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160
메리 셸리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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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보다 추한 것이 보여주는 것들이 더 많다.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왜 아름다운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추한 것들은 그 존재방식을 통해 그것에 무엇이 빠져있는지를 별수 없이 드러내고 만다. 추한 것들이 드러내는 결핍이 어쩌면 아름다운 것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일 수 있다. 따라서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든가 완전한 행복의 조건같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차라리 그것들을 이루는 여러가지 요소를 소거시켜 보면 된다. 불완전한 것을 통해 완전한 것을 보여주는 역설은 문학적 서사에서만 기능하는 독창적 시도가 아니라, 사실 삶 전체를 아우르는 진실이다. 공포나 엽기, 재앙과 비극같은 것들이 영원한 행복이나 사랑, 감동에 대한 신념으로 가득찬 이야기보다 더 진실되다고 믿는 것은 그런 연유이다.


한 젊은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열정이 만들어낸 그 존재는 애초에 '아름다운 외모의 특징들을 골라 짜 맞추'어진 괴물이다. 그러나 키 240미터에 누런피부, 희끄무레한 눈구멍과 색깔이 비슷한 두 눈, 쭈글쭈글한 피부에 새까만 입술을 가진 그 피조물은 창조주조차 몸서리칠 정도로 역겹고 혐오스러운 외모를 지닌 채 살아 움직인다. 그 '추잡한' 외모는 보는 사람마다 공포로 자지러지게 한다. 프랑켄슈타인은 그의 피조물의 외모를 좀 더 인간에 가깝도록 다듬었어야 했을까? 그건 아니다. 그 추잡한 외모는 인간의 삶에 다소 영향을 미칠지언정 인간의 조건을 규정짓는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면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피조물이 맞이하는 파국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오늘날에는 인간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과학기술의 남용이 가져온 파국을 이야기하는 서사물이 넘쳐난다. 오만한 과학자들은 공룡을 되살려내고 좀비를 만들어내면서 인류를 위기에 빠뜨린다. 메리 W.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아마도 이러한 SF 서사 계보에 있어 거의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메리 W. 셸리의 이 1831년도 작품(개정판)은 오늘날 쏟아지는 상상하기 쉬운 단조로운 서사를 오히려 뛰어넘는다. 이 책에 나오는 괴물(원작에서는 이름조차 주어져 있지 않다)은 무자비한 파괴를 일삼는 공룡이나 좀비 따위와는 뚜렷이 구별된다. 그는 창조주에 의해 '사랑과 동정에 민감하게 만들어진' 마음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그 살덩어리에 생명을 불어넣을 때 그는 애초에 '인간'의 창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피조물을 인간에 가장 근접한 형상으로 만들었으면서 정작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충족시켜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책 <프랑켄슈타인>을 선과 악, 당위와 부당이 빚어내는 뚜렷한 대립각도의 이차원적 서사에서 벗어날 수 있게하는 힘이 바로 이 괴물의 정체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다.  


그의 외모가 주는 오해와 달리 그는 인간적인 사고를 하고 인간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 심지어는 도덕성마저도 가졌지만 그 어떤 인간에게도 수용되지 못하는 고독한 존재로서 그는 자기 정체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그는 <실낙원>을 읽으면서 자신을 괴롭혀왔던 결핍의 정체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바로 자기 존재 근원으로부터의 외면과 그에 따른 고독이 그것이다. 마침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줄 유일한 인간인 창조주를 찾아 제노바로 향하는 그의 여정은 흡사 디아스포라적 삶의 괴기버전으로 보이기도 한다.  


인간과 괴물의 경계 언저리에서 맴돌던 그 존재는 영원한 고독을 선고받는 순간 인간을 버리고 괴물의 삶을 선택한다. 그 괴물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가졌지만 자신은 갖지 못한 것들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삶의 의미를 일깨우는 가장 중요한 인간의 조건, 사랑과 이해를 기반으로 한 안식처,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닥친 고통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받는 고통에 더욱 힘들어한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목도해야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괴로움이다. 그 괴물은 자신의 결핍이 인간의 중요한 조건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인간이란 혼자서는 살 수도 없고, 살아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소설의 첫번째 화자이자 주서사의 기록자인 월턴도 빙하가 떠다니는 망망대해에서 표류의 위험보다 자신을 알아줄 친구가 없다는 것을 더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말하는 공포는 결국 고독이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증오와 다툼, 파괴같은 것이 아니라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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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3-0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은지 오래되서 전체 맥락만 기억나는데.. 다시 읽을 때가 된 모양 이군요.ㅎㅎㅎ
최근 이 글을 짚어주신 분들의 사유를 보며.
궁극은 뭐..단순할 지도 몰라도 표현에는 여러방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놀랐습니다.
문학이 장르로 ..여러 갈래를 파생시키는 현장을 목도하는 기분?!

깐짜나부리 2015-03-09 11:23   좋아요 1 | URL
그게 바로 문학의 묘미 아니겠어요. 그래서 문학을 좋아합니다.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책들은 도무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데, 문학은 내 상황과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반응하니까요.

[그장소] 2015-03-09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이런 표현이 좋아요..문학은 내 상황과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반응...아~!!
이런거죠!! 묘미..ㅎㅎㅎ
좋다..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