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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독 ㅣ 귀족 탐정 피터 윔지 3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평점 :
최근에 “셜록 홈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유명 탐정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모음집을 읽은 적이 있었다. 어릴 적 어린이용 추리소설 입문서라 할 수 있는 “명탐정 시리즈”에서 간략한 소개 정도로만 만나봤던 유명 탐정들이 등장하는 원형 작품들을 읽어볼 수 있었던 더할 나위 없이 반갑고 즐거운 책 읽기여서 책 평가에 만점을 주었지만 재미만 놓고 본다면 이미 백 년도 더 된 추리소설 태동기에 나온 “고전(古典) 작품들이라 그런지 밋밋하고 싱거운 느낌을 지울 수 가 없었다. 이미 현대 추리소설에 너무 길들여진 나머지 이제 웬만한 트릭과 반전에는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갈수록 더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재미만 찾게 된 것 같아 씁쓸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번에 “추리소설의 황금기(the Golden Age)”라 불리는 빅토리아 시대 말부터 제2차 세계 대전 무렵까지 활약한 작가 들 중에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라이벌로 손꼽힐 정도로 최고의 작가라는 “도로시 L. 세이어즈”의 <맹독(원제 Strong Poison / 시공사 / 2011년 9월)>을 받아들고서도 과연 이 책의 재미를 올곧이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도로시 L. 세이어즈”가 창조해낸 명탐정 “피터 윔지”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라고 하는데, 어릴적 읽은 “명탐정 시리즈”에서도 만나볼 수 없었던 생소한 인물이다. 그래서 작가와 작품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작가는 ‘영국 탐정소설 작가 클럽(The Detection Club)’의 일원이었다고 하는데, “앤소니 버클리(창시자. <독이 든 초콜릿 사건>)”, “G. K. 체스터튼(초대 회장. 명탐정 “브라운 신부”시리즈로 유명하다)”, “애거서 크리스티”, “로널드 녹스(<육교살인사건>)”, “존 딕슨 카(밀실 트릭의 대가.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이 클럽에 가입했다고 한다)” 등 당시 쟁쟁한 거장들이 회원으로 가입했다고 한다. 이 클럽은 추리소설의 원칙들을 규정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서약식에서 하늘의 계시, 여성의 직감, 미신, 야바위, 우연의 일치에 절대로 의존하지 말 것이며 깽, 음모, 살인광선, 유령, 최면술, 중국인, 초능력, 광인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절도를 지켜야 하고, 영원히 그리고 절대로 과학과는 관계가 없는 ‘미지의 독약’을 사용하지 않을 것 등의 원칙을 문답 형식으로 서약하게 했다고 한다(http://cafe.naver.com/nfantastique/1169 발췌). 그러나 규칙은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깨지기 위한 것이라는 격언처럼 클럽 멤버들조차 자주 이 규칙을 위반한 글들을 발표해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고 하는데, 아직도 추리소설의 반칙(反則)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가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이에 반해 “도로시 L.세이어즈”는 고전 추리소설의 미덕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 그런 작가라고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즉 이 책도 미신과 우연, 구성의 파격을 철저히 배제하고 논리와 과학으로 미스터리를 밝혀내는 정통 추리 소설의 풍취를 고스란히 맛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첫 시작은 판사가 배심원들에게 사건을 설명하며 유무죄 판단을 종용하는 재판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여류 추리소설 작가인 “해리엇 베인”은 동료 작가이자 연인인 “필립 보이스”와 1년 가까이 사귀다가 결혼을 요구하는 필립과 다툼 끝에 헤어지지만 그의 계속되는 요구에 지친 나머지 마침내 굴복하고 결혼이라는 결합의 바깥에서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기로 동의하게 된다. 그런데 원래부터 위통을 앓고 있던 필립은 치료차 요양을 가게 되고, 상태가 좋아져 다시 돌아와 해리엇의 집에 들려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몸 상태가 매우 안 좋다며 한 시간 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심한 구토와 고열로 고생을 하다가 그만 숨을 거두게 된다. 검시(檢屍) 결과 필립의 몸에서 맹독성 물질인 비소(砒素)가 검출되고, 경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해리엇이 사건이 일어나기 몇 달 전 여러 차례에 걸쳐 비소와 독극물을 구입했으며, 마침 비소를 이용한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을 집필 중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어 재판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정황이나 증거 상 해리엇이 범인인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의 의견이 분분하면서 의견 불일치 판정을 내리고 재판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여기 해리엇의 무죄를 믿는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방청석에서 이 재판을 구경하던 명탐정 “피터 윔지” 경이었다. 그녀의 강렬한 눈빛에 매료된 피터는 그녀가 결코 범인이 아닐 것이라고 직감하고, 해리엇 변호인단에 자진 합류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고, 구치소에 수감된 해리엇을 면회하고는 엉뚱하게도 그녀에게 무죄 입증을 조건으로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청혼하기에 이른다. 다음 재판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사심(私心) 가득한 피터는 과연 주어진 시간안에 그녀의 무죄를 입증해낼 수 있을까? 그녀가 죽이지 않았다면 누가, 어떤 방법으로 필립에게 비소를 먹게 했을까? 피터는 “귀족”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재력을 십분 살려 차근차근 수사해내고 마침내 진범의 정체와 그 수법을 밝혀낸다.
추리소설 규칙을 중시하는 “탐정 클럽” 회원답게 물증과 정황 증거를 통해서 범인을 밝혀내는 정통 추리를 선보이는 이 작품은 앞서 말한 대로 기발하고 자극적인 현대 추리소설을 즐겨하는 독자들에게는 영 심심하기만 한 그런 작품일 것이다. 트릭과 플롯이 꽤나 정교 - 물론 당시에는 꽤나 기발한 것으로 평가 받았겠지만 이런 류의 트릭은 이 작품 이후 수많은 작품에서 만나볼 수 있어 추리소설 애독자들이라면 쉽게 “예측” 할 수 있는 수준이다 - 하지만 고전 추리소설답게 그야말로 “공식”에 딱 맞춘, 즉 피터 윔지의 증거 수집과 수사 과정을 쫓다 보면 책 중반 이후에는 범인의 정체를 짐작하게 되고, 그 이후부터는 범인을 입증할 증거를 찾는 과정을 다루고 있어 허를 찌르는 반전이나 스릴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오히려 사건 자체 보다는 이야기의 설정과 전개가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최고의 지적 탐정이라 불린다는 피터 윔지가 법정의 피고인에 한 눈에 반해 그녀의 무죄를 입증해서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사심으로 사건에 뛰어들고, 귀족인 자신의 신분을 십분 살려 사람들을 고용해서 범인의 주변을 탐문하고 증거를 수집하는 한편, 심지어 범인의 집에 몰래 숨어 들어가 금고를 살펴보는 범죄까지 저지르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사하는 장면들 뿐만 아니라 명성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뜬끔없이 구치소로 찾아와 무죄를 입증할 테니 자신과 결혼해달라는 피터 때문에 어이없었을,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 그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어 난감해했을, 결국 뛰어난 추리력으로 자신을 구해낸 “영웅”인 피터 윔지를 어떻게 받아들이지 해리엇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꽤나 즐거운 상상이었다. 제목은 강렬한 미스터리를 연상시키지만 속살을 열어보면 오히려 로맨스에 미스터리를 가미한 이야기에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 이후 해리엇이 여러 작품에 등장한다고 하니 피터 윔지경과 해리엇 베인의 콤비 플레이도 기대해볼 만 하다. 다만 피터 윔지 경, 분명 인간적인 면에서도 꽤나 재미있고 추리 실력도 녹록치 않은 인물이긴 한데 이 한 권의 책으로는 그의 명 솜씨를 맛보기에는 사건이 너무 “평범”한 것 같다. 보다 더 위험하고 치명적인 사건에서의 그의 활약을 접해봐야 그의 추리 능력을 평가할 수 있을 듯 하다.
책 읽기 시작하면서 했던 이제 고전 추리소설에서 재미를 맛볼 수 있을까 했던 걱정은 잠시 잊어도 좋을 정도로 나름 재미있는 책이었다. 그래도 현대 추리소설, 특히 정교하고 기발한 트릭과 반전을 자랑하는 일본 추리소설들을 참 많이 읽었지만 아직까지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능가할 트릭과 반전은 만나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아직 고전의 맛을 잊지는 않은 듯 하다. 그렇다고 안심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자극적인 맛을 자주 보다 보면 고전의 묘미를 금세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은 자꾸 편향되는 입맛 “정화” 차원에서라도 고전 작품들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행히 요새 추리 소설 붐에 발 맞춰서 다양한 고전 작품들이 출간되고 있으니 어릴적 이름만 알고 있던 작가와 작품들을 직접 만나보는 재미와 즐거움은 계속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