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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
박민우 글.사진 / 플럼북스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비행기의 도착과 호텔 도착 사이의 여백을 무수히 많은 순간들로 채우면서, 여행 책자의 추상적 이미지가 여행의 전부일 수 없다고 강조한다. 무릎을 쳤다. 여행은 추상화된 이미지가 전복되는 순간에 흥미로워진다. 만약 이 책이 인생의 터닝포인트에서 자아를 되돌아 보기 위해 인도행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식의 장황한 서문으로 시작했다면 (샀으니 읽기는 하겠지만) 읽는 내내 '퍽이나, 잘도' 따위의 추임새를 동반한 뒤틀린 시선을 자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도에 대한 많은 책들이 천편일률적으로 혼돈 속에서 깨닫는 영혼의 자유 같은 식의 환상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탓이 크다. 인도는 그런 곳이 맞을지언정, 여행은 그런 것이 아니다. 여행은 개인과 장소가 우연히 만나 일으키는 예상 밖의 화학 작용까지를 포함한다. 가령 편도 20만원이라는 에어아시아의 계시를 받은 가난한 여행자가 인도와 만나는 우연한 순간 같은.
박민우의 인도 파키스탄 여행기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는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 시작부터 지지리 궁상이 따로 없다. 모처럼 크게 투자한 비행기 프리미엄 좌석 이벤트는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마무리되고, 매대의 염가 판매 등산화는 빼도박도 못하게 파키스탄행을 제 스스로 결정지었다. 첫 도난 사고는 공항을 빠져나와 숙소로 향하는 순간 벌어지고 만다. 이렇게 상처받은 베테랑 여행자의 자존심을 달래주는 것은 인도의 이국적이고 웅장한 풍광이 아니라 빨간 토마토로 속을 채운 촉촉한 오믈렛이다. 작가는 여행 베테랑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휘몰아치듯 연이어 벌어지는 사기 사건과 습하고 뜨거운 날씨에 항복하고 만다. 그런데, 글은 생지옥을 묘사하지만 글을 읽는 사람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황당함의 극치에 배를 잡고 웃게 된다.
그래서 작가는 인도가 싫어졌을까? 여행은 언제나 최악의 순간에 뜻밖의 반전을 내어 놓는다. 함피의 풀냄새와 값싸고 당도가 높은 포도 한 송이는 까칠한 여행자의 마음을 무력하게 한다. 사진기 앞에서 훌륭한 모델이 되어 주는 사람들, 조미료를 잔뜩 넣은 짭짤한 볶음면, 한 밤에 영롱하게 빛나는 황금 사원 같은 것들은 연이어 여행자의 경계심을 무너뜨린다. 폭력적인 더위로 인한 불면의 밤은 오히려 메헤랑가르 성이 어렴풋이 보이는 옥상에서의 황홀한 잠을 선사한다. 그렇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저도 모르게 찾아온다.
결론은 해피앤딩. 이 가난한 여행자는 서문에서 30만원도 채 안되는 돈으로 한 달을 살면서도 행복하다고 고백하는데, 이 생고생 이야기를 읽으면 그것이 사실임을 별수 없이 인정하게 된다. '전세 자금이 억이 넘는데, 그 돈이 없으면 돈이 없어?란 말을 들어야 한다.' 작가는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올라가기를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깊은 병을 무덤덤히 꼬집는다. 우리는 200원도 안 하는 포도 두 송이에도 행복해 할 수 있는 존재인데, 사람들은 그런 것에서 행복을 찾지 않는다.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낭만적인 이미지 사진들보다 이 구질구질한 체험담이 더 마음을 울리는 까닭은 도처에서 만나는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문득 깨우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는 타지마할의 수려함에 대한 감탄사도, 갠지스 강가에서 깨닫는 삶과 죽음에 대한 심오한 성찰도 없다. 이 책은 여행자와 장소와의 궁합,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 고도로 디테일하게 이야기한다. 알랭 드 보통이 언급했던 '현실은 기대와는 다르다'는 점은 바로 이런 생생한 여행기를 통해 증명된다. 그리고 이 여행기는 여행이란 개별적인 사람과 개인적인 경험, 그리고 각자의 느낌을 담은 철저한 자신만의 영역임을 역설한다. 몇몇 화려한 이미지 몇 점과 광활한 진공으로 채워진 여행기를 읽을 바에는 '론니 플래닛'을 읽겠다. 진짜 여행기는 이미지 사이의 공백을 체험으로 촘촘히 채워 놓은 글이다. 그것이 지나치게 개별적이라도 별 수 없다. 여행은 그렇게 개별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