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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ㅣ 밀란 쿤데라 전집 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평점 :
<정체성>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가 1997년 발표한 소설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무의미의 축제>에 이어 세 번째 읽는 쿤데라의 소설이다.
책날개에 있는 쿤데라의 두 줄짜리 유명한 작가 소개글이 새삼 반갑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다섯 살 된 아들이 죽은 후 샹탈은 남편과 이혼하고 네 살 연하의 장마르크와 살고 있다. 그녀는 장마르크와의 만남을 앞두고 홀로 노르망디 해변을 거닐다가 별안간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더 이상 남자들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 라는 샹탈의 뜬금없는 말에 장마르크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자기는 그날 아침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 곁에 가기 위해 찻길에서 치어 죽을 각오로 뛰어왔는데 어떻게 그녀는 다른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있을까?'(p.44) 라고 생각한다. 장마르크에게 샹탈의 말은 평소 자신이 생각하던 그녀와는 너무나 다른 그녀답지 않은 말이었다. 그는 곰곰히 생각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시선이 아니라 천박하고 음탕한 익명의 시선'(p.46) 이라고.
그러던 어느 날 샹탈은 주소도 우표도 없는 익명의 편지를 받는다.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p.50) 라고 적힌 편지를 받고 샹탈은 처음에 불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편지가 속속 도착하고 샹탈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그'의 시선을 점점 의식하며, '늘씬한 몸매', '디오니소스적이고, 도취한 듯한 야만적인 불꽃', '아름다운 빨간 당신이 눈에 선합니다!' 라는 '그'의 찬사에 묘한 흥분을 느낀다.
너무 화려해서 자주 하지 않았던 빨간 진주 목걸이도 '그'가 아름답다고 하자 당당히 걸고 다니고, 급기야 빨간 잠옷까지 사서 입고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이토록 늘씬한 적이 없었고 피부도 이토록 하얀 적이 없었다고' 느낀다.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샹탈을 활기차고 자신감이 넘치는 여인으로 만들고 그녀는 자신의 그런 이미지에 도취된다. 연인 장마르크와 사랑을 나눌 때도 자신을 엿보는 '그'를 상상하며 희열을 느끼는데, 장마르크는 이런 샹탈이 이끄는 대로 또 아낌없는 사랑을 퍼부으니 참 재미있다.
자신을 여신으로 찬미하는 이런 편지를 보내는 남자는 과연 누구일까...? (책 뒤에 줄거리를 읽지 않고 읽으시길 바랍니다)
당연하게도 샹탈은 '그'의 정체가 궁금해지고 주변을 살피며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반면, 장마르크는 '자기가 세계와 맺고 있는 유일한 감정적 관계가 그녀라고 생각'(p.98)하며, 그 '유일한 존재'인 그녀를 잃는다는 두려움과 자신이 알던 샹탈이 더 이상 그 샹탈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당신이 내가 상상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내가 착각을 했다는 생각." (p.99)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 확립하는 샹탈과 그런 샹탈을 보며 자신이 알던 샹탈과 자기가 모르는 샹탈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장마르크,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쿤데라는 정체성이라는 인간 실존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한 사람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생각했던 정체성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없어지는지, 나의 정체성은 과연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에 의해 형성되는 것인지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 마지막에 가서 '아...그럼 그렇지..이런 거였어?' 하게 되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정체성이란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꿈과 현실의 그 알 수 없는 경계선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다.
'익명의 사람들 속'으로 내던져 지지 않고 나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나를 바라봐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바라보고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삶의 다양한 인간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정체성은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기에 우리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샹탈의 말처럼 쉴 새 없이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 아닐까...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p.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