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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거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1년 9월
평점 :
가장 최근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東野圭吾)” 작품이 지난 2011년 2월 <플래티나 데이터>였으니 이번에 읽은 <새벽 거리에서(원제 夜明けの街で / 재인 / 2011년 9월)>로 근 7개월 만에 다시 만난 셈이다. 동생 덕분에 <용의자 X의 헌신>으로 처음 시작해서 푹 빠졌었다가 최근에는 좀 띄엄띄엄 했는데 그래도 책장에 읽은 책, 안 읽은 책 합쳐 그의 책이 14종(권수로는 17권)이나 되니 아마도 일본 작가들 중에서는 가장 많은 권 수의 책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작품마다 편차가 있긴 하지만 어느 것을 선택해도 평균 이상의 재미는 보장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그래도 꾸준히 읽어온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작품도 별 거부감 없이 쉽게 시작할 수 있었고, 다 읽은 지금 짧게 평을 해보자면 역시나 그만의 재미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작품이었다.
불륜을 저지르는 놈만큼 멍청이는 없다고 생각해왔던 내가 그 대사를 나 자신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다는 처지에 놓였다는 책 첫 머리의 문구가 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하면 과언일까. 불륜을 멍청한 짓이라 생각하던 한 중년 남자가 그 “멍청한” 짓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이야기라면 그냥 로맨스 이야기에 지나지 않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 소설 작가답게 미스터리를 교묘하게 결부시킨다. 로맨스와 미스터리의 결합, 그러나 불륜이라는 로맨스와 공소시효 만료가 얼마 남지 않은 살인사건에 얽힌 비밀이라는 미스터리의 조합은 이 책이 범상치 않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는 예감을 절로 들게 만든다. 본격적으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추석 연휴가 끝나고 처음 출근한 날, 올해 서른 한 살의 “아키하”가 비정규직 여사원으로 입사한다. 전기과 주임인 나(“와타나베”)는 비정규직 사원이 들어오는 것이 드문 일도 아닌데다, 잠시 후에 있을 회의 때문에 머리가 아주 복잡해서 그녀를 그저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버린다. 그 이후 주말에 환영식이 열렸지만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일은 거의 없었을 정도로 무관심했다. 그러던 어느날 대학 시절 친구 세 명과 술을 마시고 같이 어울려 야구 연습장으로 갔다가 연습장 한 타석을 차지하고 배트를 휘두르는 아키하를 발견한다. 인사 끝에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까지 가게 된 아키하는 혼자서 똑바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취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업어서 그녀의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는데, 그만 그녀는 윗옷에 토하고 만다. 이게 인연이 된 그녀와 나는 점점 가까워지고, 어느새 ‘멍청한’ 짓이라고 부르는 불륜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혼하고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남자”로서 매력이 없는 40대 “아저씨”가 되어 버린 나에게 아키하는 잃어버린 남자의 모습을 되찾아 준 그런 존재였다. 딸 교육에 여념 없는 아내를 보면 죄스럽기까지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녀를 포기할 수 없어 아내와 이혼할 결심까지 하게 될 정도로 아키하에게 푹 빠져 버린다. 그런데 아키하에게 비밀이 있었다. 15년 전에 아키하의 집에서 아버지의 비서이자 연인이었던 “혼조 레이코”라는 여성이 가슴에 칼을 맞아 숨진 채로 발견되고, 그 시신의 첫 목격자가 바로 아키하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사건은 강도 살인으로 종결되지만 이제 공소시효 만료가 얼마 안남은 시점에 경찰이 그녀의 “애인”이었던 나를 찾아와 이것 저것 캐묻고, 살해당한 여인의 동생은 범인이 바로 “아키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점은 아키하도 가타부타 없이 공소 시효 만료날인 3월 31일이면 모든 것을 말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아내와의 이혼을 결심한 나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과연 그녀가 범인이었다면 나는 그녀와의 만남을 계속할 수 있을까. 아니면 여기에서라도 만남을 그만두어야 할까. 그런데 처음에는 아내와의 이혼을 만류하던 아키하가 갈수록 더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던 중 마침내 공소 시효가 끝나는 그날이 오고야 만다.
15년 전에 일어난 살인사건과 공소시효가 끝나면서 드러나게 되는 충격적인 진실은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기막힌 재미를 선사한다. 그런데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식 “미스터리”보다도 그가 선보인 “불륜” 스토리에 더 큰 재미와 함께 공감까지 느꼈다면 너무 엉뚱한 것일까. 주인공 와타나베는 유치원에 다니는 이쁜 딸과 그녀의 교육에 여념이 없는 아내, 그리고 안정된 직장에 다니면서 업무 때문에 가끔 스트레스를 받는 평범한 41세의 남자이다. 즉, 지금 내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그런 남자인 것이다. 불륜을 멍청한 짓이라고 비웃으면서도 막상 자신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자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리는, 어쩌면 모 방송국 드라마인 “사랑과 전쟁”의 단골 주제로 수도 없이 보아온 그런 이야기인데 히가시노 게이고는 남성성을 잃어버리고 “아저씨”로 살아가는 중년 남자들에게 젊은 시절의 남성으로서의 존재감을 다시금 일깨우고 낯간지럽기만 하다고 느꼈던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존재야말로 얼마나 치명적으로 위험한 것인지를, 견고하다고 믿은 가정의 행복이 사실은 얼마나 쉽게 깨져 나갈 수 있는지를 주인공 또래의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고개를 끄덕거리게 할 만큼 개연성 있고 사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책을 읽으면서 어느새 나는 “와타나베”에 올곧이 감정이입이 되어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거라는, 심지어 결말에 이르러 아키하가 범인으로 밝혀진다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하고 고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면서 이렇게까지 푹 빠져 버린 나 자신에게 그만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어쩌면 이 책에서 눈을 뗄 수 가 없었던 것은 15년 전 살인사건의 숨은 진실이 아니라 와타나베의 사랑이 어떻게 결말을 맺을지가 더 궁금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미혼의 젊은 남녀가 아름다운 로맨스를 읽으면서 행복한 사랑을 꿈꾼다면 나와 같은 중년 남성들에게는 머릿속에서는 아내가 아닌 다른 이성과의 불륜이 주인공이 “멍청한 짓”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충분히 깨닫고 있으면서도 가슴 속 깊은 어딘가에는 불륜이 주는 위험하고 치명적인 매력에 대해 한번쯤은 빠져보고 싶다는 “일탈”에 대한 욕망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미스터리를 창조해내는 실력 또한 발군이지만 중년 남성의 숨은 욕망을 끄집어내어 쥐락펴락 할 줄 아는 히가시노 게이고, 역시 결코 녹록치 않은 작가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 나 같은 중년 남성들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책이다. 아무래도 이 책, 책 표지에 “중년 남성들은 조심히 읽기 바랍니다” 라는 경고문이라도 붙여야 되는 것은 아닐까?
다 읽고 나서 영 아내 얼굴 보기가 민망해 자꾸 시선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혹 이 서평을 아내가 읽는다면, 또는 나중에 아내가 이 책을 보고 그런 내 모습을 떠올린다면 “소설은 소설일 뿐 오해하지 맙시다”(“개그는 개그일 뿐~” 의 운율로 읽어주길 바란다^^)라고 싹싹 빌어야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냥 소설 읽으면서 잠시 딴(?) 생각해 본 건데 억울하다는 생각은 왜 드는지 괜히 짤려서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별 짓을 다한다^^. 각설하고 그동안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중 최고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어느 작품보다도 몰입감이 뛰어났던 - 물론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일 수 있겠지만 - “재미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