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싱 - 백인 행세하기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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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늘 궁금했어. 더 많은 흑인 여자애들, 너나 마거릿 해머, 에스터 도슨과 같은 애들이 왜 절대로 백인 행세를 안 하는지 말이야. 그건 정말 엄청나게 쉬운 일이거든. 그럴 수 있는 유형에 속할 경우 약간의 용기만 있으면 되거든.(p.47)


미국 시카고에서 서인도제도 출신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넬라 라슨(Nella Larsen 1891~1964)은 1920년에 뉴욕으로 이주, 흑인 문화 예술을 꽃피운 '할렘 르네상스' 시대에 많은 예술가들과 활동하며 글을 썼던 흑인 여성 작가이다. 넬라 라슨은 단 두 권의 소설을 발표하고 잊혀졌는데, 1980년대 이후 흑인 여성 작가들을 발굴하는 작업에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고, 2021년에는 원작 <패싱>이 영화로도 제작되어 현재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다. 


<패싱>은 아이린과 클레어라는 두 여성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어릴 적 친구였던 두 여성이 시카고의 고급 백인 전용 호텔에서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된다. 

아이린은 의사 남편과 두 아들을 둔 뉴욕 맨해튼 할렘에 사는 중산층 주부이다. 흑인 사회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가정의 평안와 일상의 안정을 최고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흑인이지만 엷은 피부색을 가진 그녀는 필요할 때 가끔 패싱(백인 행세)을 하지만 흑인으로서 정체성을 지니며 살고 있다. 


한편 클레어는 고아로 고생하며 자랐지만 거의 백인에 가까운 아름다운 외모로 패싱하여 부유한 백인 남자와 결혼, 상류 백인사회로 신분 상승을 한 여성이다. 그녀의 남편은 심각한 인종차별주의자로 아이린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클레어 남편이 클레어에게 '검둥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물론 남편은 클레어의 몸에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끔찍한(!) 사실은 모르고 단지 클레어의 피부가 점점 검어지는 것을 놀리는 것으로 "난 당신이 검둥이가 아닌 걸 아니까. 거기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내 가족에 진짜 검둥이는 안 돼.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없을 거야."(p.78)라고 한다.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린은 뜻하지 않게 갑자기 자신의 삶으로 들어온 클레어에게 끌리면서도 어딘가 불안하다. 남편과 뉴욕을 방문한 클레어는 할렘 흑인 사회에 관심을 보이며 남편이 출장을 갈 때마다 흑인들의 사교 파티에 등장한다. 아이린은 이런 클레어의 위태로운 행동에 불안해하며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니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해"(p.142)라며 충고하지만 클레어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럴 수가 없단 말이야. 넌 몰라, 내가 얼마나 흑인을 보고 싶어 하는지, 다시 그들과 함께 있고 싶은지, 그들과 이야기하고 그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지, 넌 알 수가 없어."(p.142)]


흑인이라는 소수자의 삶을 살고 있는 아이린에게는 '안정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바람직한 가치'(p.216)이다. 아이린은 평온함을 원하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아이들과 남편의 삶을 그들에게 최선의 방향으로 통제할 수 있기를'(p.217) 바란다.

그러나 클레어는 흑인 혐오주의자 남편에게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흑인 공동체 사회에 드나들며 다시 흑인 사회에 속하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아이린은 흑인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패싱을 통해 백인 사회로 들어갔던 클레어가 뒤늦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흑인들과 교류하며 즐기는 모습이 마음에 안들지만, 한편으로는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그녀가 부럽기도 하다. 

이러한 감정의 혼란 속에서 남편 브라이언과 클레어의 관계가 아이린을 결정적으로 뒤흔든다. 이제 클레어는 아이린의 안정된 삶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가 된다. 


[조용한 거실에 혼자 앉아 편안하게 난롯불을 쬐던 아이린은 난생 처음 흑인으로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랐다. 처음으로 그녀는 흑인이라는 짐이 너무 무거워 고통스러웠고 반항심이 들었다. 인종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여자로서, 그리고 다른 개인적인 일들로 고통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소리 없이 부르짖었다. 잔인하고 부당한 일이었다. 정말이지 검은 피부를 지니고 태어난 흑인들만큼 저주받은 존재는 없었다.(p.196)]



<패싱>은 일종의 생존 전략인 패싱을 이용해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 살아야 했던 클레어와 흑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만 때때로 자신의 편의를 위해 패싱을 하며 혹시나 자신의 실체가 드러날까 전전긍긍하는 아이린을 통해 인종 차별이 빚어내는 불행과 비극을 보여준다. 또한 계층과 계급, 중산층의 야망과 위선 등도 다루면서 외적인 모습의 패싱뿐만이 아니라 백인 중산층의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내면의 패싱을 아이린의 위선적인 삶을 통해 보여준다.  


차별받는 흑인 하층민의 삶을 다룬 소설은 읽어봤지만 흑인 중산층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은 처음이었기에 참으로 흥미롭게 읽었다.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삶은 얼마나 슬프고 고달픈가...' 책을 덮고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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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12 16: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클레어가 패딩을 하는 것도 또 자신이 태어난 흑인사회를 그리워하는것도 이해가 가네요. 물론 결국 파국에 이를 선택이겠지만 그녀 역시 어쩔수 없었을듯요. 이 책도 읽자 해놓고 또 밀려 있던 책이네요. ㅠㅠ 다시 보관함에서 앞쪽으로 꺼내야겠어요

coolcat329 2022-07-12 18:55   좋아요 1 | URL
패싱을 통해 신분상승은 했지만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버리기란 참 힘들었을거에요. 안 두꺼운 책이니 도서관에서 빌려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얄라알라 2022-07-12 16: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할렘 르네상스˝...덕분에 들어보고 갑니다^^ 쿨캣님

신선하게도 이 책은 흑인 중산층이라하시니, 조라 닐 허스턴 소설에서도 주인공 남편이 중산층이었나? 책 다시 찾아볼까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

coolcat329 2022-07-12 18:57   좋아요 2 | URL
저도 이번에 할렘 르네상스 알게 되었습니다.😁
조라 닐 허스턴도 할렘 르네상스 시대 활동했던 작가라네요. 비교해서 읽어도 좋을 거 같아요.

페넬로페 2022-07-12 16: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패싱을 영화로 봤는데 심리적인 묘사가 뛰어나더라고요.
위태롭기도 하면서 그들이 이해되기도 했어요.
소설로 읽으면 훨씬 더 섬세함을 느낄 수 있을듯요^^

coolcat329 2022-07-12 19:02   좋아요 3 | URL
영화 보셨군요. 영화보다 책에서 아이린의 클레어를 향한 분노와 경멸이 더 강하게 느껴졌어요.
상황 설정이 조금 다르지만 흑백영화 좋더라구요~

물감 2022-07-12 17: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나요.
쉽고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왜 고생을 하느냐 vs 나에게 주어진 본분을 지켜야 한다,의 대결...

coolcat329 2022-07-12 19:05   좋아요 3 | URL
물감님 별5리뷰 잘 읽었어요. 저도 참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백인 행세하는 클레어도 보통이 아니지만 소수 흑인 중산층으로서 자기 가정과 삶을 지키려는 아이린의 집착이 더 인상적이었어요.

새파랑 2022-07-12 19: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요책이랑 약간 비슷한 자매품으로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이 있습니다 ^^ 이 책 볼까 말까 고민하다 안읽었는데(내용을 이미 알아서? ㅋ) 다시 고민되는군요~!!

coolcat329 2022-07-12 19:16   좋아요 3 | URL
아 그렇군요! 휴먼 스테인 있는데 삼부작 순서대로 읽으라 하셔서 오랜 시간 계속 대기 중 입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mini74 2022-07-13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쉬운 길인것 같지만 쉽지 않은 길, 자신이 아닌 타인종이 된다는건 자신을 잃는 일. 자신을 지워버리는 일 이라 자멸할듯 위태위태한 마음으로 읽은 기억납니다 *^*

coolcat329 2022-07-13 20:12   좋아요 1 | URL
뭐든지 속이고 사는 건 참 힘든 일 같아요. 속이고 살 수밖에 없는 사회를 탓해야 할까요? 앏고 잘 읽히는 책이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책입니다.

레삭매냐 2022-07-13 19: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감정선을 자극한 영화 패싱의
느릿한 재즈 선율이 떠오르는
어느 비 오는 저녁의 단상이네요...

소설도 영화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coolcat329 2022-07-13 20:14   좋아요 2 | URL
영화,책 둘 다 보셨군요~^^
흑백영화에다 재즈까지 저도 비오는 오늘과 잘 어울리는 영화란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