생한 폭파사건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알베르 푄”은 자신의 여동생과 조카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기 위한 유언장 공증을 위해 공증사무소를 향하지만 지하철 사고로 인한 교통 체증으로 그만 늦게 도착하면서 먼저 도착한 가족들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를 우연찮게 듣고 충격을 받게 된다. 유능한 변호사이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2인자에 머물러야 했던 “프뤼당스”는 식중독에 걸린 오너 - 알베르가 양보한 음식을 먹고 걸렸다 - 대신 참석한 회의에서 멸시를 당하고 병원에 입원한 오너를 찾아오는데, 폭파사건으로 입원한 마릴루를 만나게 되고 그녀가 전달하려고 했던 중요 서류, 즉 자신을 멸시한 고객의 부정이 담긴 서류를 건네받게 된다. 영화 제작자이자 교수인 “톰”은 애인인 “리비”의 집에서 나와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프뤼당스 대신 오너의 애완견 산책을 나선 “클라라”와 부딪혀 사고를 당해 애인 집으로 돌아왔다가 애인의 실체를 목격하게 되고 자전거 사고 상처가 심해져 마릴루가 입원한 병원으로 오게 된다. 한편 당초 가족들에게 전부 상속하기로 했던 유산 상속을 전면 변경하겠다고 선언한 알베르는 자신의 암 진단이 사실은 오류였다는 전화를 받고 역시 마릴루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된다. 이렇게 전혀 연관이 없는 네 사람이 지하철 사고를 계기로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고, 병원에서 서로 인연을 맺게 된다.  

 지하철 투신을 시도했던 남자 - 다행히 죽지는 않고 역시 그도 같은 병원에 입원해서 네명의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 가 투신하지 않았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마릴루는 시간내에 서류를 전달했겠지만 폭파사고로 죽었을 것이고, 알베르는 공증사무소에 제 시간에 맞춰 도착해서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가족들에게 전 재산을 상속한다는 유언장의 공증을 마쳤을 것이고, 프뤼당스는 오너의 개 산책길에 나서면서 고객의 비리가 담긴 서류는 구경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며, 톰은 방정맞은 클라라 대신 개를 끌고 나온 프뤼당스와 자전거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사고 하나가 네 명의 주인공들 - 책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의 인생 또한 바뀌었을 것이다- 의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기막힌 상황은 각자에게는 일견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 - 해고(마릴루), 출생의 비밀(알베르), 모욕(프뤼당스), 배신(톰) - 으로 전개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에게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게 된다. 책 중반까지 각 주인공의 시점이 교차되면서 전개되는 옴니버스식 구성이 다소 산만해서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중반 이후 각자가 겪게 되는 시련의 정체가 밝혀지고, 각자의 이야기가 “병원”이라는 장소로 귀결되면서 각자의 인과관계가 밝혀지는 결말에 이르러서는 마치 추리소설의 반전을 보는 것처럼 기막힌 재미를 느껴볼 수 있었다. 또한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어찌 보면 서양식 종교관이나 가치관보다는 불교(佛敎)의 “인연(因緣)”설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데 작가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아 그 연관성은 파악할 수 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로 인해, 아주 사소한 결정으로 인해 삶의 패가 좋게 바뀌는 경험이 일어나곤 합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인생이 때로는 놀라운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끔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요.” 

는 작가의 말처럼 누군가의 사소한 선택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이처럼 송두리째 바꿔 놓을 수 있다면 - 물론 이 책에서처럼 해피엔딩일 수 도 있고, 아니면 비극(悲劇)일 수 도 있어 그 결말을 장담할 수 는 없겠지만 -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 선택에 따라 또 다른 우주가 생성된다는 거창한 이론까지는 비약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선택에 있어서 더 신중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작가가 들려주는 교훈에 모두가 다 공감할 수는 없겠지만 주인공들이 겪는 기막힌 인생 역전(逆轉) 만으로 충분한 재미와 감동을 주는 이 책은 누구나 부담 없이 재미있게 읽어볼 만한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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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온다 리쿠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내가 “온다 리쿠”를 처음 만난 건 <삼월은 붉은 구렁을(三月は深き紅の淵を)>였다. 일본 추리 소설 붐이라 그녀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지만 나만의 여성 작가 콤플렉스 - 여성 작가 작품들은 별로일 것이라는 일종의 편견이다. 이 편견을 처음 깬 작가가 역시나 일본 작가인 “미야베 미유키”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다가 워낙 입소문이 대단했던 <삼월은~>을 읽고서는 “왜 그녀를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들 정도라고 서평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삼월은~>의 연작들을 모두 읽어볼 요량으로 책을 샀건만 다른 책들을 읽느라고 책꽂이에 고이 모셔두고는 아직도 읽어보지 못하고 있어 아쉬움마저 들었는데 최근에 <삼월은~> 시리즈가 아닌 그녀의 다른 책을 읽게 되었다. 그녀의 첫 번째 본격 호러라는 평을 받고 있다는 <우리 집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원제 私の家では何も起こらない/노블마인/2011년 1월)>이 바로 그 책이다. 220 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이기도 하지만 뒷골이 서늘할 정도로 무서우면서도 몽환적인 아름다움이 꽤나 인상적이어서 금세 읽게 만드는 강한 흡입력으로 “역시 온다 리쿠!”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책이었다.  

  책의 배경은 표지처럼 언덕 위의 오래된 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환한 보름달 아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이쁜 집, 서로 껴안고 있는 토끼와 눈과 팔이 그려져 있는 잼 유리병, 주전자, 찻잔, 나이프, 가위, 쇠스랑이 그려져 있는 표지만 보면 그저 예쁘다는 느낌만 드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표지 그림 하나하나가 섬뜩하기 그지 없는 그런 아이콘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림 책에서나 나올 법한 언덕 위의 이쁜 집, 오랜 풍상을 거쳤음에도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이 집의 정체는 바로 “유령의 집”이다. 처음 이 집을 지은 주인은 아내와 아들을 잃고 자살 했고, 사이좋은 자매는 사과 파이를 굽다가 서로를 칼로 찔러 죽이고,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눈 먼 주인을 모시는 여자는 아이들을 납치해 토막 내서 잼 유리병에 담아 지하 창고에 보관해 놓고는 주인에게 먹이며, 독거노인들을 골라 연쇄 살해하던 소년은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들 앞에 나타나 자살하게 만든 존재가 바로 이 집 지하창고에 살고 있는 유령 소녀임을 알고는 그녀 앞에서 자살하고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이처럼 이 집에서 죽은 유령들은 이 집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집에 머물게 되고, 덕택에 유령의 집으로 명성(?)을 얻게 되면서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서 이것저것 묻기도 한다. 최근에는 소설가가 새로운 주인이 되고, 집수리를 맡게 된 일꾼들 앞에 이 집에 거주하고 있는 유령들이 떼를 지어 나타나지만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오히려 새롭게 단장하려는 좋은 의도임을 알고는 눈에 잘 안 띄는 파손 부분을 일러주는 등 적극적으로 집수리를 도와주고, 일꾼들의 돈을 떼어 먹으려는 악덕 부동산 업자를 혼내주기도 한다. 

  여름만 되면 공중파며 케이블 TV며 납량 특집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흉가(凶家)”가 주 소재인 이 책은 집에서 벌어진 사건들 - 자살, 존속 살인, 아동 납치 살해, 식인 등 -을 뜯어보면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사건 일색 - 다 읽고서 잠자리에 들면서 책 내용을 상기시켜보니 꿈자리가 뒤숭숭해질 것 같아 얼른 생각을 멈췄다 - 인데도 책을 읽고 난 느낌은 무섭기보다는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처럼 몽환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아마도 이 집이 겪어온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추억- 물론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그런 추억 - 들을 이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과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하나 하나 들려주는 목소리 톤이 여느 공포 소설들처럼 귀청을 쩌렁 쩌렁 울리는 경기(驚氣)을 일으킬 만큼 그런 소리가 아니라, 마치 그 어떤 “존재”가 내 귓등에서 들릴락 말락 조용한 목소리로 소곤소곤한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일 것이다. 물론 읽으면서 뒤를 돌아다보면 어떤 “존재”의 눈과 마주 칠 것 같은 불안감에 읽으면서 선뜻 뒤를 돌아보기가 어려웠지만 말이다. 특히 유리창에 빼곡히 달라붙어 집수리하러 온 일꾼들을 바라보는 장면을 머릿 속에 떠올려 보면 마치 영화 <주온(呪怨)>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무서울 수 있는 장면인데 결국 일꾼들을 도와 집 수리를 마치고 수리 기간을 넘겼다는 핑계로 품삯을 떼어먹으려는 업자를 혼내주는 장면까지 읽게 되면 절로 웃음을 짓게 만들기도 한다. 

  어느 독자는 이 책을 읽고 꿈자리가 사나웠을 정도로 무서웠다고 하는데 내가 무딘 건지 읽는 동안 오싹한 기분은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읽고 나서 책 속 내용을 상상해보니 그제서야 참 무서운 이야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븐 킹의 지극한 공포를 기대했던 독자들이라면 실망스러웠겠지만, 읽는 동안은 그렇게 무섭지 않았지만 읽고 난 후 상상해보면 더 무섭다는 느낌이 드는, 은근하면서도 묘한 느낌이 참 매력적인 공포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온다 리쿠, 색다른 재미와 매력을 보여주는 작가임을 다시 한번 확인 시켜준 이 책 덕분에 책장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는 그녀의 <삼월은~> 시리즈를 드디어 꺼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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