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발레리 통 쿠옹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방송인 “이휘재”를 오늘날 인기 MC 자리에 오르게 했던 “인생극장”이란 프로그램을 참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선택의 기로에서 이휘재가 “그래, 결심했어!”라고 외치면 화면이 양분되면서 그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를 보여주는 형식이었는데, 우리가 일상 중에서 종종 하게 되는 “과연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 어땠을까?”하는 궁금증을 대리 만족시켜주는 그런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상상이 방송용 소재이겠거니 했는데 이미 SF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자주 사용되었던 소재이며 과학적으로도 이와 관련한 “다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 또는 “평행우주론(平行宇宙論, Parallel World)"이란 이론이 존재한다고 한다. “양자역학”, “우주파동함수이론” 등 문과생(文科生)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론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이 이론들을 간단히 말하면 모든 사건에 대해 가능한 모든 결과들이 각자의 "역사" 혹은 "세계"에 실재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즉 내가 지금도 종종 하는 후회, 고3 때 담임선생님 충고대로 눈높이를 낮춰서 지원해서 재수(再修) - 재수 시절 참 많은 방황을 해서 결국 고3 때 지원했던 대학보다 낮춰서 지원하게 되었다 -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후회처럼 다른 우주에서는 재수하지 않고 고3때 곧바로 합격한 또 다른 “나”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우주에서는 나와 연관된 주변 사람들도 결국 내 선택에 따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면 그만큼 내 삶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닌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엉뚱한 교훈(?)을 새삼 깨닫게 된다. 발레리 통 쿠옹의 <운명(원제 Providence/비채/2010년 11월)>은 이처럼 한 사람의 선택이 여러 사람의 운명에 마치 도미노처럼 연속으로 영향을 미쳐 인생 자체를 송두리째 바꿔 놓는 기막히면서도 교훈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한 남자가 지하철에 투신하면서 기차가 멈춰서버린다. 회의 시간 전에 중요 서류를 상사에게 전달해야 하지만 기차 사고로 늦어버린 비서 “마릴루”는 이번에는 성질 고약한 상사에게 짤리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데, 오히려 늦게 도착한 덕분에 회사에서 발생한 폭파사건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알베르 푄”은 자신의 여동생과 조카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기 위한 유언장 공증을 위해 공증사무소를 향하지만 지하철 사고로 인한 교통 체증으로 그만 늦게 도착하면서 먼저 도착한 가족들이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를 우연찮게 듣고 충격을 받게 된다. 유능한 변호사이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2인자에 머물러야 했던 “프뤼당스”는 식중독에 걸린 오너 - 알베르가 양보한 음식을 먹고 걸렸다 - 대신 참석한 회의에서 멸시를 당하고 병원에 입원한 오너를 찾아오는데, 폭파사건으로 입원한 마릴루를 만나게 되고 그녀가 전달하려고 했던 중요 서류, 즉 자신을 멸시한 고객의 부정이 담긴 서류를 건네받게 된다. 영화 제작자이자 교수인 “톰”은 애인인 “리비”의 집에서 나와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프뤼당스 대신 오너의 애완견 산책을 나선 “클라라”와 부딪혀 사고를 당해 애인 집으로 돌아왔다가 애인의 실체를 목격하게 되고 자전거 사고 상처가 심해져 마릴루가 입원한 병원으로 오게 된다. 한편 당초 가족들에게 전부 상속하기로 했던 유산 상속을 전면 변경하겠다고 선언한 알베르는 자신의 암 진단이 사실은 오류였다는 전화를 받고 역시 마릴루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된다. 이렇게 전혀 연관이 없는 네 사람이 지하철 사고를 계기로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고, 병원에서 서로 인연을 맺게 된다.  

 지하철 투신을 시도했던 남자 - 다행히 죽지는 않고 역시 그도 같은 병원에 입원해서 네명의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 가 투신하지 않았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마릴루는 시간내에 서류를 전달했겠지만 폭파사고로 죽었을 것이고, 알베르는 공증사무소에 제 시간에 맞춰 도착해서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가족들에게 전 재산을 상속한다는 유언장의 공증을 마쳤을 것이고, 프뤼당스는 오너의 개 산책길에 나서면서 고객의 비리가 담긴 서류는 구경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며, 톰은 방정맞은 클라라 대신 개를 끌고 나온 프뤼당스와 자전거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사고 하나가 네 명의 주인공들 - 책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의 인생 또한 바뀌었을 것이다- 의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기막힌 상황은 각자에게는 일견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 - 해고(마릴루), 출생의 비밀(알베르), 모욕(프뤼당스), 배신(톰) - 으로 전개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에게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게 된다. 책 중반까지 각 주인공의 시점이 교차되면서 전개되는 옴니버스식 구성이 다소 산만해서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중반 이후 각자가 겪게 되는 시련의 정체가 밝혀지고, 각자의 이야기가 “병원”이라는 장소로 귀결되면서 각자의 인과관계가 밝혀지는 결말에 이르러서는 마치 추리소설의 반전을 보는 것처럼 기막힌 재미를 느껴볼 수 있었다. 또한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어찌 보면 서양식 종교관이나 가치관보다는 불교(佛敎)의 “인연(因緣)”설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데 작가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아 그 연관성은 파악할 수 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로 인해, 아주 사소한 결정으로 인해 삶의 패가 좋게 바뀌는 경험이 일어나곤 합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인생이 때로는 놀라운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끔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요.” 

는 작가의 말처럼 누군가의 사소한 선택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이처럼 송두리째 바꿔 놓을 수 있다면 - 물론 이 책에서처럼 해피엔딩일 수 도 있고, 아니면 비극(悲劇)일 수 도 있어 그 결말을 장담할 수 는 없겠지만 -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 선택에 따라 또 다른 우주가 생성된다는 거창한 이론까지는 비약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선택에 있어서 더 신중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작가가 들려주는 교훈에 모두가 다 공감할 수는 없겠지만 주인공들이 겪는 기막힌 인생 역전(逆轉) 만으로 충분한 재미와 감동을 주는 이 책은 누구나 부담 없이 재미있게 읽어볼 만한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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