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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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는 아무도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건가요, 아처 씨? 진짜 고독이란 거짓 흉내만을 요구하는 이런 사람들에게 온통 둘러싸여 사는 거예요!" (p.99)


남북전쟁 이후 1870년대 뉴욕의 상류사회를 무대로 펼쳐지는 <순수의 시대>는 1921년 작가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 1862~1937)에게 여성 최초 퓰리처 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1870년대 뉴욕 상류층 가문의 변호사 뉴랜드 아처는 웰랜드 가의 메이와 약혼을 한다. 메이는 상류층의 예법과 품위를 갖춘 아름답고 순수한 여성으로, 아처는 이런 그녀와의 안온한 결혼생활을 꿈꾸며 자신의 삶에 만족해한다. 그러나 아처의 이런 마음의 평화는 메이의 사촌 엘렌 올렌스카 백작부인의 등장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한다. 

엘렌은 폴란드 귀족과 결혼하여 화려한 예술과 문화를 누리며 유럽 사교계에서 생활했으나 계속되는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자유를 찾아 가족이 있는 뉴욕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보수적인 뉴욕 사교계는 이런 그녀의 등장에 술렁이기 시작한다. 남편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여자를 바라보는 뉴욕 사회의 눈빛은 싸늘하고 급기야 그녀의 귀환을 환영하는 정찬 초대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남편을 떠난 정숙하지 못한 여인에 대한 자신들의 냉담한 뜻을 노골적으로 밝힌다. 


개인의 행복과 자유보다 상류사회의 안정과 가문의 체통을 더 중시하는 그들에게 남편을 떠나 이혼을 생각하는 엘렌은 그야말로 '집안의 명예에 먹칠을 한 여자'(p.41)일 뿐이다. 

머지 않아 메이와 결혼함으로써 엘렌과도 가족이 되는 뉴랜드 가로서도 엘렌의 이혼을 막기 위해 나서야 하는 상황. 뉴랜드는 메이의 부탁과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엘렌이 생각을 바꾸도록 나서게 되고, 이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자유로운 생각과 솔직함에 끌리게 된다. 규범과 관습보다는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엘렌의 솔직한 모습은 아처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다. 


뉴랜드는 자신의 생각에 솔직하고 가식적이지 않은 그녀를 보며 자신의 사치스러운 세계가 얼마나 단조롭고 좁은지 깨닫게 되고 아내가 될 메이의 예의바름과 격식도 가식적으로 느껴진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절대 흔들리지 않는 순수로 무장한' 듯한 메이와 자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는 엘렌 사이에서 방황하는 뉴랜드...그러나 삶은 늘 그렇듯이 뉴랜드가 행동을 하기도 전에 스스로 얄궂게 움직이고 뉴랜드는 엘렌을 사랑하면서도 메이와 결혼을 하게 된다. 


역자는 <순수의 시대>를 뉴랜드와 엘렌과의 사랑 이야기로 읽어도 좋고 19세기 뉴욕 사교계를 세밀하게 묘사한 풍속소설로 읽어도 좋다고 말한다. 또한 뉴욕 상류 사회의 가식과 위선을 비판한 풍자소설로 봐도 될 것이다. 

나는 사랑 이야기 보다는 19세기 뉴욕 상류사회의 모습을 세밀하게 시각적으로 묘사한 점이 인상 깊었는데, 무엇보다 뉴욕 상류사회가 이 정도로 보수적이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나는 뉴욕에서 7년을 산 경험이 있는데 내가 겪은 뉴욕은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타인에게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는 분주한 곳이었다. 물론 맨해튼 센트럴 파크 주변의 월세가 천만원이 넘는 부유층의 세계는 내가 잘 모르지만, 이혼을 앞 둔 여자가 오페라 하우스에 나타났다고 무슨 큰 일이 난 것처럼 술렁대고, 결혼 할 집안에 이혼녀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온 가족이 동원되어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이런 사회가 뉴욕이었다니 의외였다.

미국 동부 특히 뉴요커의 자부심은 미국 내에서도 대단한데, 19세기 뉴욕의 상류사회에 짙게 깔려있던 그들만의 전통과 자부심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당시 뉴욕 상류사회를 엿보는 재미와 함께 뉴랜드와 메이, 엘렌, 세 사람의 각기 다른 삶과 사랑의 방식 또한 이 책을 읽는 재미이다. 전형적인 상류층 여성으로서의 매너를 갖춘 메이를 사랑하면서도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고 당당하며 솔직한 엘렌 사이에서 갈등하는 뉴랜드를 보며 얼마 전 읽은 소세키 소설<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가 생각이 났다. 친구의 아내 미치요가 나타나면서 다이스케의 평온한 삶에 균열이 왔듯이, 엘렌의 등장으로 뉴랜드의 삶도 흔들리는 점, 두 사람 다 사회의 관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섣불리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점이 비슷하다. 더 재미있는건 두 사람의 선택이 극과 극으로 다르다는 점인데 <순수의 시대>는 19세기, <그 후>는 20세기 초 배경이라 아무래도 전자가 더 보수적일 수밖에 없을 듯 하다. 


1870년대 당시 뉴욕의 상류층은 뿌리깊은 역사와 전통을 가진 유럽 귀족들을 향한 열등의식 때문에 유럽에 비해 훨씬 더 보수적이었고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 개인의 자유와 행복보다는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유지와 가문의 체면을 중시했다. <순수의 시대>는 이런 시대를 사는 뉴랜드 아처라는 상류층 남성을 통해 개인의 행복과 자신이 속한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회적 관습과 규범에 매몰되어 진짜 나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사회를 비판한다. 그러나 무조건 개인의 자유만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마지막 34장에서 57세가 된 뉴랜드 아처의 회상을 통해 작가는 그가 인내한 삶의 가치를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는 결혼이 지루한 의무일지라도, 의무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에서의 일탈은 추악한 욕정과의 투쟁이 될 뿐이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러이 여기는 한편으로 슬퍼했다. 어쨌거나 흘러간 옛날이 좋았다. (p.426)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는 왠지 꼭 읽어야 할 소설 같아 그동안 볼 때마다 신경이 쓰였는데, 이번에 읽게 되서 후련하고 기쁘다. 19세기 뉴욕 상류층의 모습을 내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던 점이 가장 좋았고 마지막 34장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번역이 조금 아쉬웠는데, 서평가 로쟈님께서 열린책들 번역이 가장 좋다고 한 점을 참고하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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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7-13 21: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후련하시다니 공감팍팍입니다. 저도 읽어야지x3 했던 책이고 그런 뒤 영화도 꼭봐야지 마음먹었거든요. 열린책들로 다시찜~😊

coolcat329 2021-07-14 08:25   좋아요 3 | URL
독서여왕 미미님이 이 책을 안 읽으셨다니 의외네요 😅
영화 지금 넷플에서 하던데 저는 왜 화면이 보기싫은걸까요. 극장화면만 좋네요ㅎㅎ

새파랑 2021-07-13 21:5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이디스 워튼 작품중 이 작품이 제일 좋더라구요~!! 민음사껄로 읽었는데 번역이 아쉬운 점이 있었군요. 전 몰랐었다는 ㅎㅎ
쿨캣님 뉴옥에서 7년이나 사셨다니 완전 부럽네요 👍 저는 사회적 배경보다는 감정의 흐름에 집중해서 읽었던것 같아요~!

coolcat329 2021-07-14 08:29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은 세 인물의 심리에 초점을 두고 읽으셨군요. 이디스 워튼 작품 여러 권 읽으신걸로 알고 있는데 이 책이 제일 좋으시다니 기분이 좋습니다~

scott 2021-07-13 21: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순수의 시대 마지막 장은 두고 두고 읽어도 명문! 결말도 좋았지만 이작품을 토대로 만든 영화 속 뉴욕의 모습도 좋았네요 미국 특히 뉴욕 사교계는 socialite!사교계 명사들의 인맥으로 움직입니다 , 지금까지도 ㅎㅎ쿨켓님 뉴욕에서 7년 사셨다니 반갑 (๑^ ^๑)

coolcat329 2021-07-14 08:37   좋아요 3 | URL
마틴 스콜세지가 당시 뉴욕 상류층의 모습을 정교하게 세팅 시각적으로 참 볼거리가 많을거같네요. 아카데미 의상상도 받았으니~🙂
지금도 뉴욕은 몇몇 인물들 손에서 움직이겠죠?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잠자냥 2021-07-13 22:3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히히 저 <순수의 시대> 열린책들 버전으로 읽었어요. 고정아 번역자 이름만 보고요. 그분이 E.M. 포스터 작품 거의 다 번역하셨는데 전 거기서 반했거든요.

coolcat329 2021-07-14 08:39   좋아요 3 | URL
부럽습니당 ㅎㅎ 이 책 다 읽고 알게되서 참 아쉬웠어요. 도서관가서 열린책들 한 번 봐야겠습니다.

붕붕툐툐 2021-07-14 00:0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와~ 완전 저랑 비슷한 인물들이 나오는 거 같아서 찜해야겠습니다. 뉴욕 7년 사신거 넘 부러워요!!전 처음 보는 제목인데 댓글 다신 분들 다 읽은 거 같은 분위기에 쭈글...ㅋㅋㅋㅋㅋㅋ좋은 책 소개 감사해요!!🙆

coolcat329 2021-07-14 08:42   좋아요 3 | URL
비슷한 인물이라면 누구실까요? 거의 다 속물들인데요 ㅋㅋ
열린책들이 좋다니 참고하시구요~~^^

잠자냥 2021-07-14 09:27   좋아요 3 | URL
속물 툐툐! ㅋㅋㅋㅋ

페크(pek0501) 2021-07-18 1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작품을 하나도 읽지 않은 1인, 여기 있어요.
저도 읽어야 할 목록에 넣어야 할까 봐요. ㅋ (인기 있는 작가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에 한 표를.)

coolcat329 2021-07-24 08:06   좋아요 0 | URL
19세기 뉴욕 속물 귀족들 이야기 궁금하시다면 바로 이 책입니다~^^

잠자냥 2021-07-23 16: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쿨캣 님 요즘 알라딘 개미지옥 끊었어요? 일부러?!

coolcat329 2021-07-24 08:05   좋아요 2 | URL
어머! 잠자냥님! 깜짝 놀랐습니다. ㅎㅎ 제가 요즘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북플을 들여다보질 못했습니다. 저는 무슨 오류인지 북플 알림설정해놔도 알림이 오질않아요. 그래서 조금 뜸했습니다. 주말이라 지금 찬찬히 글들 읽는 중인데 밀린 숙제하는 기분입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잠자냥 2021-07-24 09:36   좋아요 2 | URL
저는 쿨캣 님이 정말 큰 껼심하시고 드디어(?) 이 개미지옥을 벗어나신 줄! 알았습니다. 다행입니다(?) 안 벗어나셔서 ㅋㅋㅋㅋㅋ

scott 2021-08-06 15: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쿨켓님 이달의 당선 추카~~

순수의 시대~
알라딘 장바구니 터는 시간으로 ^ㅅ^

coolcat329 2021-08-07 07:5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번 달은 독서가 너무 저조했는데 다른 분들께 죄송하네요.

초딩 2021-08-06 17: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앙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coolcat329 2021-08-07 07:58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이번달은 참 고마운 마음 뿐입니다.

새파랑 2021-08-06 19: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책인데 당선되서 기쁘네요. 완전 축하드려요 🎉💗

coolcat329 2021-08-07 07:58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이 책 좋아하시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