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물고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4월의 물고기
권지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소설을 읽을 때, 활자보다는 영상에 더 어울리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을 만날 때가 있다. 기욤 뮈소의 작품들이 그러했고, 다수의 일본소설과 장르소설들이 그러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재미는 있을지 모르나 활자 읽는 특유의 맛을 느낄 수 없다. 활자로 표현되는 내용은 보다 이지적이고 세밀하고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남녀의 사랑과 같은 이제는 한물 간 통속적인 이야기라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남녀의 운명적 사랑 이야기를 다루면서 보다 세밀하고 이지적으로 풀어낸 소설은 얼마든지 있다.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로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나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가 내게는 그런 작품들이다.

권지예의 신작 <4월의 물고기>는 두 남녀의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사랑은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남녀 주인공은 예외 없이 아름답고 고독하며 마음 깊이 아픔을 안고 사는 인물이며, 우연한 만남을 통해 운명과도 같은 떨림을 느낀다. 서인과 선우가 만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작품 초반은 이처럼 특별할 것도 없이 흘러간다. 이러한 사랑 이야기는 갤러리, 카페, 펜션, 시나몬 파우더와 같이 90년대 초반에나 먹히던 도시적 감수성과 버무려져, 입맛에 맞지도 않는 에스프레소를 뽐내며 마셔야 할 때처럼 썩 유쾌하지 못한 기분에 젖게한다. 잔뜩 멋부린 흔적이 드러나지만 활자보다는 감각적인 영상미로 표현해 내는 편이 훨씬 좋았을 그런 기교로 가득 차 있다.

운명적인 이끌림이라는 케케묵은 주제를 들고와 통속적이지 않게 풀어내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다. 권지예는 이를 위해 소설에 스릴러를 가미하는 색다른 시도를 보여준다. 남녀의 사랑과 이별에 대한 단조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았던 소설은 중반을 넘어가면서 묘한 긴장감에 휩싸인다. 주위에서 벌어지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사랑의 방해물로 등장하고, 이해하지 못할 선우의 행동들이 숱한 수수께끼를 남기는 것이다. 이 수수께끼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분명 흥미진진하고 몰입이 쉽다. 그러나 정통 스릴러 수준의 서스펜스를 기대했다가는 결말에 이르러 실망하기 십상이다.

<4월의 물고기>는 연애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통속적이고 스릴러로 보기에는 너무 뻔하다. 이 소설에 대해 가능한 최대의 찬사는 '흡인력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그 흡인력의 정체가 조금 다르다. 독자들의 뻔한 추측을 보란듯이 뒤엎는 작가의 멋진 한방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오는 그런 흡인력이다. 너무 일찍 드러나 버리는 실마리가 혹시나 트릭이 아닐까 기대하는 마음이 책장 넘기는 속도를 더해준다. 그러나 아쉽게도 결말은 이러한 기대를 좌절시킨다. 소설의 중반에서부터 이미 누구나 예측 가능한 실마리를 던져주더니 그 실마리는 전복되는 법 없이 마무리된다. 작품 후반에 이르러서는 그간 깔아두었던 복선을 주워담기에 급급하여, 띄엄 띄엄 떨어진 사건들이 억지로 의미를 부여받고 허겁지겁 마무리된다. 서인과 선우의 시각이 교차되며 일관성 있게 진행되던 초점화 방식도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흐트러져 버린다. 무언가 다른 효과를 노렸다기보다 작가 스스로 선택한 초점화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을 읽는 재미는 여러 차원에서 나온다. '영화로 만들면 더 좋을텐데'라는 생각이 들게하는 작품은 다시 말해 '소설적'재미를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한 작품이라는 말이다. 이야기라는 측면에서는 소설과 영화가 다르지 않지만, 그것을 표현해내는 방식에 있어서는 분명 차이가 있어야 한다. <4월의 물고기>는 스릴러에서 맛볼 수 있는 재미치고는 끝까지 미적지근하고 연애소설로 보기에는 작품이 기대고 있는 정서가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서술방식 또한 화끈거릴 정도로 감상적인 수사로 가득차 있다. 독창적인 수사는 기대하지 않지만 '숨은 소설제목 찾기'도 아니고 형용사 대신 갖다 쓴 소설제목들이 얼마나 많은지 청소년기 습작 소설의 문체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획득하는 데는 성공했고 세련된 영상미를 갖추고 있음은 분명하다. 연애를 풀어나가는 구태의연한 발상이나 다소 김빠지는 서스펜스지만 영상화되어 보다 감각적으로 표현된다면 꽤 볼만한 작품이 나올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뱀파이어아카데미>, <새드일루전>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뱀파이어 아카데미 - 내가 선택한 금지된 사랑 뱀파이어 아카데미 시리즈 1
스콜피오 리첼 미드 지음, 전은지 옮김 / 글담노블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머리를 비우고 빠른 속도로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았다. 특별히 장르소설을 가리지는 않지만 장르 소설에도 급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소녀취향의 로맨스물의 냄새를 풍기는 만화체 그림이 떡 하니 그려져 있는 이 책은 표지 부터가 썩 달갑지 않다. 스콜피오 리첼 미드라는 미국 작가가 쓴 뱀파이어 소설 <뱀파이어 아카데미>는 독서라는 활동에 뒤따르는 복잡한 사고 과정 없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책이다.

뱀파이어 소설이라고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제외하고는 접해본 적이 없지만, 수많은 뱀파이어 영화 속에서 꾸준히 변주되어 온 이야기들은 분명히 기억한다. 선과 악, 영원과 단절, 존재와 환상 같은 내용 말이다. 그러나 이 <뱀파이어 아카데미>는 그러한 선이해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뱀파이어'라는 것은 소설 속 세계를 이루는 인물 군단일 뿐, 그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해 들어가는 소재거리는 못 된다. (뱀파이어가 아니라 마법사이거나 초능력자여도 상관 없다.) 인간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된 곳에서 펼쳐지는 그들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인간과 구별되는 뱀파이어로서의 고민이나 갈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차라리 기숙학교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다룬 내용에 판타지를 가미한 스토리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 설명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떠올렸다면 정확하다. 조앤 롤링이 마법세계를 새롭게 창조했다면, 리첼 미드는 자신만의 뱀파이어 세계를 창조해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디테일 자체는 분명 <해리포터>에 훨씬 못 미친다. 마법세계 전반에 대한 놀라운 상상력을 펼쳤던 조앤 롤링에 비하면, 리첼 미드가 창조해 낸 새로운 세계는 뱀파이어 간의 세력 구도에 대한 단조롭고 빈약한 묘사에 그친다.

댐퍼, 모로이, 스트리고이는 뱀파이어 세계를 이루는 세 개의 종족이다. 인간과 모로이의 결합으로만 탄생하는 댐퍼는 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어 모로이를 지키는 수호인으로 활동한다. 모로이는 뱀파이어 세력의 중심부를 이루는 귀한 종족으로 마법을 쓸 줄 알지만, 선천적으로 약하다. 스트리고이는 어둠의 길을 걷는 악의 무리로, 모로이나 댐퍼가 누군가를 헤칠 경우 스트리고이로 변한다. 댐퍼인 로즈는 모로이 왕족인 리사의 수호인으로 뱀파이어 아카데미에서 리사와 함께 교육을 받는다. 로즈와 리사는 아카데미 안에서 여러 사건과 얽히게 되고, 그 사건을 해결하면서 조금씩 성장해가는 이야기이다. 스트리고이는 댐퍼인 로즈와 모로이인 리사가 맞서야 할 최대의 적으로 그려진다.

<뱀파이어 아카데미>는 판타지의 옷을 입고 있지만 오히려 로맨스에 더 가깝다. 로즈는 같은 댐퍼인 디미트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리사는 모로이인 크리스티안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들의 사랑과 질투, 음모에 대한 이야기가 뱀파이어 아카데미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 중 한 부분을 크게 차지하고 있다. 그 로맨스는 순정만화에서나 그려질 법한 멋진 남녀 간의 운명적인 이끌림과 의도적인 외면 따위로 점철되어 있다. 소녀취향의 로맨스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면 애초에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시리즈를 거듭하는 동안 이들의 사랑에 무수한 장애물이 등장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작가가 창조한 판타지의 세계와 작품의 주제에 잘 짜맞추어 풀어 나가길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 너무 못생겼어요."
코믹물에나 어울릴 것 같은 고백 아닌 고백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뜻밖에도 본격 연애물이다. 유쾌하고 발랄하기보다 진지하고 어둡다. 그러나 로맨스의 여주인공으로 '너무 못생긴' 여자를 택했다고 해서 대단한 발상의 전복을 이루어 내었다고 감탄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박민규가 인터넷 연재 소설의 형식으로 발표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결핍'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의 구체적인 화두인 '못생겼다'는 것은 결핍의 한 종류일 뿐이다. 잘생기고 섬세한 '나'에게도, 관조적이면서 여유로운 요한에게도 결핍은 있다. '그녀'의 결핍이 외모에 있다면 '나'의 결핍은 아버지에게 버림당한 아픔에 있고, 요한의 결핍은 뒤틀린 가족관계와 어머니에 대한 연민에 있을 뿐. 그래서 이 소설을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한 한 남자의 이야기'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 협소하다. 이 소설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기만의 '결핍'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 그 결핍은 다른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다.

박민규는 그 해답을 그들 간의 '관계' 속에서 찾고 있다. '내'가 '그녀'에게 느끼는 기묘한 끌림과 요한에게 느끼는 의지의 감정에서 비롯되는 세 사람 간의 유대, 그것이 작품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나'와 '그녀'의 사랑이 아니라. 이들은 '켄터키 치킨'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인생에 대해, 사랑에 대해 끊임 없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치유되어 간다. '관계'란 타인의 불완전함을 채워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완벽해 지는 것이다. '나'와 '그녀' 그리고 요한의 관계처럼.

이 책의 제목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라벨이 벨라스케스의 그림 속 왕녀 마르가리타의 모습에 영감을 받아 작곡한 피아노곡의 제목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라벨과 달리 그 '왕녀'가 아닌 못생긴 시녀에 집중한다.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았던 구석진 곳에 서 있는 보잘것 없는 시녀는 곧 저마다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청춘들의 자화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포커스는 결국 저마다 자기만의 삶의 무게를 떠안고 있는 젊은이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으로 옮겨진다. 작품 속 그들이 즐겨 찾던 '켄터키 치킨'의 호프(HOPE)가 그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이 책은 작가가 건네는 결핍된 청춘에 대한 따뜻한 위로인 셈이다.

이러한 연민의 시선을 따라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작가는 말미에 예상치 못한 반전을 마련한다. 얼핏 이언 매큐언의 <속죄>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러한 반전은 라이터스 컷(Writer's cut)을 삽입한 독특한 서사 구조에 의해 드러난다. 라이터스 컷을 읽다보면 소위 '방심하다 당했다'싶은 기분이 드는데, 사실상 여기에서 이 소설의 참된 매력이 드러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올 2010-02-06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하 저, 누군지 알아요?(모른다면 블로그로 들어오삼^^)
캬~ 이 책 누가 추천해줬는지 모르지만 부리님, 읽었네요..^^
요샌 계속 싸이질 했는데 이제 블로그 키워볼까 해요.
우리 이웃해요^^

깐짜나부리 2010-02-06 17:13   좋아요 0 | URL
앗!
 
<창비세계문학세트>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 - 중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스져춘 외 지음, 이욱연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학 작품을 고를 때 작가나 특정 계보를 많이 따지는 편이지만, 유독 중국문학만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무조건 손이 간다. 특별히 중문학에 일가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중국 문화에 대해 열광하며 추종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중국문학에 유독 눈길이 가는 이유는 중국문학만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특질과의 궁합 때문이라고 해 두자.  

중국은 전통적으로 장편 서사문학이 발달했고, 그와 동일한 토양에 뿌리를 드리운 문학인만큼 현대에도 풍부한 서사를 담은 작품들이 유독 많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중국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탈하고 진솔하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민초들의 삶을 때로는 적나라하게,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질펀하게 그려 놓는다. 민중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진솔한 육담 속에는 중국 근대사에 대한 예리하고 신랄한 비판이 있는가 하면, 어김 없이 비루한 민초들에 대한 동정과 애정이 스며있다. 관념보다는 주로 생활에 치중하기 때문에 술술 잘 읽히는 것 또한 중국 문학의 매력이다.

현대 중국문학을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루는 이러한 특징들은 중국 근대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창비세계문학전집 중국편인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에는 이런 중국 근대문학의 흐름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단편들이 실려있다. 중국 근대문학의 시작을 알린 루쉰의 <아Q정전>을 비롯해, 위따푸, 쳔중원, 빠진, 마오뚠, 스져춘, 랑오셔, 띵링의 단편 9편이 실려있다.

아시아 대부분 국가의 근대문학이 그러하듯이 중국의 근대문학 또한 격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아편전쟁을 통해 싹트기 시작한 반봉건 의식은 신문화운동, 신해혁명을 거치며 보다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이러한 역사적 위기의식 속에서 루신과 같은 작가는 <아Q정전>, <고향> 등의 작품을 통해 반봉건의 기치를 강하게 내보이고 있다. <아Q정전>은 신해혁명을 배경으로 하여 아Q라고 불리는 한 무지한 백성의 파멸 과정을 그리며 중국인의 노예근성과 혁명의 무용함에 대해 통렬히 풍자한다. 위따푸는 <타락>이란 작품에서 청년들의 내면을 통해 중국인의 민족성의 회복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가 하면, 라오셔는 <초승달>이란 작품을 통해 빈곤의 문제를 여성의 시각으로 담담하게 보여준다. 아나키즘을 내걸고 있는 빠진의 <노예의 마음> 또한 중국인의 정신적 전근대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한편 쳔충원의 <샤오샤오>같이 역사와 민족에서 한 걸음 물러나 인간의 자연성 자체를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도 있으며, 표제작인 스져춘의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처럼 비 내리는 저녁 나절동안 벌어지는 한 남성의 심리를 파헤치면서 도시적 감성을 내비치는 감각적인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도 실려 있다.

중국 근대문학은 서구 문화와의 접촉을 계기로 위기 극복과 반성의 일환으로 촉발되었으나, 전통적으로 장편 서사문학이 발달했던 토양에서 싹튼 중국 문학만의 고유한 특질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근대 문학의 다양한 문예 사조를 망라하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당대 중국의 세태 및 역사 의식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위화나 쑤퉁, 모옌 등 중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특질은 변함없이 발견된다. 이들의 작품 간의 영향관계를 추측하며 중국 근대문학의 대표작들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낮의 시선>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한낮의 시선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부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과 달리 인식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부재한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 속의 결핍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 표면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결핍이 드러나는 순간, 그것이 모르는 사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지배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이승우의 <한낮의 시선>은 내면의 부재를 깨닫고 그 빈 자리를 찾아 나선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때 아닌 결핵으로 요양을 하고 있는 29세 대학원생인 주인공은 우연히 노교수의 방문을 받게 되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내면 깊숙이 감추어진 아버지의 부재를 인식하게 된다. 그 동안은 인식할 필요가 없었던,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에 대한 최초의 인식은 결핵균과 함께 표면으로 드러난다.

주인공을 둘러싼 두 개의 불완전함-육체적 불완전함과 정신적 불완전함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소설적 장치가 아니라 상호 밀접한 연관을 가진 채 작품 속에 기능한다. 폐병과 함께 아버지의 부재를 인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불완전한 육체는 내면의 불안을 일깨우는 법이다. 아버지의 부재는 결국 자아의 일부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며,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여정은 결국 자아의 완전함을 추구하는 본능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문제는 아버지가 아닌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에게 결핍된 것도, 그가 찾아 나서는 것도 온전한 자기 자신이다. 작품 말미에 주인공은 토혈과 동시에 글로써 자신의 내면 의식을 가열차게 쏟아낸다. 어렵게 찾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존재를 거부당하는 것은, 오히려 주인공의 내면을 정화하는 계기가 된다. 일방적인 부정이 아닌 상호 간의 부정이라는 깨달음이 막연한 불안을 잠재우게 된다. 불완전한 부재가 완전한 부재가 됨으로써 주인공의 내면은 오히려 더욱 견고해진다.

이러한 역설은 작품 첫 머리에 인용한 말테의 수기 중 한 문장과도 이어진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이 도시로 모여든다. 하지만 내게는 도리어 죽기 위해 모인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에게 '휴전선에서 가까운 인구 3만의 작은 도시'는 결국 부재를 메우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부재를 분명히 하기 위한 공간인 것이다.

소설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그러하듯 지극히 사색적이고 철학적이다. 작가는 서사보다는 인물의 내면의식에 깊이있게 천착한다. 누구나 내면에 언젠가 한번은 맞닥뜨려야 하는 속사정을 지니고 산다. 그 감추어진 내면의식은 어떠한 계기로든 한번은 분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에 대한 증거일 때는 더더욱. 그러나 줄곧 부정하던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작가는 그 과정을 치밀하게 보여주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소설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하루에 한 줄씩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에서처럼 작가는 주인공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포착하려는 치밀함을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