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요원 대산세계문학총서 53
조셉 콘라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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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요원 The Secret Agent>은 <암흑의 핵심>(1899),<로드 짐>(1900)에 이어 세 번째로 읽은 조지프 콘래드(1857~1924)의 소설이다. 모두 다 콘래드의 대표작이지만 앞의 두 소설이 그의 선원 생활의 경험이 녹아있는 작품인데 반해, 1907년에 쓰여진 이 소설은 영국에서 실제로 발생한 그리니치 천문대 폭파 미수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로 비밀요원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근대 사회를 향한 콘래드의 냉소적인 시각과 비판을 엿볼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아돌프 벌록. 그는 런던 소호에서 작고 누추한 가게를 운영하며 아내 위니와 장모, 조금 모자란 처남 스티비와 함께 살고 있다.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신의 어머니와 남동생을 부양해야 했던 위니는 애정은 없지만 경제적으로 자신의 가족을 책임질 수 있는 벌록과 결혼을 한다. 위니는 남편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조금 모자란 남동생이 남편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한다. 돌아간 아버지로부터 '등신'취급 받으며 맞으며 자랐던 동생은 위니에게 자식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렇기에 위니와 그녀의 어머니는 벌록이 스티비에게 별 관심이 없어도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벌록은 러시아 대사관의 스파이이다. 또한 영국 경찰과도 은밀히 연결되어 있는 이중 첩자이다. 그가 운영하는 가게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이곳은 나태한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서 탁상공론을 벌이는 아지트이기도 하다.  

어느 날 벌록은 러시아 대사관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일등 서기관 블라디미르로부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폭탄 테러를 벌이라는 명령을 받는다. 폭탄 테러가 발생하면 그 혐의는 급진적인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돌아갈 것임을 파악한 러시아 대사관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곳을 공격하여 '파괴적 잔인함'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에 불안을 조장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에 벌록은 당황하지만, 앞으로 대사관으로부터 무능력한 요원으로 낙인찍혀 월급도 못받게 될까봐 걱정, 깊은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한 달 후 그리니치 공원에서 엄청난 위력의 폭파 사건이 일어난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지만 이야기는 시간 순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블라디미르의 지시를 받고 고민하는 벌록의 모습 다음으로 이어지는 4장에서 이미 그리니치 천문대 폭파 미수 사건이 일어난 후로 장면이 바뀌는데, 독자로서 폭파 사건이 어떤 과정에서 일어나게 됐는지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기 보다는 폭탄을 만든 교수(professor)가 나오고, 교수를 늘 감시하고 있는 특수범죄 수사부 히트 반장, 그의 상관인 부국장 등이 나오면서 이 사건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행동과 심리에 초점이 맞춰 이야기는 심도있게 전개된다. 


<비밀 요원>은 정치 스파이 소설이다. 그러나 숨막히는 첩보원의 활약, 음모, 국가 간의 암투 등 전형적인 스파이 소설의 스릴을 기대한다면 이 소설은 지루할 수 있다. 

우선 러시아 대사관과 영국 경찰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이중 스파이 벌록만 보아도 그 환상이 깨진다. 스파이의 대명사 제임스 본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보통 스파이는 잘생긴 얼굴에 키도 크며 날렵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스파이 소설 작가들은 자신의 주인공을 아주 미남은 아니더라도 어딘지 쓸쓸함이 느껴진다거나 알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독자가 좋아할 만한 인물로 만든다. 그러나 콘래드는 참 냉정하면서도 깐깐한 작가이다. 


벌록은 '침대에서 하루 종일 빈둥거린 것 같은 분위기', '살찐 돼지', '예기치 않게 천하고, 비대하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우둔하게 생긴', '대금 청구서를 갖고 찾아온 배관공', '사기적인 게으름과 무능력의 화신' 등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매력적인 스파이의 이미지와는 극단적으로 다른 인물로 묘사된다. 국제적으로 활약하는 스파이가 어렵게 입수한 비밀 문서를 건네는 것이 아닌,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차린 그렇고 그런 가게에서 남자 손님들에게 외설스러운 사진을 은밀히 건네는 뚱뚱하고 땅딸한 스파이라니...절로 헛웃음이 나온다.


이런 벌록의 집에 모이는 무정부주의자들은 또 어떤가. 작품해설에서 역자 왕은철은 이들의 모습을 '그로테스크'하다고 말한다. 모임의 전단을 만드는 일 외에 여자 꼬시는 일이 전문인 전직 의대생 오시폰, 귀부인의 후원을 받으며 현실과 동떨어진 낙관론을 주장하는 가출옥한 미케일리스, 테러리스트로 이름은 알려져 있으나 직접 행동은 하지 않는 입만 거친 선동가 늙은이 칼 윤트가 이 소설에서 희극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무정부주의자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서로를 무시, 혐오하며 생활은 게으르고, 하나같이 경제적인 도움은 여자들에게 받는데 이런 모습들은 끈끈한 형제애와 투철한 의지로 똘똘 뭉친 전형적인 혁명가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이들 무정부주의자들과 반대편에 있는 경찰도 작가 콘래드는 비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벌록이 러시아 스파이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숨기고 그로부터 얻은 정보를 이용해 직장에서 승승장구해온 히트 반장, 미케일리스의 사상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를 후원하고 있는 귀부인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 폭탄 테러가 미케일리스와 연관이 없음을 주장, 미케일리스를 범인으로 의심하는 히트 반장과 대립하는 부국장이 그들이다. 이들에게 공직자로서 직업윤리는 없다. 다만 자신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개인적인 욕심만 있을 뿐이고, 이런 경찰의 속성과 범죄자의 속성은 '똑같은 기계에서 나온 생산품이나 다름없다'(p.113)고 작가는 말한다. 


<비밀 요원>에서 벌록 못지 않게 중요한 인물은 아내 위니이다. 이 소설은 위에서 말했듯이 시간순으로 전개되지 않는데, 8장부터는 다시 폭파 사건 전으로 돌아가 벌록 가정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위니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음에도 몸이 불편한 어머니와 약간 모자란 남동생을 생각해 경제력이 있다고 생각한 벌록과 결혼한 여자다. 그녀는 '가슴이 풍만하고 엉덩이가 큰' 매력적인 여자로 '속을 헤아리기 힘든 무관심한 표정',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침묵이 주는 자극적인 매력' 등으로 묘사된다. 그녀는 '사물의 내면을 눈여겨보지 않는 것을 자신의 철학' 삼으며 감정의 기복이 없고, '세상일이란 너무 깊이 들여다볼 가치가 없다'(p.208)고 생각한다. 

위니는 벌록에게 아내로서 의무에 충실할 뿐 어떤 관심과 애정을 보이질 않는다. '그녀의 유일한 관심은 스티비의 행복'일 뿐이다. 그러나 벌록은 자신이 사랑 받는다고 생각한다. 

매사에 깊이 따지고 드는 성격이 아닌 과묵하지만 매력적인 여자, 위니는 이중생활을 하는 벌록에겐 최고의 위장 수단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맺어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당연히 물과 기름처럼 겉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는 결국 폭탄 테러라는 예기치 않은 사건과 얽혀 엄청난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데, 작가 콘래드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거리를 지키며 시종일관 아이러니컬한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전개'(p.385 작품해설)하기에 이 모든 사건이 비장하고 슬프게 다가오지 않고 희극적이며 당연한 결론으로 독자에게도 다가온다. 


역자해설에서 <비밀 요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러니가 지배하는 작품으로 '아이러니의 방앗간'이라고 설명한다. 

작가 콘래드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재를 아이러니컬하게 다루는 길만이 내가 동정심이나 경멸감을 갖고 얘기해야 한다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제대로 얘기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p.371 작가의 말)고 밝힌다.


지금까지 읽은 콘래드의 세 작품에 모두 별5개를 주었지만, 재미 면에서는 <비밀 요원>이 최고였다. 무엇보다 거리를 둔 냉정한 내러티브와 서술방식이 <비밀 요원>을 좀 더 품격있는 스파이 소설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벌록이 폭탄 테러를 일으키라는 지시를 받은 후 과정이 시간 순으로 전개되지 않고 독자도 모르게 폭탄이 그 엄청난 파괴력으로 터져버린 상황은 독자로서 굉장한 흥미를 갖게 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여런 인물들의 심리묘사와 그로 인해 소설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아이러니는 이 소설의 최고 매력이다. 

'<비밀 요원>은 콘래드의 소설 중 가장 완벽하게 짜여진 소설'이라는 역자 왕은철의 말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콘래드의 소설이 새로 번역되어 나오길 바란다.



영화와 미니 시리즈로 극화된 <비밀 요원> 

이 외에도 다수.


히치콕 <Sabotage>(1936)





BBC TV Series (2016)







크리스토퍼 햄튼 감독 영화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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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9-23 17: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읽으셨구나. 이 작품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ㅠㅠ

coolcat329 2021-09-23 21:18   좋아요 1 | URL
아흑 참 이 세상의 부조리 불합리 제대로 보여주죠 ㅠ

새파랑 2021-09-23 17:5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와우 최고라니 ㅋ 게다가 대산문학이네요. 영화도 많이 제작되었군요. 이책 찜~!@

coolcat329 2021-09-23 21:19   좋아요 3 | URL
저 세 작품 중 제일 잘 읽혔습니다. ㅋㅋ 일단 말로가 안 나와 좀 편했습니다. ㅎ

scott 2021-09-23 17:5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콘라드 이 작품 많이 좋아합니다 .🖐^^

coolcat329 2021-09-23 21:20   좋아요 2 | URL
존 르 카레 좋아하시는 스캇님 당연히 그러셔야겠죠?!

페넬로페 2021-09-23 21: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직 조셉 콘라드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았는데 차례로 읽어야겠어요^^
이 작품이 재미도 있고 시대에 대한 비판도 함께 들어 있어 더 의미가 클 듯 해요^^

coolcat329 2021-09-23 21:25   좋아요 2 | URL
네~콘래드 작품 중편인 <어둠의 심연> 으로 출발해 보셔요~^^

han22598 2021-09-24 06: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번역가 이름은 아는 분인데, 작가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ㅋㅋㅋ 역시나 미지의 세계는 끝이 없네요..하지만 기뻐요 ^^ 이 책도 장바구니에 담아둬야겠어요 ㅎㅎ

coolcat329 2021-09-24 06:57   좋아요 1 | URL
특히 이 책은 번역가가 왕은철님이라 더 좋네요~

레삭매냐 2021-09-24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저도 이 책 읽어 보려고
수배해 두었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도 모르겠네요...

비비씨 드라마가 땡기네요.

coolcat329 2021-09-24 11:59   좋아요 1 | URL
찾아보니 영화 드라마로 참 많이 만들어졌더라고요.
이 참에 책정리하셔서 찾으세요 ㅎㅎ

얄라알라북사랑 2021-09-24 2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항상, coolcat님 그리고 다른 플친님들 멋진 페이퍼 읽으며 느끼지만, 그래서 ˝직접 읽어야˝ 하나봅니다. 저는 조셉 콘라드를 읽어본 적도 없이, 그 서구중심 시선 어쩌구 하는 비판만 기억하는지라, 제대로 읽을 준비조차 안 갖추고 있었는데 coolcat님께서 하나하나 더 깊이 들어가주시니, 반성됩니다^^

coolcat329 2021-09-25 08:10   좋아요 1 | URL
북사랑님은 건강, 음식, 산 관련 책 많이 읽으시니 저야말로 북사랑님 책 보며 좋은 정보 많이 얻습니다. ^^

얄라알라북사랑 2021-09-24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아이러니의 ....˝ ...에 올 단어들 치고는 ‘방앗간‘은 굉장히 생소하네요^^? 방앗간은 어떤 곳인지? 뭐지? 혼자 막 상상하게 만듭니다. ^^

coolcat329 2021-09-25 08:11   좋아요 1 | URL
그쵸? ㅋ 작품해설에서 어빙 하우라는 사람이 이 책을 ‘아이러니의 방앗간‘이라고 했대요. ㅎ
저는 아이러니의 보고라고 할까 하다가 그냥 방앗간으로 했네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