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판타지 - 스파이처럼 여행한 26가지 에피소드
오세아 지음 / 시공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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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오스트리아)”, “파리(프랑스)”, “런던(영국)”은 짧게나마 가본 적이 있어 유럽에서 위 세 곳을 제외하고 가보고 싶은 곳- 위 세 곳을 포함한다면 "파리"는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을 물어 온다면 “로마(이탈리아)”와 “취리히(스위스)”를 꼽곤 한다. 유럽 전역을 여행해 본 아내 말로는 북유럽 국가(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들이나 동유럽 국가들도 볼거리가 많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유명 관광지인 위 두 도시를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Moskva”는 어떨까? 왠지 고개를 설레설레 젓게 된다. 그 이유는 “모스크바”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이미 공산주의의 맹주 “소련”이 붕괴된 지도 20 년이 지났는데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음흉한 사람”이란 뜻으로 오해하고 있는 “크렘린(Kremlin)”, 러시아어로 “아름답다”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음에도 “붉은”하면 공산주의가 제일 먼저 연상되는 “붉은 광장”, 007 영화의 단골 악당이었던 “KGB" 등 어릴 적 반공 교육을 받았던 내 또래의 사람들이라면 아직도 공산주의 시절 그 무서운 이미지가 쉽게 가시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붉은 색” 이미지 가득한 “모스크바”를 “판타지”와 같다고 말하는 책을 만났다. 프랑스 남자 친구를 따라 모스크바에 살기 시작한 지 1년이 넘은 “오세아”가 쓴 <모스크바 판타지; 스파이처럼 여행한 26가지 에피소드(시공사/2011년 10월)>이 바로 그 책이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모스크바에서 왔어요”라고 밝히면 사람들이 한번쯤 더 돌아보게 하는 마술을 부리는, “춥지요?”라고 되묻는 사람들이 태반인 그런 도시라고 말한다. 흔히들 낯익은 도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름 외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도시인 모스크바를 정확히 일 년 전, 새롭게 시작하는 삶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막연한 불안감으로, 이름이 주는 중압감 때문에 비행기 밖의 차가운 공기만큼이나 싸늘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작가는 처음 몇 달은 이곳에 처음 오는 사람들과 다를 게 없었지만 모스크바의 진면모를 확인한 후 부터는 달라졌다고 말한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 신대륙이었다고 밝힐 정도로 모스크바의 매력에 흠뻑 빠진 작가는 자신이 그랬듯이 지난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과 여름이 지나면서 찾은 장소들을 가슴 속에 담아 누군가를 놀라게 해주고 싶어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스스로 “이제 나는 모스코비치((Moskvich; 모스크바인)이야”라고 말하는 작가가 소개하는 “모스크바 살이 안내서” 쯤인 셈이다. 

책은 먼저 모스크바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붉은광장”과 모스크바를 가로지르는 강주변의 풍광들, 100개나 넘는다는 박물관, 미술관들과 음식사진들, 그리고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러시아 인형 “마뜨로슈카” 등 러시아에 대한 이미지 사진들을 소개하고 "Part 1 모스크바에 도착하다“에서부터 본격적인 모스크바 살이 이야기를 전해준다. 역시 나처럼 기억하는 모스크바의 이미지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는 작가는 1년 전 첫 도착해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혼자서 돌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정도였는데, 첫 나들이는 온지 며칠 되지 않았던 어느날, 쁘띠 쿠숑 - 작가를 모스크바로 이끈 프랑스 친구 - 의 동료와 저녁을 먹다가 누군가 붉은 광장에 산책하러 가자고 제안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긴장하며 20분쯤 걸었을 때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면서 마주하게 된 붉은 광장의 아름다움은 몇 달 전 서울의 생활을 접고 모스크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참 복 없는 인생이라고 자조했던 모든 불평과 불만, 그리고 일말의 불안감마저도 날려버릴 정도였다고 말한다. 자신의 마음 속에 어느덧 불안하고 무시무시했던 모스크바에 대한 이미지는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한 과거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도시로 새롭게 자리 잡게 되었고, 자신의 남자 친구와 함께 하는 삶이 이곳의 아름다움처럼 반짝반짝 빛나기를 기도하며, 설레이는 그 마음을 누군가에 들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처럼 Part01에서는 모스크바 첫 살이에 대한 단상(斷想)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내고 관련한 모스크바 명소, 즉 “붉은 광장”, “크렘린 궁전”, “굼 백화점”, “바실리 사원”, 박물관들의 사진들을 싣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Part 02 모스크비치의 일상“에서는 본격적으로 “모스코비치”로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일상들, 즉 현지에서 배울 작정으로 러시아어 알파벳도 모르고 시작한 모스크비치 생활인지라 두려움이 더 컸을 지도 몰랐다는 이야기와 함께 두려움과 무서움에 시작한 지하철 타보기에서 지하철 천정과 벽면을 수놓은 예술작품들에 경탄하기도 하고 지하상가에서 쇼퍼홀릭으로서의 본성을 되살려보기도 하며, 모스크바에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현대 미술관(MOMA) 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Part 03. 모스크바에서도 잘 먹고 산다 여전히” 에서는 러시아 팬 케이크인 “블린듸”와 만두인 “펠메니”, 스프 “보르쉬”등 모스크바에서 만나볼 수 있는 대표 요리들과 여러카페, 레스토랑 들을 소개하며, 그리고 부록에서는 모스크바 여행시 주의할 점들이나 연락처 등을 싣고 있다.

 이 책 속의 “모스코비치”로서의 작가의 삶에 대한 짧은 글들과 사진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중충한 잿빛만 가득했을 것 같은 모스크바가 “아름다움”이라는 의미의 ‘끄라스나야’에서 “붉은 광장”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듯이 온통 아름다운 색채가 넘실대는, 기존 서유럽 여느 도시와는 다른 색감과 풍광으로 제목 그대로 충분히 “판타지”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참 아름다운 도시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물론 여행할 때 잘 알지 못하는 낯선 도시에서 기대를 뛰어넘는 의외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 놀라움과 감탄이 더욱 커지듯이 미지(未知)의 두려움으로 “모스크바”를 시작했기에 더 큰 찬사와 감탄이 터져 나온, 조금은 과장된 것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명승지 정보와 풍광들만 나열한 안내서가 아니라 자신의 1년 동안의 삶과 경험을 곁들인 진솔한 이야기를 같이 담고 있어 결코 과장되지만은 않은 작가의 모스크바에 대한 “진정성”을 엿볼 수 있었다. 다만 모스크바에서 만난 사람들이나 일상에서 만난 에피소드들이 충분히 담겨있지 않아 여행에세이라기 보다는 안내서 성격이 더 강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가 없었던, 결국 눈만 즐거운 그런 책이 되고 만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 덕분에 모스크바는 로마와 취리히와 더불어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그런 매력적인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점만큼은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언제가 될지 기약조차 할 수 없겠지만 온갖 하얀색 눈으로 뒤 덮힌, 그리고 군데 군데 회색빛 건물만 볼 수 있으려니 했던 동토(凍土)의 나라가 아닌, 사계절 다채로운 색깔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는 아름다운 도시 모스크바 여행이 나에게도 “판타지"가 되는 그런 여행을 꼭 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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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흑산(김훈/학고재/2011-10-20)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고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드라마킥한 병자호란의 "삼전도 치욕"을 드라마틱한 요소와 "분노"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아주 무미건조하게 그렸는데. 오히려 그 무미건조함이 묘한 여운과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김훈의 문장은 읽는 "맛"이 무엇인지 느끼게 하는 그런 문장이어서 자꾸 찾아 읽게 되더군요. 이번에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조선 사회의 전통과 충돌한 정약전, 황사영 등 지식인들의 내면 풍경을 다룬다고 하니 그가 풀어낼 조선 후기 사회는 어떠할지 궁금해지네요. 깊어가는 가을, 김훈의 깊이있는 글과 마무리하는 것도 참 의미있을 것 같습니다. 

2. 조용한 혼돈(산드로 베로네시/열린책들/2011-10-10) 

 

아내가 갑작스럽게 죽고부터 온종일 딸아이의 학교 앞을 지키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라니 왠지 슬플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먼저 읽으신 독자들 서평을 보니 배꼽잡을 정도로 웃기는 코메디 소설이라고 하네요. 이야기 자체도 꽤나 재미있을 것 같고 이탈리아 소설은 고전 외에는 만나본 적이 드물어 이색적인 재미를 느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 변호측 증인(고이즈미 기미코 / 검은숲 / 2011-10-22) 

 

소개글을 읽어보니 46년 만에 복간된 이 책,  입소문만으로 출간되자마자 10만 부, 20만 부를 돌파했다고 하더군요. '환상의 걸작', '전설의 명작'으로 불린다는 이 책, 최근 <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으로 재미와 즐거움을 선사했던 미치오 슈스케가 작품 해설을 덧붙였다니 더욱 기대가 되는 작품입니다. 추리소설은 여름이 제격이라고 하지만 왠지 가을의 스산한 분위기도 추리소설과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번 달에도 3권만 골라봤습니다. 3권 다 욕심이 나는 책이라 이번에도 꼭 채택되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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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1-11-09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크완료했습니다 :) 감사합니다!
 
[새벽 거리에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새벽 거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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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 작품이 지난 2011년 2월 <플래티나 데이터>였으니 이번에 읽은 <새벽 거리에서(원제 夜明けの街で / 재인 / 2011년 9월)>로 근 7개월 만에 다시 만난 셈이다. 동생 덕분에 <용의자 X의 헌신>으로 처음 시작해서 푹 빠졌었다가 최근에는 좀 띄엄띄엄 했는데 그래도 책장에 읽은 책, 안 읽은 책 합쳐 그의 책이 14종(권수로는 17권)이나 되니 아마도 일본 작가들 중에서는 가장 많은 권 수의 책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작품마다 편차가 있긴 하지만 어느 것을 선택해도 평균 이상의 재미는 보장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그래도 꾸준히 읽어온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작품도 별 거부감 없이 쉽게 시작할 수 있었고, 다 읽은 지금 짧게 평을 해보자면 역시나 그만의 재미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작품이었다. 

불륜을 저지르는 놈만큼 멍청이는 없다고 생각해왔던 내가 그 대사를 나 자신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다는 처지에 놓였다는 책 첫 머리의 문구가 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하면 과언일까. 불륜을 멍청한 짓이라 생각하던 한 중년 남자가 그 “멍청한” 짓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이야기라면 그냥 로맨스 이야기에 지나지 않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 소설 작가답게 미스터리를 교묘하게 결부시킨다. 로맨스와 미스터리의 결합, 그러나 불륜이라는 로맨스와 공소시효 만료가 얼마 남지 않은 살인사건에 얽힌 비밀이라는 미스터리의 조합은 이 책이 범상치 않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는 예감을 절로 들게 만든다. 본격적으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추석 연휴가 끝나고 처음 출근한 날, 올해 서른 한 살의 “아키하”가 비정규직 여사원으로 입사한다. 전기과 주임인 나(“와타나베”)는 비정규직 사원이 들어오는 것이 드문 일도 아닌데다, 잠시 후에 있을 회의 때문에 머리가 아주 복잡해서 그녀를 그저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버린다. 그 이후 주말에 환영식이 열렸지만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일은 거의 없었을 정도로 무관심했다. 그러던 어느날 대학 시절 친구 세 명과 술을 마시고 같이 어울려 야구 연습장으로 갔다가 연습장 한 타석을 차지하고 배트를 휘두르는 아키하를 발견한다. 인사 끝에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까지 가게 된 아키하는 혼자서 똑바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취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업어서 그녀의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는데, 그만 그녀는 윗옷에 토하고 만다. 이게 인연이 된 그녀와 나는 점점 가까워지고, 어느새 ‘멍청한’ 짓이라고 부르는 불륜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혼하고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남자”로서 매력이 없는 40대 “아저씨”가 되어 버린 나에게 아키하는 잃어버린 남자의 모습을 되찾아 준 그런 존재였다. 딸 교육에 여념 없는 아내를 보면 죄스럽기까지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녀를 포기할 수 없어 아내와 이혼할 결심까지 하게 될 정도로 아키하에게 푹 빠져 버린다. 그런데 아키하에게 비밀이 있었다. 15년 전에 아키하의 집에서 아버지의 비서이자 연인이었던 “혼조 레이코”라는 여성이 가슴에 칼을 맞아 숨진 채로 발견되고, 그 시신의 첫 목격자가 바로 아키하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사건은 강도 살인으로 종결되지만 이제 공소시효 만료가 얼마 안남은 시점에 경찰이 그녀의 “애인”이었던 나를 찾아와 이것 저것 캐묻고, 살해당한 여인의 동생은 범인이 바로 “아키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점은 아키하도 가타부타 없이 공소 시효 만료날인 3월 31일이면 모든 것을 말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아내와의 이혼을 결심한 나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과연 그녀가 범인이었다면 나는 그녀와의 만남을 계속할 수 있을까. 아니면 여기에서라도 만남을 그만두어야 할까. 그런데 처음에는 아내와의 이혼을 만류하던 아키하가 갈수록 더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던 중 마침내 공소 시효가 끝나는 그날이 오고야 만다.

15년 전에 일어난 살인사건과 공소시효가 끝나면서 드러나게 되는 충격적인 진실은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기막힌 재미를 선사한다. 그런데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식 “미스터리”보다도 그가 선보인 “불륜” 스토리에 더 큰 재미와 함께 공감까지 느꼈다면 너무 엉뚱한 것일까. 주인공 와타나베는 유치원에 다니는 이쁜 딸과 그녀의 교육에 여념이 없는 아내, 그리고 안정된 직장에 다니면서 업무 때문에 가끔 스트레스를 받는 평범한 41세의 남자이다. 즉, 지금 내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그런 남자인 것이다. 불륜을 멍청한 짓이라고 비웃으면서도 막상 자신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리는, 어쩌면 모 방송국 드라마인 “사랑과 전쟁”의 단골 주제로 수도 없이 보아온 그런 이야기인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남성성을 잃어버리고 “아저씨”로 살아가는 중년 남자들에게 젊은 시절의 남성으로서의 존재감을 다시금 일깨우고 낯간지럽기만 하다고 느꼈던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존재야말로 얼마나 치명적으로 위험한 것인지를, 견고하다고 믿은 가정의 행복이 사실은 얼마나 쉽게 깨져 나갈 수 있는지를 주인공 또래의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고개를 끄덕거리게 할 만큼 개연성 있고 사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책을 읽으면서 어느새 나는 “와타나베”에 올곧이 감정이입이 되어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거라는, 심지어 결말에 이르러 아키하가 범인으로 밝혀진다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하고 고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면서 이렇게까지 푹 빠져 버린 나 자신에게 그만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어쩌면 이 책에서 눈을 뗄 수 가 없었던 것은 15년 전 살인사건의 숨은 진실이 아니라 와타나베의 사랑이 어떻게 결말을 맺을지가 더 궁금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미혼의 젊은 남녀가 아름다운 로맨스를 읽으면서 행복한 사랑을 꿈꾼다면 나와 같은 중년 남성들에게는 머릿속에서는 아내가 아닌 다른 이성과의 불륜이 주인공이 “멍청한 짓”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충분히 깨닫고 있으면서도 가슴 속 깊은 어딘가에는 불륜이 주는 위험하고 치명적인 매력에 대해 한번쯤은 빠져보고 싶다는 “일탈”에 대한 욕망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미스터리를 창조해내는 실력 또한 발군이지만 중년 남성의 숨은 욕망을 끄집어내어 쥐락펴락 할 줄 아는 히가시노 게이고, 역시 결코 녹록치 않은 작가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 나 같은 중년 남성들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책이다. 아무래도 이 책, 책 표지에 “중년 남성들은 조심히 읽기 바랍니다” 라는 경고문이라도 붙여야 되는 것은 아닐까?

다 읽고 나서 영 아내 얼굴 보기가 민망해 자꾸 시선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혹 이 서평을 아내가 읽는다면, 또는 나중에 아내가 이 책을 보고 그런 내 모습을 떠올린다면 “소설은 소설일 뿐 오해하지 맙시다”(“개그는 개그일 뿐~” 의 운율로 읽어주길 바란다^^)라고 싹싹 빌어야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냥 소설 읽으면서 잠시 딴(?) 생각해 본 건데 억울하다는 생각은 왜 드는지 괜히 짤려서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별 짓을 다한다^^. 각설하고 그동안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중 최고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어느 작품보다도 몰입감이 뛰어났던 - 물론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일 수 있겠지만 - “재미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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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독 귀족 탐정 피터 윔지 3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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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셜록 홈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유명 탐정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모음집을 읽은 적이 있었다. 어릴 적 어린이용 추리소설 입문서라 할 수 있는 “명탐정 시리즈”에서 간략한 소개 정도로만 만나봤던 유명 탐정들이 등장하는 원형 작품들을 읽어볼 수 있었던 더할 나위 없이 반갑고 즐거운 책 읽기여서 책 평가에 만점을 주었지만 재미만 놓고 본다면 이미 백 년도 더 된 추리소설 태동기에 나온 “고전(古典) 작품들이라 그런지 밋밋하고 싱거운 느낌을 지울 수 가 없었다. 이미 현대 추리소설에 너무 길들여진 나머지 이제 웬만한 트릭과 반전에는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갈수록 더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재미만 찾게 된 것 같아 씁쓸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번에 “추리소설의 황금기(the Golden Age)”라 불리는 빅토리아 시대 말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무렵까지 활약한 작가 들 중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라이벌로 손꼽힐 정도로 최고의 작가라는 “도로시 L. 세이어즈”의 <맹독(원제 Strong Poison / 시공사 / 2011년 9월)>을 받아들고서도 과연 이 책의 재미를 올곧이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도로시 L. 세이어즈”가 창조해낸 명탐정 “피터 윔지”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라고 하는데, 어릴적 읽은 “명탐정 시리즈”에서도 만나볼 수 없었던 생소한 인물이다. 그래서 작가와 작품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작가는 ‘영국 탐정소설 작가 클럽(The Detection Club)’의 일원이었다고 하는데, “앤소니 버클리(창시자. <독이 든 초콜릿 사건>)”, “G. K. 체스터튼(초대 회장. 명탐정 “브라운 신부”시리즈로 유명하다)”, “애거서 크리스티”, “로널드 녹스(<육교살인사건>)”, “존 딕슨 카(밀실 트릭의 대가.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이 클럽에 가입했다고 한다)” 등 당시 쟁쟁한 거장들이 회원으로 가입했다고 한다. 이 클럽은 추리소설의 원칙들을 규정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서약식에서 하늘의 계시, 여성의 직감, 미신, 야바위, 우연의 일치에 절대로 의존하지 말 것이며 깽, 음모, 살인광선, 유령, 최면술, 중국인, 초능력, 광인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절도를 지켜야 하고, 영원히 그리고 절대로 과학과는 관계가 없는 ‘미지의 독약’을 사용하지 않을 것 등의 원칙을 문답 형식으로 서약하게 했다고 한다(http://cafe.naver.com/nfantastique/1169 발췌). 그러나 규칙은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깨지기 위한 것이라는 격언처럼 클럽 멤버들조차 자주 이 규칙을 위반한 글들을 발표해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고 하는데, 아직도 추리소설의 반칙(反則)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가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이에 반해 “도로시 L.세이어즈”는 고전 추리소설의 미덕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 그런 작가라고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즉 이 책도 미신과 우연, 구성의 파격을 철저히 배제하고 논리와 과학으로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정통 추리 소설의 풍취를 고스란히 맛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첫 시작은 판사가 배심원들에게 사건을 설명하며 유무죄 판단을 종용하는 재판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여류 추리소설 작가인 “해리엇 베인”은 동료 작가이자 연인인 “필립 보이스”와 1년 가까이 사귀다가 결혼을 요구하는 필립과 다툼 끝에 헤어지지만 그의 계속되는 요구에 지친 나머지 마침내 굴복하고 결혼이라는 결합의 바깥에서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기로 동의하게 된다. 그런데 원래부터 위통을 앓고 있던 필립은 치료차 요양을 가게 되고, 상태가 좋아져 다시 돌아와 해리엇의 집에 들려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몸 상태가 매우 안 좋다며 한 시간 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심한 구토와 고열로 고생을 하다가 그만 숨을 거두게 된다. 검시(檢屍) 결과 필립의 몸에서 맹독성 물질인 비소(砒素)가 검출되고, 경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해리엇이 사건이 일어나기 몇 달 전 여러 차례에 걸쳐 비소와 독극물을 구입했으며, 마침 비소를 이용한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을 집필 중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어 재판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정황이나 증거 상 해리엇이 범인인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의 의견이 분분하면서 의견 불일치 판정을 내리고 재판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여기 해리엇의 무죄를 믿는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방청석에서 이 재판을 구경하던 명탐정 “피터 윔지” 경이었다. 그녀의 강렬한 눈빛에 매료된 피터는 그녀가 결코 범인이 아닐 것이라고 직감하고, 해리엇 변호인단에 자진 합류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고, 구치소에 수감된 해리엇을 면회하고는 엉뚱하게도 그녀에게 무죄 입증을 조건으로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청혼하기에 이른다. 다음 재판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사심(私心) 가득한 피터는 과연 주어진 시간안에 그녀의 무죄를 입증해낼 수 있을까? 그녀가 죽이지 않았다면 누가, 어떤 방법으로 필립에게 비소를 먹게 했을까? 피터는 “귀족”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재력을 십분 살려 차근차근 수사해내고 마침내 진범의 정체와 그 수법을 밝혀낸다.

 추리소설 규칙을 중시하는 “탐정 클럽” 회원답게 물증과 정황 증거를 통해서 범인을 밝혀내는 정통 추리를 선보이는 이 작품은 앞서 말한 대로 기발하고 자극적인 현대 추리소설을 즐겨하는 독자들에게는 영 심심하기만 한 그런 작품일 것이다.  트릭과 플롯이 꽤나 정교 - 물론 당시에는 꽤나 기발한 것으로 평가 받았겠지만 이런 류의 트릭은 이 작품 이후 수많은 작품에서 만나볼 수 있어 추리소설 애독자들이라면 쉽게 “예측” 할 수 있는 수준이다 - 하지만 고전 추리소설답게 그야말로 “공식”에 딱 맞춘, 즉 피터 윔지의 증거 수집과 수사 과정을 쫓다 보면 책 중반 이후에는 범인의 정체를 짐작하게 되고, 그 이후부터는 범인을 입증할 증거를 찾는 과정을 다루고 있어 허를 찌르는 반전이나 스릴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오히려 사건 자체 보다는 이야기의 설정과 전개가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최고의 지적 탐정이라 불린다는 피터 윔지가 법정의 피고인에 한 눈에 반해 그녀의 무죄를 입증해서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사심으로 사건에 뛰어들고, 귀족인 자신의 신분을 십분 살려 사람들을 고용해서 범인의 주변을 탐문하고 증거를 수집하는 한편, 심지어 범인의 집에 몰래 숨어 들어가 금고를 살펴보는 범죄까지 저지르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사하는 장면들 뿐만 아니라 명성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뜬끔없이 구치소로 찾아와 무죄를 입증할 테니 자신과 결혼해달라는 피터 때문에 어이없었을,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 그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어 난감해했을, 결국 뛰어난 추리력으로 자신을 구해낸 “영웅”인 피터 윔지를 어떻게 받아들이지 해리엇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꽤나 즐거운 상상이었다. 제목은 강렬한 미스터리를 연상시키지만 속살을 열어보면 오히려 로맨스에 미스터리를 가미한 이야기에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 이후 해리엇이 여러 작품에 등장한다고 하니 피터 윔지경과 해리엇 베인의 콤비 플레이도 기대해볼 만 하다. 다만 피터 윔지 경, 분명 인간적인 면에서도 꽤나 재미있고 추리 실력도 녹록치 않은 인물이긴 한데 이 한 권의 책으로는 그의 명 솜씨를 맛보기에는 사건이 너무 “평범”한 것 같다. 보다 더 위험하고 치명적인 사건에서의 그의 활약을 접해봐야 그의 추리 능력을 평가할 수 있을 듯 하다.

책 읽기 시작하면서 했던 이제 고전 추리소설에서 재미를 맛볼 수 있을까 했던 걱정은 잠시 잊어도 좋을 정도로 나름 재미있는 책이었다. 그래도 현대 추리소설, 특히 정교하고 기발한 트릭과 반전을 자랑하는 일본 추리소설들을 참 많이 읽었지만 아직까지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능가할 트릭과 반전은 만나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아직 고전의 맛을 잊지는 않은 듯 하다. 그렇다고 안심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자극적인 맛을 자주 보다 보면 고전의 묘미를 금세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은 자꾸 편향되는 입맛 “정화” 차원에서라도 고전 작품들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행히 요새 추리 소설 붐에 발 맞춰서 다양한 고전 작품들이 출간되고 있으니 어릴적 이름만 알고 있던 작가와 작품들을 직접 만나보는 재미와 즐거움은 계속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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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길 1 - 노몬한의 조선인
이재익 지음 / 황소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지난 1년 동안 가장 많이 만난 “한국 작가”를 꼽는다면 단연 “이재익” 작가일 것이다. 2010년 9월 단편집 <카시오페아 공주>를 시작으로 <압구정소년들>, <서울대 야구부의 영광>, <심야버스 괴담>, <싱크홀> 등 지난 1년 동안 출간된 작품 중 <아이린>을 빼고 전 작품을 읽었다 - <아이린>은 소장하고 있는데 아직 읽지 못했다 -.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두시탈출 컬투쇼>의 PD라는 이색 경력을 가지고 있는 이재익 작가를 이렇게 많이 만나게 된 이유는 뭘까? 우선 1년 동안 6권이나 출간할 정도로 작가의 스피디하고 왕성한 집필 능력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전작인 <싱크홀> 서평에서도 밝힌 것처럼 판타지, 미스터리, 성장소설, 스포츠 소설, 재난 소설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군더더기 없이 숨 가쁘게 몰아치는 빠른 전개와 구성으로 책을 한번 손에 잡으면 도저히 놓을 수 없게 하는 몰입감과 재미가 탁월하고 결말에 이르러 가슴 찡하게 울리는 감동 또한 빠뜨리지 않는, “이재익 작품은 재미있다”라는 기대감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신작 <아버지의 길 1,2(황소북스/2011년 10월)>도 그런 기대감 때문에 망설임 없이 선뜻 선택하게 되었는데, 다 읽고 나니 이 책, 그가 전작들을 통해 보여준 재미와 감동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기대 이상의 재미와 감동을 맛볼 수 있었다. 

일제(日帝)가 괴뢰국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 침탈의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던 1938년 9월, 조선 신의주 인근 마을에서 여덟살 아들 “건우”와 함께 대장장이로 살고 있던 “김길수”는 만주로 조선인 징용군을 이끌고 가던 중 부족 인원을 채우기 위해 마을을 수색하여 젊은 장정들을 잡아들이던 일본 장교 “스기타” 일행에게 붙잡혀 모진 폭행 끝에 아들과 이별할 겨를도 없이 마을 면장에게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아들을 부탁하고는 징병 열차에 강제로 몸을 싣게 된다. 만주 관동군 조선인 부대에 배속 받은 길수는 아들에게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가혹한 훈련을 꿋꿋이 이겨내고, 드디어 소련군과의 전투를 위해 출정(出征)을 준비하던 중 일본 끄나풀의 속임수에 의해 붙잡혀온 아내 “월화”와 재회하게 된다. 결혼 전 만주 일대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같이 했던 혁명 동지였던 둘은 결혼하면서 건우를 임신하게 되면서 부대 사령관이자 전설적인 항일 투사 “양세봉”의 배려로 혁명군에서 나와 신의주에 정착했던 것이다. 그러나 혁명군 시절을 그리워하던 아내는 동료에게서 양세봉의 죽음 소식을 듣고 혁명군에 복귀하여 “붉은 여우”라 불릴 정도로 혁혁한 공로를 세우지만 길수는 자신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어린 아들을 버리고 집을 뛰쳐나간 아내를 원망하며 살아왔는데, 참으로 기구한 순간과 장소에서 아내와 재회를 하게 된 것이다. 출정 전날 경비를 서던 길수는 광장에 묶여 있던 월화를 구출해 아들 건우에게로 돌아가서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 당부하고는 부대 내에 있는 정신대 숙소에 숨겨준다. 다음날 아침 월화의 탈출로 발칵 뒤집혀 부대 곳곳을 수색하지만 출정 때문에 유야무야되고 길수의 부대는 만주국과 몽골의 접경지대인 “노몬한” 지역으로 출정하게 된다. 노몬한에서 맞닥뜨린 일본군과 소련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고, 소련 전차 부대에 화염병을 투척하는 말도 안 되는 전투를 벌이던 일본군은 화력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괴멸되고 길수 또한 소련군에 포로로 붙잡혀 중앙아시아 지역의 포로수용소 “굴락”으로 보내져 모진 고초를 겪는다. 일본군으로의 복귀가 아닌 조선으로 귀환시켜주겠다는 조선인 출신 소련군 장교의 약속으로 희망을 품어 보지만 독일과의 전쟁 준비로 약속은 무산되고, 길수는 일본군으로의 귀환 대신 소련군에 남기로 한다. 드디어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되고, 길수는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소련군으로 참전하게 되지만 그만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독일로까지 붙잡혀와 포로수용소에 갇히고 만다. 한편 일본군 부대에 숨어 있던 월화는 소련군의 공습을 틈타 탈출하게 되고, 수많은 우여곡절과 고생 끝에 길수가 일러준 주소로 건우를 찾아오지만 이미 아들은 면장 식구를 따라 경성으로 올라간 후였다. 수소문 끝에 경성까지 찾아가 드디어 건우를 만나지만 다섯 살에 어머니와 헤어진 건우는 어머니가 못내 낯설기만 해서 선뜻 다가오지 못하지만 그런 건우에게 길수의 편지를 내밀자 그제서야 어머니 품에 안겨 눈물의 재회를 하게 된다. “굴락”보다 더한 고초를 겪고 있던 길수는 수많은 생사 고비를 넘기면서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지만 길수는 아들에게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던 중 독일 외인(外人)부대라 할 수 있는 “동방부대”에 배속되어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저지에 나선다. 중과부적 끝에 다시 포로가 된 길수, 이미 온 몸은 망가져버렸지만 그래도 길수에게 돌아가겠다는 열망은 더욱 커져만 간다. 이제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까지 끌려가게 될 길수는 과연 그렇게 열망하던 아들과 재회를 할 수 있을까? 이야기는 가슴 먹먹한 결말로 치닫는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일요일 밤 9시 쯤 침대에 들면서 내일 출근해야 되니 “조금만” 읽다가 졸리면 자야지 하는 편안한 마음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이 “조금만”이라던 책 읽기는 결국 1,2권 70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다 읽고 나서야 마칠 수 있었다. 길수의 파란만장하고 가슴 아픈 여정에 책읽기를 도저히 중단할 수 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꼼짝없이 붙들려 미친 듯이 읽던 책읽기는 결국 새벽 두 시를 넘겨서야 끝이 났고, 서둘러 잠을 청했지만 먹먹해진 가슴 때문에 금세 자리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밖에 나가 찬바람을 쐬면 좀 진정되겠지 했지만 쉽게 진정되지 않았고 다시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머릿 속에 가득한 책 이야기 때문에 밤새 뒤척이고는 동이 터오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 출근길에 오르고 말았다. 책 때문에 밤잠 못 이룬 것이 정말 언제만인가. 그리고 읽은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이야기만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보면 여운이 꽤나 오래 갈 것 같다. 이 책의 어떤 점이 나를 이렇게 잠 못 이루게 한 걸까?

우선 도대체 그 크기와 정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기구하고 파란만장했던 길수의 이야기가 주는 감동을 먼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실화라는 것이 도대체 믿기지 않아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책은 지난 2005년에 방영했던 SBS 특집 다큐멘터리 <노르망디의 코리언>를 소설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해냈다는 점에 다시 한번 놀라게 만들었다. 다큐멘터리를 소개한 블로그에 실려 있는 당시 독일군 동방대대를 찍은 낡은 흑백 사진에서 작품 속 “길수”의 모습을 보고는 코끝이 찡해지고 다시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 실제로 “김길수”가 있었구나, 신의주에서 노르망디까지 2만 km에 이르는 지옥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대장정을 견뎌낸 “김길수”가 소설 속 허구의 주인공이 아니라 실재했던 분이구나. 그들이 겪었을 고통과 눈물에 절로 숙연해지면서 소설 속 장면들이 하나 하나 되살아나 명치 끝이 답답해지고 가슴 한 켠이 저려오는 그런 느낌을 들게 한 것이다. 그들 - 현재 4명으로 알려졌다 - 은 어떤 마음으로 그 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작가는 책 속의 길수처럼 어린 아이, 병든 노모, 어여쁜 여동생 등 고향에서 그들을 애타게 기다리며 눈물짓고 있을 가족 때문에 육체가 부서지고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 속에서도 생명의 불꽃을 결코 꺼뜨릴 수 가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기구하다고 하지만 그 어느 소설보다도 더 거짓말 같은 그들의 사연이 못내 믿기지 않아 블로그 속 글과 사진을 몇 번을 다시 읽고 봤는지 모르겠다. 그러고서 나온 건 탄식 뿐이었다.  

길수의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당하기 힘든데, 줄거리 소개에는 길수와 월화, 건우에 국한했지만 책에는 길수 가족 이외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엮어내는 저마다의 사연들, 즉 열 다섯 어린 나이에 형 대신 징용에 끌려가 변태 성욕자 일본군 장교의 성 노리개가 되어 버리고, 길수와 함께 온갖 고초를 겪다가 결국 죽고 마는 “영수”나 길수처럼 고향에 두고 온 연인에게 꼭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견뎌내지만 고향에 있을 줄 알았던 연인이 정신대로 끌려와 같은 부대에 있었다는 기막힌 사실을 알게 되고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한 “정대” 이야기 또한 길수 이야기 못지 않게 애달프고 슬프지만 한편으로는 나라 잃은 국민으로서 겪어야 했을 그들의 아픔에 저절로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책 속 등장인물들의 겪었던 아픔과 슬픔은 일제 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과 아픔을 고스란히 온 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실제로 겪으셨던 사연이었고, 오히려 한정된 분량과 수위 때문에 제대로 다 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매주 수요일마다 정신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가 일본 대사관 앞에서 벌어지고 있을 정도로 불과 몇 십 년 전 일인데 일본이 우리의 근대화를 이끌었다느니, 강제 징용이 아닌 자발적 지원이었다는 말을 일본인이 아닌 우리 한국인들이 버젓이 떠들어대는, 그것도 언론에다가 동네방네 떠들어대는 그 현실이 너무나도 개탄스러웠다. 이처럼 책은 길수와 주변 인물들이 엮어가는 기구한 사연들로 읽는 내내 안타까움과 슬픔에 젖게 만들고, 다 읽고 나서도 분노와 울분이 쉽게 가시지 않는 여운이 길게 남는 그런 소설이었다.

물론 구성과 이야기 전개에서 비판할 만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닌데, 길수와 월화의 다소 억지스러운 재회나 정대의 연인이 정신대로 끌려와 같은 부대에 있었는데도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 월화가 조선으로 귀향하는 과정에서의 우연과 억지스러움의 반복들이 그러하다. 작가 입장에서는 이야기를 좀 더 극적으로 끌고 가고 감동 코드를 위한, 어디까지나 “소설적 장치”라고 말하겠지만 현실성(리얼리티)를 떨어뜨리는 장면임에는 분명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를 해칠 정도는 아닌 그저 아쉬운 장면 정도로 느껴졌다.

처음에 이 글을 쓰면서 서평이 아닌 호들갑만 떠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었는데 역시나 앞서 쓴 글을 읽어보니 유치하기만 한 감상문이 되고야 말았다. 유치한 글솜씨야 나 스스로를 탓해야 할 것 같고 어쨌든 두 달 남짓 남은 기간 동안 어떤 책들을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올 한 해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책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이 작품은 앞으로 오랫동안 이재익 작가의 “대표작”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작가는 “향후 수년간 이런 작품을 다시 쓰지 못할 것 같다”라고 말하지만 이 작품보다 더한 재미와 감동을 선사할 멋진 작품을 조만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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