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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 어문학사 / 2010년 4월
평점 :
이웃 나라 일본은 야오요로즈카미쿠니(八百万神國), 즉 8백만의 뭇 신들의 나라라고 스스로를 자칭한다. 이러한 만신들을 숭배하는 일본의 민족 종교 신도(神道)는 전체 인구의 95 % 이상인 1억 1천만 명이 숭배할 정도로 일본의 국교로서 자리를 잡았고, 우리보다 일찍 개항했음에도 기독교는 1 % 도 채 안 되는 100 만 명 남짓 정도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기독교가 뿌리 내리지 못한 일본에서 기독교를 주제로 한 “침묵”,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 “깊은 강”등을 써왔으며, 종교소설과 세속소설의 경계를 무너뜨린 20세기 문학의 거장으로 여러 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다는 “엔도 슈사쿠”는 특이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번에 어문학사(2010년 4월)에서 출간된 “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은 종교와 신, 구원의 문제에 관한 그의 일련의 문학세계를 일컫는 “엔도문학”이 형성되기 이전의 초창기 작품으로 그의 문학 세계의 시발점이 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이전에 그의 작품들을 읽어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 작품이 그의 다른 작품들과 어떠한 경향적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가 없지만 20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임에도 그가 고민해왔다는 서양과 동양의 종교문화의 차이로부터 겪은 방황, 갈등의 요소들을 어느 정도 엿볼 수는 있었던 그런 책이었다.
책은 기독교 유일신앙의 세계인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 즉 백색인의 세계와 앞에서 말한 동시대의 온갖 만신들의 나라 일본, 즉 황색인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먼저 백색인의 세계부터 간단하게 요약해보자.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난 못생기고 사팔뜨기 소년인 “나”는 어느 날 우연히 늙은 개의 목을 하얀 허벅지로 짓누르며 학대하는 하녀 이본느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청교도적인 일상에서 일탈하는 그런 쾌락을 느끼게 된다. 대학에서 엄격한 종교적 신념 속에서 생활하는 신학생 “자크”를 만나면서 유일 신앙인 기독교에 대하여 더욱 반발심을 느끼게 되고, 그의 사촌 여동생인 “마리 테레즈”를 그리스도를 배신한 유다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그녀를 쟈크가 그렇게 가지 말라고 당부하던 무도회장에 데려간다.
나의 입가에는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자크에게 있어서 유다가 누구인지, 나는 그때 알았던 것이다 (P.47). 어쨌든 그 여자는 쟈크에게 작은 비밀을 지니게 된 것이다. 작은 비밀은 다른 거짓말, 다른 비밀을 낳고, 그것은 이 배신의 골짜기를 울리면서 무너져 내릴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P.50)
그로부터 3년 후 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게 되면서 “나”는 게슈타포 통역사로 일하게 되고 그 곳에서 레지스탕스 연락관으로 일하던 신부 “자크”를 만나게 된다. “나”는 종교적 신념과 정의를 부르짖는 쟈크를 비웃으며 마리 테레즈를 잡아와 고문실 옆방에서 그녀에게 위해를 가해 예수를 배신한 유다처럼 그에게도 배신을 강요하지만 그는 고문과 더럽혀지는 그녀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만다.
백색인의 세계가 기독교적인 세계관 내부에서의 갈등에서 비롯된 악을 이야기한다면 황색인의 세계에서는 운명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는 세계에서의 구원과 믿음에 대한 정반대의 종교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8년전 한순간의 욕정에 의해 파문당한 신부 듀랑은 성당의 후배 신부인 브로우 신부의 보살핌으로 근근히 살아간다 . B29가 일본 영토를 직접 폭격하는 전쟁의 막바지 무렵, 듀랑은 자신의 가지고 있는 권총이 발각될까 두려워 브로우 신부의 사제관에 몰래 숨어들어 권총을 숨겨놓고, 거짓 투서를 보내 결국 브로우 신부는 잡혀가게 된다. 그러면서 이 낯선 땅에서의 기독교의 구원과 배신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괴로워하게 된다.
선교한지 12년, 비로소 오늘 나는 이방인의(즉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행복을 알았다. 그것이 행복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단언할 수 없다. (중략) 그것은 하느님과 죄에 무감각한 눈이고, 죽음에 대해 무감동한 눈이었다.(중략) 오늘부터 나는 구원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껏 내가 자라온 백인들의 방법과는 전혀 상반된 이방인의 방법을 통해서 일 것이다. 그 멍하고 생기 없는 눈으로, 서서히 하느님을 잊고 죄를 거듭 지으면, 결국 죽음에 대해서도 무감동해져 갈 것이라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P.168)
일본인들은 하느님의 존재와 상관없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죄의 고통, 구원에 대한 갈망, 우리 백인이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게, 애매모호한 상태로 살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가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중략). 금빛 털이 나 있는 손등은 분명히 백인의 손이었고, 하느님을 믿든지, 미워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백인종의 손이었다, 나는 황색인이 될 수 없었고, 이 피부색 또한 바꿀 수 가 없었다. -(P.191)
작가는 동, 서양의 종교적 세계관의 차이를 백색인의 세계와 황색인의 세계로 정의하여 모든 인간 운명의 배후에는 신의 은밀한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믿는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그 섭리조차도 하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동양적 - 엄밀하게 말해서는 일본 - 세계관의 차이 때문에 확연히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듀랑이 백인들의 방법과는 다른 구원의 방법을 찾았음에도 결국 자신의 피부색을 바꿀 수 없다고 독백하는 부분에서 이미 운명으로 결정되어 결코 좁혀지지도 않고 넘을 수 없는 두 세계의 간극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엿볼 수 가 있었다. 서로 다른 종말과 구원에 대한 인식, 범신론의 세계는 결국 유일신의 세계에 정복당할 수 밖에 없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간격을 좁히기 위한 인위적인 행동에서 비롯된 갈등보다는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평행의 길을 걸어가자는 것이 작가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종교 간의 차이와 갈등에 관심을 두고 출발했던 작가의 문학관이 과연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그의 문학세계에 있어 본격적인 작품들이 더욱 궁금해졌다. 물론 아직 문학의 방향성이 정립되지 않은 초창기의 작품이어서 이 작품을 통해 엔도 슈사쿠 전체를 이야기하기에는 비약이 심하겠지만, 적어도 엔도 슈사쿠 문학 전반을 꿰뚫는 주제라는 종교에 대한 그의 고민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는 이 책이 손색이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