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훔친 29가지 이야기 - 달나라 사기극에서 허무 논문까지
하인리히 찬클 지음, 박소연 옮김 / 말글빛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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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자라면 항상 근엄한 표정으로 오직 과학적 증거만을 토대로 정확한 사실만을 다루는 걸로 생각되어진다. 물론 사적 이익 때문에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된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몇몇 사이비 과학자에게나 해당되는 예외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과학자들이 종종 거짓논문을 백과사전 속에 몰래 집어놓는 것을 즐긴단다. 이를 전문용어로 “잠수함” 또는 “허무논문”이라고 부른다는데 거짓이 들통나지 않게 표제어를 멋스럽게 만들어 넣고, 실상은 모두 거짓을 쉽사리 그럴싸한 표현들로 설명해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런 잠수함이 위키피디아에 38개나 공개되어 있다니 그동안 과학자들에게 가졌던 환상이 와르르 무너져버린다. “과학을 훔친 29가지 이야기(하인리히 찬클 지음 / 도서출판 말글빛냄 / 2010년 4월)”은 이런 황당무계하면서도 재밌는 과학적 유머 29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책에서는 천문학, 물리학, 수학, 화학, 공학, 정보학, 인류학, 생물학, 의학 분야에서의 기이하고 특이하며 놀라운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몇가지만 요약 소개해보자. 

 - 1975년 미국 물리학자 헤더링톤은 발표할 논문을 검토하던 중 자신 단독 발표임에도 논문에 “우리”라는 단어가 쓰인 것을 지적받는다. 그는 단어를 수정하기 싫어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를 공동 저자로 삽입하고 1980년에는 고양이 이름을 독립하여 논문을 발표한다. 이 고양이 이름은 “역사적인 고양이 목록”에 올라갈 정도로 유명해진다.

- 1897년 미국 인디아나 연방국 정부는 원주율 파이를 상수 3.2 변경한다는 “인디아나 파이법안”을 제출한다. 또한 1998년 앨라바마시 입법부는 성경을 근거로 파이를 “3”으로 변경한다는 법안을 제출한다. 결국 만우절 장난으로 드러났지만 정말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건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 한때 인터넷에 유머로 등장했던 산타클로스 물리학은 1990년 핀란드의 학자들이 매해 산타클로스에게 떠맡겨진 작업들을 과학적으로 계산한 한 논문에 근거한 이론이다. 총 배송시간 31시간 동안 1초당 822.6 곳의 집, 1,046 킬로미터를, 3,000배의 음향 속도로 12,000톤의 화물을 싣고 이동해야 한단다.

- 호주 멜버른의 “맥펄라인 버넷 연구소”는 연구소에 비치되어 있는 티스푼이 왜 사라지는 가를 연구해서 2005년 12월 명성 있는 과학 저널 <BMJ>에 발표한다.

- 2002년 9월 영국의 <더 썬>지는 국제보건기구(WHO)를 인용하여 ‘2202년에는 금발이 사라진다“고 보도한다. 결국 WHO가 그런 연구를 하지 않았다고 발표하면서 논란은 수그러드는 듯 했지만 2006년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와 이탈리아 <라 데푸블카>에도 유사한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독일의 유력지 <슈피겔>지에서도 ”이미 원시인들은 금발을 좋아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하기까지 한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사건 이외에도 기상천외하고 허무맹랑한 과학적 유머 -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계보가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라는 미싱링크(Missig Link)나 거인 유골 같은 경우는 물론 유머를 넘어선 사기라 할 수 있다 - 들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1995년 이래로 이러한 허무 논문들을 공개하면서 전적으로 진지하게 그 기사를 다루고 있는 특별한 잡지를 출판하고 있는데, 이 잡지 출판위원회는 매년 “이그Ig 노벨상”(안티 노벨상, 합당하지 않은 또는 굴욕적인 노벨상)을 진짜 노벨상 수여자가 발표되는 시점인 10월에 시상하기도 하고, 이 상을 받은 수여자는 수상 소감을 반드시 일곱 단어로만 발표해야 하며, 실제 수여자가 무대 위로 흩날리는 종이 장식을 비질하는 일을 한단다. 시침 뚝 떼고 거짓 논문을 발표하는 과학자들이나 그런 논문들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단체나 이래저래 요지경 세상이다. 자신의 사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사기 논문을 쓴 것이 아니라면 그저 딱딱한 과학 탐구에서 잠시 숨 돌리게 하는 유머 정도로 받아들일 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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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지 않는 진실 : 빈곤과 인권
아이린 칸 지음, 우진하 옮김 / 바오밥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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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나랏님도 구제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빈곤문제는 절대 권력자인 임금도 어찌할 수 없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빈곤문제에 소홀히 하는 권력자들에 대한 면죄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쪽에서는 다이어트와 음식물 쓰레기로 천문학적인 돈을 쓰고 한 쪽에서는 단 몇 센트의 돈이 없어서 굶어죽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더 이상 빈곤은 체념과 외면으로 미뤄두기에는 너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과연 빈곤은 인류가 영원히 해결하지 못하는 숙제로 치부해야만 하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일까? 지난 2008년 광우병 소고기 반대 촛불 시위에 대한 공권력 남용 문제를 제기해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세게 최대의 인권단체 국제 엠네스티(Amnesty Inter -national)의 사무총장인 아이린 칸은 그녀의 저서 “들리지 않는 진실 - 빈곤과 인권(바오밥, 2009년 11월)”에서 더 이상 빈곤을 이대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빈곤의 종식을 인권존중의 으뜸가는 과제로 설정하여 본격적인 퇴치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녀는 빈곤이란 인권에 대한 부정이며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하며 빈곤을 인권이란 관점으로 바로 보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힘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게 책임성을 부여하는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논의의 중심에 진입하게 되고 자신을 가난하게 만드는 조건들에 맞서 싸울 존엄을 갖게 된다는 뜻이며 인권은 힘을 가진 자들이 선입관과 편견 없이 행동할 의미를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차별과 불평등을 해결한다고 이야기한다. 책에서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고, 빈곤의 원인이자 결과인 차별을 철폐해야 하며, 빈곤 문제를 왜곡하는 여러 논쟁들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통해 왜곡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빈곤과 차별로 수없이 죽어가는 산모들의 의미없는 희생을 하루속히 줄여야 하고, 10 억명이 넘는 도시 슬럼 거주민들에 대한 안전한 주거권과 생활개선, 직접 참여가 보장되어야 하며. 천연자원 개발로 오히려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더욱 빈곤해지는 주민들에 대한 법적, 경제적 권리 보장이 시급하고. 빈곤퇴치를 위한 합법적 권한 부여, 국제적인 협조와 함께 그들이 서로 뭉쳐서 행동할 수 있도록 법적 보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녀는 마지막 장에서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이 인권문제야 말로 빈곤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중심에 서야 하며, 진정으로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인권 문제에 대해 참여에 대한 권리, 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차별 철폐와 같은 포괄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책에서 예로 든 수 많은 사례 중 남아공에서 다섯 명의 자녀가 있는 로지라는 여인이 남편에게 상습적으로 구타를 당하다가 결국 심하게 맞아 죽고말았는 데 세계 최고 수준의 가정 폭력 보호 법률과 가정폭력 상담소가 있음에도 경찰에 보호를 요청하지 못한 이유가 도움을 요청하러 갈 차비조차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례는 빈곤이 인간으로써 보호받아야 할 권리까지 누리지 못하게 하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책에서는 방글라데시, 중국, 인도, 아프리카 등 인권 후진국가들에 대한 많은 사례가 등장하지만 빈부격차가 더욱 커지고 있는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아직도 경제 성장만이 궁극적으로는 소득 불평등과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실제로 전반적인 경제성장을 경험한 국가에서 오히려 정상적인 삶의 필요조건들이 평등하게 채워지지 않는 경우를 더 자주 볼 수 있다”고 말하며 “성장에만 기댄 정책은 너무 위태롭다. 성장이 멈추고 나면 생활의 안정을 이루었던 수 백만명의 생활이 빠르게 붕괴될 것이며, 가장 취약한 계층이 겪게 될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가한다. 실제로 IMF와 최근 세계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중산층의 붕괴와 빈곤층의 확산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겪었던 우리 상황 그대로이지 않은가. 또한 그렇다면 부자들을 증오하라는 말이냐 하고 묻는 사람들에게 “부자가 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최고의 수준의 학교에 들어가고 최상의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소득 때문에 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권리가 결정되는 현실이 무서운 것이다”라고 답변한다. 그리고 그동안 경제성장을 위해 인권을 제한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존중하는 것과 가난한 사람들이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그들을 억압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발전 전략”이라며 구체적 사례를 들어 그들의 변명을 무색하게 만든다. 한편 용산 참사와 같은 대형 참사를 일으켰던 철거문제에 대해서도 권력자들이 “바로 그들을 범죄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원래는 그들의 유권자들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범죄자가 되어버리면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녀의 이야기가 우리나라의 특정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에 바로 해당되는, 어쩌면 그들이 읽으면 영 불편한 그런 이야기를 이 책에는 잔뜩 담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는 이래저래 국제인권단체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촛불시위 당시 과도한 공권력 행사, 용산참사, 대규모 토목 사업, 인터넷 통제 , 방송 권력 장악 저지를 위한 방송사 장기파업에 이르기까지 인권위원회를 독립 기관으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인권 실천국가 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일들로 주목을 받고 있다. 어렵게 쌓아 올린 인권의 탑이 이대로 무너져 수십년 전으로 후퇴할 것인지 아니면 새롭게 더 놓이 쌓아가게 될지 국제 단체 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길 바란다. 그 어느 나라의 국민보다 민주와 인권의 소중함을 직접 몸으로 느껴온 국민들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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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택광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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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 내내 노트에 책에 나오는 글귀들을 적어가면서 이 책 “인문 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이택광 지음/글항아리/2010년 4월)”을 씨름했건만 결과는 처절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론은 없지만 언제나 이론은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며,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이정표라는 서문 “이론은 근육이다”를 읽으면서는 모처럼 제대로 공부해볼만한 그런 책을 만났구나 하는 지적 호기심까지 들었었다. 특히 인기존의 정치 지형도에서 합의한 우파와 좌파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주체이자 우파와 좌파 이념 모두를 회의하는 독특한 사유의 주체가 “인문좌파”라는 작가의 소개에는 우파와 좌파의 이론을 아우르면서 그 것에서 새로운 사유를 끌어내는 새로운 인문학적 조류에 대한 해설을 담은 책으로 부족했던 인문학적 지식을 채울 수 있는 기회겠구나 하는 묘한 흥분까지도 느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유효성과 현대적 해석의 변천과정을 이야기하는 서론 격인 제1장을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생소한 학자들의 이론에 대해서 다루는 중반부 이후부터는 읽는 내내 작가가 말하는 “인문좌파”적 소양이 턱없이 부족함을 절실히 느꼈다. 

여기서는 그나마 이해했던 제 1장 “마르크스를 죽여? 살여?”에 대해서 이야기해본다.

작가는 1990년 소련 공산주의 체제 붕괴의 이제는 죽어버린 이론으로 멸시되는 마르크스 주의는 “현실을 이해하고 이를 더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기 위한 열망이 존재하는 한 여전히 유효”하며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마르크스도 유령처럼 이를 따라 다닐 것”이며 새로운 문제를 인지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모든 이데올로기는 원칙으로 동등하며 마르크스 주의와 자유주의는 서로 보완적 이데올로기로서 공존할 수 있다고 보며 반공이나 전체주의처럼 다른 이데올로기 자체를 억압함으로써 자기 논리를 확보하는 이데올로기들은 내재적 한계에 부딪혀 스스로 붕괴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마르크의 가르침은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그 ‘삶의 과정’을 존중하라는 것에 있으며 그러면 우리의 다채로운 이데올로기의 프리즘을 통해 진실에 다가갈 통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카메라 옵스큐라(그림 등을 그리기 위해 만든 광학 장치로, 사진술의 전신)처럼 거꾸로 인식되는 현상으로 보고 인간은 인식, 관념 따위의 생산자인데, 오히려 이데올로기는 의식이 우선이고 인간존재가 그 다음일 것 같은 착시현상, 오류의식 이며 물질토대를 만들어 내는 그 존재(인간)만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관념을 통제하고 세게의 변화를 주도하는 존재로 물질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야말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인식이 현대에 이르러 변화하면서 루카치, 칼 코르쉬의 서구 마르크스 주의(신좌파), 경제 토대를 강조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이념의 역할을 강조한 자유주의 철학을 결합시켜 해석한 “그람시”, 이데올로기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 외부에서 그것을 주입시키는 거푸집으로 본 루이 알튀세르, 구조의 개념을 연결되어 잇지만 분절되어 있는 “절합”, 즉 코드화와 탈코드화로 해석한 스튜어트 홀 등으로 발전해간다. 일종의 서론이자 개론인 1장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작가가 설명하고자 하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구조주의라 불렸던 이론들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등장한 경향”들의 학자들인 “알튀세르”, “벤야민”, “라캉”, “지젝”, “데리다”, “랑시에르”들의 다양한 이론을 소개하고 비평하고 있는데 인터넷으로 이름들을 검색하고 노트에 정리해가면서 읽어도 결국 이론들의 맥락과 흐름을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이 책에 대한 평점은 박할 수 밖에 없는데  책의 가치가 낮은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좌절한, 작가의 지적 수준에 못미친다는 내 자신의 열등감과 질투심에 의해서일 것이다.

 이 책은 인문학적 지식, 특히 1960년 이후 마르크스 주의의 신경향에 대한 이론적 소양이 기본적으로 갖춘 사람들에게는 길라잡이로서의 충분한 역할을 하는 책이겠지만 소양이 부족한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입문 자체부터 어려운 좌절의 책 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좌파 이론에 대한 관심과 새로운 지적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을 유발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일 수 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여러 학자들에 대해서 차근차근 공부하고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묘한 전투의욕(?)을 자극하는 이 책은 앞으로도 여러번 꺼내서 읽어보고 다시 좌절하고 다시 의욕을 불태우면서 하나하나 지적 외연을 넓히는 그런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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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out 2010-05-11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드미르님, 분투하셨군요.. 저도 서문을 보고 용감하게 '드디어 이참에..!'라고 기대했건만 1장에서 좌절하고 그만 속상해서 덮어놓고 있는 중입니다. 뭐랄까.. 작가가 저와 같은 보통의 독서가를 염두에 두고 쓴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얼떨결에 인문분야에 신간평가단 하고 있는 상황이 갑자기 무지 부담스러워지고 말예요. 그래도.. 끝까지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있는데 1장의 느낌이 끝까지 계속될 거 같아서 이미 한풀 꺾여버렸어요..

레드미르 2010-05-12 16:02   좋아요 0 | URL
저도 의무감에 서평쓰긴 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의무감에 쓴 그런 서평이라 이렇게 어려운 책을 가이드라고 내놓는 작가에게 괜히 질투심도 나고 제 지적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되나 싶어 화도 나고 그랬습니다. 시한에 쫓겨 읽어내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니라 좀 멀리보고 관련 내용들 공부해가면서 차근차근 읽어봐야 할 그런 책을 만난것 같네요^^ sprout님이나 제가 느낀 느낌들 대부분이 공감할 거라고 생각하자구요^^ 기운내시기 바랍니다.
 
소설 무소유 - 법정스님 이야기
정찬주 지음 / 열림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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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국민을 슬픔에 잠기게 했던 일들이 계속되더니, 올해 3월 “무소유”의 저자이자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셨던 법정스님이 입적하시면서 다시 한번 큰 슬픔에 빠졌다. 아직도 그분들의 말씀과 가르침이 필요한 시대에 그렇게 훌쩍 떠나셔버린 그분들이 서운하고 야속하기까지 하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하여 달라”시고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던 자신의 글 조차 말 빚이니 절판하라는 유언을 남기시며 가시는 마지막까지 무소유의 삶을 몸소 실천하신 법정스님, 그동안 그분의 말씀은 책을 통해 익히 들어왔지만, 그분의 삶에 대해서는 막상 알고 있는 게 없어 아쉬워하던 차에 그분의 삶을 소설로 엮은 정찬주의 “소설 무소유(열림원, 2010년 4월)”을 만났다. 출가에서 마지막 열반에 드시기까지 스님의 삶을 올곧이 담아낸 이 책을 통해서 스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던 “무소유”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제대로 만나볼 수 있었다.  

 책에서는 스님이 출가하기 위해 고향인 전남 해남을 떠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스님이 되려고 절로 간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친구 집에 다녀오겠다고 어머니께 말하고 집을 나선 청년 법정은 강원도 월정사로 가기 전 서울 종로 대각사에 하룻밤 묵으러 갔다가 폭설에 발길이 묶여버리고 대각사에서 큰 스님 효봉 스님을 만나 “생일에 불도佛道가 들어있구나”라는 말씀과 “부디 수행을 잘하여 법의 정수리에 서야 한다”는 뜻의 법명 법정法頂을 내려받고 효봉 스님의 시자侍者로 불가에 입문하게 되고 스님을 모시면서 평생의 화두가 되었던 “무無” 자 화두와 스님의 청빈하고 검약한 삶을 통해 무소유無所有 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팔만대장경이 빨래판과 같다는 어느 아주머니의 말에 국보이자 법보인 대장경판 이었지만, 뜻이 일반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을 때는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깨달음을 얻고는 경전 공부에 정진하게 되고, 학문의 성취가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불교계의 숙원이었던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글 솜씨가 알려지면서 신문이나 잡지 등에 자신의 글을 기고하게 되면서 세상과 소통하게 된다. 삼천 배에 대한 글이 오해를 사면서 산문을 떠나 서울 다래헌 茶來軒 에 기거하면서 ‘본질적으로 내 소유란 없다. 그저 한동안 내가 맡아 가지고 있을 뿐이다’로 유명한 수필집 “무소유”를 집필하고 불법수행과 글쓰기를 하다가, 인혁당 사건에 큰 충격을 받고는 송광사로 내려가 뒷산 중턱에 불일암佛日庵을 짓고는 세상 명리를 잊은 채 17 년간 자연을 벗 삼아 수행과 글쓰기에 정진한다. 그 후 스님은 강원도 화전민이 버리고 간 오두막 수류산방水流山房과 너와집 일월日月庵에서 사시면서 세상의 잘못에게는 죽비처럼 준엄한 꾸짖음을, 착하고 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한없는 사랑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맑고 향기로운 삶을 사시다가 세상나이 79세, 법랍 56세로 생사의 경계마저 원래부터 없는 무소유의 경지를 이루시고는 입적하신다.  

 이 책은 불법수행에 정진하셨던 참 수행자로서, 맑은 가난과 향기로운 삶을 지향하신 참살이 스승으로서의 스님의 모습을 바로 보게 해준 책이었다. 특히 불일암과 수류산방에서 속세의 명리를 잊어버리고 산, 나무, 풀, 꽃, 산짐승 등 자연과 어우러져 수행정진하시는 모습은 작가후기에서도 이야기하듯이 그동안 그저 글 잘 쓰는 스님이시겠거니 했던 오해를 말끔히 걷어버리고 불법 수행자로서의 스님의 모습을 올곧이 만나 뵐 수 있어서 참 좋았던 대목이었다. 그러나 세상 말 빚조차 남기고 싶지 않으신 스님의 뜻에 오히려 수십 배로 치솟아버린 책 값이 보여주는 씁쓸한 현실에서 누군가가 “좋은 말씀”을 부탁하자 좋은 말씀에서 먼저 해방하라고 일갈하셨다는 일화가 더욱 가슴에 사무치게 느껴진다. 이 책이 들려주는 스님의 맑고 향기로운 삶을 통해서 진정한 무소유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깨닫고 미망에서 벗어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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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 어문학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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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나라 일본은 야오요로즈카미쿠니(八百万神國), 즉 8백만의 뭇 신들의 나라라고 스스로를 자칭한다. 이러한 만신들을 숭배하는 일본의 민족 종교 신도(神道)는 전체 인구의 95 % 이상인 1억 1천만 명이 숭배할 정도로 일본의 국교로서 자리를 잡았고, 우리보다 일찍 개항했음에도 기독교는 1 % 도 채 안 되는 100 만 명 남짓 정도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기독교가 뿌리 내리지 못한 일본에서 기독교를 주제로 한 “침묵”,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 “깊은 강”등을 써왔으며, 종교소설과 세속소설의 경계를 무너뜨린 20세기 문학의 거장으로 여러 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다는 “엔도 슈사쿠”는 특이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번에 어문학사(2010년 4월)에서 출간된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은 종교와 신, 구원의 문제에 관한 그의 일련의 문학세계를 일컫는 “엔도문학”이 형성되기 이전의 초창기 작품으로 그의 문학 세계의 시발점이 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이전에 그의 작품들을 읽어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 작품이 그의 다른 작품들과 어떠한 경향적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가 없지만 20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임에도 그가 고민해왔다는 서양과 동양의 종교문화의 차이로부터 겪은 방황, 갈등의 요소들을 어느 정도 엿볼 수는 있었던 그런 책이었다.  



 책은 기독교 유일신앙의 세계인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즉 백색인의 세계와 앞에서 말한 동시대의 온갖 만신들의 나라 일본, 즉 황색인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먼저 백색인의 세계부터 간단하게 요약해보자.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난 못생기고 사팔뜨기 소년인 “나”는 어느 날 우연히 늙은 개의 목을 하얀 허벅지로 짓누르며 학대하는 하녀 이본느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청교도적인 일상에서 일탈하는 그런 쾌락을 느끼게 된다. 대학에서 엄격한 종교적 신념 속에서 생활하는 신학생 “자크”를 만나면서 유일 신앙인 기독교에 대하여 더욱 반발심을 느끼게 되고, 그의 사촌 여동생인 “마리 테레즈”를 그리스도를 배신한 유다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그녀를 쟈크가 그렇게 가지 말라고 당부하던 무도회장에 데려간다.  

나의 입가에는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자크에게 있어서 유다가 누구인지, 나는 그때 알았던 것이다 (P.47). 어쨌든 그 여자는 쟈크에게 작은 비밀을 지니게 된 것이다. 작은 비밀은 다른 거짓말, 다른 비밀을 낳고, 그것은 이 배신의 골짜기를 울리면서 무너져 내릴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P.50) 

그로부터 3년 후 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게 되면서 “나”는 게슈타포 통역사로 일하게 되고 그 곳에서 레지스탕스 연락관으로 일하던 신부 “자크”를 만나게 된다. “나”는 종교적 신념과 정의를 부르짖는 쟈크를 비웃으며 마리 테레즈를 잡아와 고문실 옆방에서 그녀에게 위해를 가해 예수를 배신한 유다처럼 그에게도 배신을 강요하지만 그는 고문과 더럽혀지는 그녀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만다.  

백색인의 세계가 기독교적인 세계관 내부에서의 갈등에서 비롯된 악을 이야기한다면 황색인의 세계에서는 운명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는 세계에서의 구원과 믿음에 대한 정반대의 종교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8년전 한순간의 욕정에 의해 파문당한 신부 듀랑은 성당의 후배 신부인 브로우 신부의 보살핌으로 근근히 살아간다 . B29가 일본 영토를 직접 폭격하는 전쟁의 막바지 무렵, 듀랑은 자신의 가지고 있는 권총이 발각될까 두려워 브로우 신부의 사제관에 몰래 숨어들어 권총을 숨겨놓고, 거짓 투서를 보내 결국 브로우 신부는 잡혀가게 된다. 그러면서 이 낯선 땅에서의 기독교의 구원과 배신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괴로워하게 된다. 

선교한지 12년, 비로소 오늘 나는 이방인의(즉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행복을 알았다. 그것이 행복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단언할 수 없다. (중략) 그것은 하느님과 죄에 무감각한 눈이고, 죽음에 대해 무감동한 눈이었다.(중략) 오늘부터 나는 구원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껏 내가 자라온 백인들의 방법과는 전혀 상반된 이방인의 방법을 통해서 일 것이다. 그 멍하고 생기 없는 눈으로, 서서히 하느님을 잊고 죄를 거듭 지으면, 결국 죽음에 대해서도 무감동해져 갈 것이라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P.168)

일본인들은 하느님의 존재와 상관없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죄의 고통, 구원에 대한 갈망, 우리 백인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게, 애매모호한 상태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가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중략). 금빛 털이 나 있는 손등은 분명히 백인의 손이었고, 하느님을 믿든지, 미워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백인종의 손이었다, 나는 황색인이 될 수 없었고, 이 피부색 또한 바꿀 수 가 없었다. -(P.191) 

작가는 동, 서양의 종교적 세계관의 차이를 백색인의 세계와 황색인의 세계로 정의하여 모든 인간 운명의 배후에는 신의 은밀한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믿는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그 섭리조차도 하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동양적 - 엄밀하게 말해서는 일본 - 세계관의 차이 때문에 확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듀랑이 백인들의 방법과는 다른 구원의 방법을 찾았음에도 결국 자신의 피부색을 바꿀 수 없다고 독백하는 부분에서 이미 운명으로 결정되어 결코 좁혀지지도 않고 넘을 수 없는 두 세계의 간극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엿볼 수 가 있었다. 서로 다른 종말과 구원에 대한 인식, 범신론의 세계는 결국 유일신의 세계에 정복당할 수 밖에 없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간격을 좁히기 위한 인위적인 행동에서 비롯된 갈등보다는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평행의 길을 걸어가자는 것이 작가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종교 간의 차이와 갈등에 관심을 두고 출발했던 작가의 문학관이 과연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그의 문학세계에 있어 본격적인 작품들이 더욱 궁금해졌다. 물론 아직 문학의 방향성이 정립되지 않은 초창기의 작품이어서 이 작품을 통해 엔도 슈사쿠 전체를 이야기하기에는 비약이 심하겠지만, 적어도 엔도 슈사쿠 문학 전반을 꿰뚫는 주제라는 종교에 대한 그의 고민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는 이 책이 손색이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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