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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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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넘친다. 소설 속 세계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기도 전에 하나의 의식이 또 다른 의식을 덮어버린다. 서사와 관념이 혼동되는 이 언어들 틈에서 분명한 것은 없어보인다. 소설의 세계가 구체적인 형체를 드러낼 때에도 그 의식의 불규칙적인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존 쿳시의 <나라의 심장부에서(In the heart of the country)>는 인물이 환경에 추동되어 사건을 벌이는 정통적인 소설과 달리 오로지 의식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서술자의 관념 속에서 쏟아지듯 흘러나오는 언어들이 지시하는 대상은 불분명하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실체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보다, 오히려 실체를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가공되지 않은 채 서술자의 관념 속에서 쏟아지듯 흘러나오는 말들은 이성과 상식을 거부한다. 그 언어 속에서 냉혹함과 공허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은 이성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관념 속에서 스며나오는 호소의 목소리가 자연히 불러 들이는 감정이다.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 뒤섞인 직소 퍼즐을 맞추기 위한 신중함은 불필요하다. 화자의 의식 속에서 모든 사건은 왜곡되거나 혼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의식 속에서 규칙없이 유영한다.  

작품의 도입부에서부터 하나의 끔찍한 살인 사건이 등장한다. 그러나 서술자의 시선은 그 살인사건의 동기나 심리에 대한 해명에 머물지 않는다. 그 끔찍한 사건이 의식의 한 구석에 놓여진 채 또 다른 생각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어 온다. 그러는 사이에 살인 사건의 희생자는 태연스럽게 부활한다. 이 때 즈음 독자들은 서사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된다. 의식과 실재의 불분명한 경계는 심지어 정신착란자의 의식 속을 헤매는 듯한 착각 마저 들게 한다. 마침내 서사를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고독한 여성화자의 강박으로 가득 찬 내면에 집중할 때 소설 속 세계는 분명한 형태를 갖춘다.  

마그다는 백인 농장주의 딸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하에서 비교적 유리한 위치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에서는 줄곧 타자로 비춰진다. 여성으로서 그녀의 육체적 열등함은 화자 자신을 남성들 뿐 아니라 여성들 틈에서 조차 초라한 존재로 격하시킨다. 관계에서 오는 애착을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존재로서 애착에 대한 갈구는 살인이라는 형태의 강박증으로 나타날 정도로 강렬하다. '나는 처분되었다'와 같이 자신을 수동적인 존재 혹은 무생물체로 치부하는 냉소가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고, 이는 끝에 가서 외로움을 호소하는 자기 연민의 목소리로 바뀐다. 이런 나약한 화자의 의식은 관습적 주종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도, 육체적 정신적 주종관계에서 결국 타인에 종속되어 버리는 비극적 운명을 야기한다.  

서술자가 내뱉는 모든 말들은 사건의 서술이 아니라 관념의 총체다. 그 어느 것도 분명한 것은 없다. 이 여성 화자는 환상 속에 현실을, 현실 속에 환상을 밀어 넣는 식으로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게 만들어 놓는다. 때로는 냉혹하고 때로는 탐미적인 의식의 일면을 드러내 보인다. 주지적인 언어로 감정을 호소하는 독특한 형식의 독백에는 공허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다. '내 목소리들과의 싸움'이라고 화자 스스로 일컫는 이 독백들은 상대방과의 소통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결국 거울에 반사되듯 튕겨 나가 허공을 떠돈다.  

독백으로 가득 찬 이 소설은 결국 하나의 모노드라마로 읽힌다. 힘의 우월함을 기반한 아버지나 핸드릭은 마그다에게 끝없는 갈구의 대상이 되고, 그들이 몰두하는 완전한 형태의 여성성을 지닌 안나는 마그다의 의식이 끊임없이 동일시하려는 상징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서사의 공간이 되는 '나라의 심장부'에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절대 고독의 세계로 침잠해가는 마그다의 의식 뿐이다. 관념적이고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녹록치 않은 문장들은 그 의식의 균열 상태를 보여준다. 애타게 구원을 요청하지만 결국 소통에 실패하고 좌절해버린 한 여인의 의식이 유령처럼 떠도는 이 광활한 세계의 중심부에는 열망과 고독에 대한 사유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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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1-26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와서 읽는데 리뷰가 좋아요. 어떻게 써야할까 고민중인데 읽고났더니 더 못쓰겠네요. 읽긴 읽었되 소화는 덜 되었나봐요. 잘 읽고 갑니다.^^

깐짜나부리 2011-01-27 03:48   좋아요 0 | URL
어서오세요^^ 존 쿳시의 작품이 유난히 소화하기 어렵긴 하죠. 저는 서사를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읽기 시작하니까 차라리 편하게 읽히더라구요. 그렇지만 여전히 난해한 책인 건 사실이랍니다.

시간의안그림자 2011-04-11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으로 읽어 보기에는 문장들이 많이 고급스럽고 아까워 보입니다. 평론 잡지에 실려 있으면 제대로 옷을 입었구나 싶은 글 들입니다. 사실, 전문 평론가들이 한 권의 소설 안에 들어 가서는 분석하고 쇄분하고, 파괴하고, 해체해서는 다시 제 위치라는 의미의 조립 속에 그 작룸이 지닌 미학적 가치의 장점, 단 점, 부족한 점을 낱낱히 긁어 내 놓은 것을 읽고 있으면 말들의 고탑 같은 난해성 의미식 접근의 해석으로 문장을 풀어 놓고 있어서 많이 어렵다고 항상 느껴 보다가 이 방에 들어 와서 읽어 보게 되었던 평론들을 대하고 있으니 맛 깔스럽고, 고급스럽고, 일반 독자들의 시선을 좀 더 이끌어 주는데 편안하게 다 가 와 주고 있으니 좋은 향기가 글을 따라 묻어 나는 것 같아 읽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 집니다. 전문가들의 글들이 일반 독자들의 시선을 벗어 나게 만드는 데에도 난해하고 형이상학적인 의미 표현법의 지나친 문장 만들기와 전달에도 그 원인은 있다고 생각해 보는 독자인데, 평론 자격증도 소설처럼 좀 더 다양하게 범위를 넓혀서 뽑아 준다면 독자 분의 향기 나는 평론 글들이 훨씬 더 대중들의 뇌리에서도 그 의미의 느낌은 찍어 줄 텐데 생각을 해 봅니다. 자주 읽으러 들어 오겠습니다. 고급스럽고 맛깔 스러운 글들 많이 써 주세요

깐짜나부리 2011-04-12 22:33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일반 독자이다보니 좀 더 대중적인 시선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해요. 그러나 서평을 쓸 때 여전히 고민이 많답니다. 이를테면 주관성과 객관성의 균형 문제, 다양한 아이디어와 글의 통일성 간의 충돌, 책에 대한 정보의 적절한 노출 정도 등등. 그래도 긍정적인 피드백에 힘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