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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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울리는 이야기들이 있다. 단지 이야기의 전달 수단으로서의 글이 아니라, 글이라는 재료를 잘 닦고 문지르고 가다듬어, 마치 빼어난 용모를 자랑하는 관상용 소품처럼 활자만 바라봐도 흐뭇해지게 하는 작품 말이다. 정확하게는 의미를 되새기기도 전, 활자가 시신경과 만나는 찰나의 울림이 큰 소설을 말하는데 내게는 김연수의 소설들이 그렇다. 이런 소설들은 시간의 연속 선상에 놓인 장면들을 따라가지 않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정서적 감응을 이끌어낸다. 미장센이 제거된 스토리텔링에 아름다움을 첨가하는 다양한 시도는, 말하자면 텍스트의 이점을 최대한 살린 글쓰기의 전범인 셈이다. 가령 영화 제작자가 소설을 검토하다가 "이런 건 표현할 수 없어"라며 내던져버릴 소설이 있다면, 그것은 역으로 소설이 소설로 밖에 존재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소설이라는 말이 된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매체로서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활자가 그 자체로 빛이 나는 것은, 어떤 의미로 현대 소설이 이룰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성취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자의 농담(濃淡), 여백의 활용, 활자들의 배열 방식, 이미지의 삽입과 같은 노골적인 시각적 효과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원더보이>는 충분히 매력적인 텍스트로 존재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우주의 물리적 법칙들을 망각해 버린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단순한 인과법칙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우주의 비밀에 다가가려는 소년의 내면에 집중할 것을 처음부터 요구한다. 역설과 모순형용으로 가득 찬 소제목들은 우주의 정지와는 전혀 관계 없는 소년의 시끄러운 내면의 모습이며, 그것은 활자 자체에 가해진 다양한 기법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진다. 시간을 멈추고,염력을 발휘하게 되고, 타인의 생각을 듣게 되는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들이 벌어지는 동안, 우리가 받아들여 왔던 세계의 질서는 파편적으로 흩어진 활자처럼 깨어진다. 홀로 남은 정훈은 부조리한 세상을 온 몸으로 겪는다.

 

그래서 <원더보이>는 일견 초능력을 갖게 된 한 소년이 부조리한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까지 비현실적으로 '원더러스'한 이야기는 아니다. 작가는 시종일관 불합리한 '전체'에 놓여진 한 '개인'의 내면을 좇는다. 그리하여 소설은 분노와 투쟁보다 외로움과 슬픔에 더 근접해 있다. 대개 외로움과 슬픔의 근원은 상실로부터다. 특히 부모를 잃는 경험은 일생에 걸쳐 개인에게 닥칠 수 있는 가장 큰 시련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이런 크나큰 상실의 경험은 역설적이게도 많은 성장 소설에서 성장의 동력으로 나타난다. 이 소설이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오스카가 그랬고, 죽은 아빠의 스웨터를 42일 내내 입고 다니던 <사랑의 역사(니콜 크라우스)>의 알마가 그랬고, 또 신화가 사라진 처용포에서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는 <꽃피는 고래(김형경)>의 니은이 그랬다.소중한 것을 잃은 뒤에야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그것들은 소중하지만 평소에는 잊고 살기 쉬운 그 무엇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것은 내면의 보호막이 걷혔을 때 최초로 대면하게 되는 무방비 상태의 자아일 것이다.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보호막이 없어진 자리에 각자는 자신만의 껍질을 새로 입히게 된다. 상실로 인해 생긴 구멍은 딱 그 빈 자리만큼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중심으로 무한히 커진다. 상실의 아픔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내면은 더욱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화전 같은 것이다. 잡목과 들풀이 태워진 자리에 새로운 밭을 일구듯이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는 것은 단순한 치유 그 이상의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소설에서도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은 정훈이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홀로 병원에서 깨어나는 부분이다. '원더보이' 정훈에게는 아버지가 사라져 간 빈 자리에 놀랍게도 초능력이 깃든다. 상대방이 말하지 않아도 그 생각이 들리기 시작하고 그 감정들이 읽히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 또한 타인에게 여과없이 전해진다. 감정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경계 없는 왕성한 소통이 시작된 것이다. 작가는 이 순간을 '시간이 멈추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화전을 모두 불태우고 새로운 작물이 수확되기를 기다리는 시간, 즉 성장의 도움닫기가 시작된 것이다. 아빠에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속죄의식의 발로인 것처럼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전할 수 있고, 듣지 않아도 느끼게 되는 정훈에게 물리적 시간의 정지는 10광년 이상 떨어진 별빛이 지구에 닿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벌어준다.

 

시간의 정지와는 별개로 초능력자의 신분으로 80년대를 견뎌내야 했던 정훈의 처지는 꽤나 힘겹다. 정훈의 초능력은 국가에 대한 봉사수단으로 사용되기를 강요받지만 실상은 유리 겔러의 염력과 같은 눈요기감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이해하고 있다. 사실 상대방의 생각을 읽고 기분을 이해하는 것 따위가 무슨 초능력이란 말인가? 그것이 초능력일 수 있는 까닭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 조차 억압받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능력을 초능력으로 치부하는 이 절묘한 비틀기는, 당대의 사회상을 우회해서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다. 권대령이 맹신하는 국가 체계 안에서는 개인의 죽음조차도 개별적인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개인은 국가의 필요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전체 속의 개별성이 억압받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정훈의 자아 찾기는 어쩌면 광활한 우주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개체로서의 존재의미를 찾아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훈이 홀로 남겨져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근원적인 고독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별적으로 존재하기에 타인과의 소통과 관계맺기가 중요하다는 것의 반증이다. 정훈에게 깃든 초능력은 상대의 감정에 감응하고 이해하고 나누려는 노력이다. 그것이 광활한 우주에 나홀로 존재하는 이유이자 흔적이 된다.


 개인의 성장은 하나의 무리 속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광활한 우주에서 하나의 개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논리가, 없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특별한 것을 뜻한다는 논리로 전환되는 과정에는 개별성에 대한 이해와 여기에서 비롯되는 '레종 데트르(Raison d'etre)'의 발견이 있다. <원더보이>는 메타포가 넘쳐나는 소설이다. 그래서 모순과 거짓으로 가득찬 사회에서 진실된 삶의 이미 찾기를 시도하는 소년의 협소한 이야기이기보다 오히려 우주의 비밀에 닿기 위한 한 소년의 여정으로 읽히기를 요구한다. '누군가의 슬픔 때문에 내가 운다면 그건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걸' 깨닫는 순간 정훈은 한 뼘 성장한다. 이것이 정훈이 발견한 우주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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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1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원더보이>를 읽고있는데, 제게는 아직 너무 힘든 소설입니다.
김연수의 문장이 너무나 아름답고, 텍스트, 아니 문단의 틀을 벗어난 글들에 참 많이 감동하고 있지만 의미 파악이 너무 힘들어요. 이것이 과연 소년의 내면을 파악하는, 좇는 글인지, 그저 재미만 주려 쓴 글인지에 대한 개념부터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깐짜나부리 2012-04-12 13:17   좋아요 0 | URL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더이상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특히나 김연수의 소설처럼 다양한 은유가 포함된 작품은 독자의 역할이 보다 크겠죠?

백운호 2012-05-3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이 소설 다 읽고 마땅히 표현할 방도를 찾지 못해 리뷰 쓰는 걸 포기하고 있었는데, 정말 명쾌하게 풀어내셨네요. 사유의 내공에 감탄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