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간유리를 통해 내다보는 현상은 몽환적이면서 아름답다. 설령 그 바깥에 있는 것이 악취가 풍기는 쓰레기 더미라고 해도 말이다. 문학 작품에서 이런 간유리의 반투명성은 현실을 색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황홀한 언어의 향연과 서정성이 현실의 비정함을 여과하여 비춰준다. 그런데 반투명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이 현상들은 독자의 상상 속에서 더 지독한 고통으로 탄생한다.

1944년 소련의 공격을 받은 루마니아는 나치 독일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고, 루마니아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을 소련의 강제 수용소로 넘긴다. 나치에 의해 파괴된 소련의 재건을 위한다는 명목이다. 명목이야 어찌되었든 많은 죄없는 사람들이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용소로 추방된다. 참혹한 역사의 한 장면이다. 직접 이 불합리한 추방을 겪지는 않았지만 헤르타 뮐러는 한 시인을 통해 수용소 삶에 대한 생생한 체험을 전해듣고 소설을 쓰기에 이른다. 날카로운 펜 끝으로 고발하는 참혹한 현실은 뜻밖에도 몹시 서정적이다. 비극적인 역사가 생생하고 구체적인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유미적이고 압축적인 언어로 묘사된 까닭이다. 서사는 간결하지만 그것을 묘사해내는 언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서정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황홀한 언어로 독자를 기만한다. '숨그네, 배고픈 천사, 빵의 법정, 양철키스'와 같은 아름다운 조어(造語)들이 안내하는 곳은 지독한 허기와 고독에 잠긴 비극적인 현실 속이다. 마음껏 언어의 향연에 취해있는 사이 현실의 비참함이 가슴을 먹먹하게 쳐올린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극한의 고통 속에서 보는 아름다운 환각을 연상케한다. 성냥불이 꺼지는 순간 참혹한 현실은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절묘한 대위법은 수용소의 현실을 하나의 심상 안에 가두어 두지 않으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소의 비정함을 고발한다.

반복되는 '배고픈 천사'의 공식 속에서 끊임없이 '심장삽'을 움직이는 수용소의 생활들. 여분의 옷 한벌과 그가 숨겨 놓은 빵 한 조각의 의미만을 갖는 죽은 사람들. 수용소로 추방당한 17세 소년 레오는 최소한의 존엄조차 사라진 이러한 수용소 내부의 풍경 앞에 담담하다. 그는 자신이 닥친 상황 앞에서 울부짖거나 부당함을 토로하지 않는다. 대신에 당시에 사용하던 사물들 속에 깃든 수용소의 기억들을 실을 풀어내듯이 끄집어낸다. 명아주와 시멘트, 슬래그벽돌, 실크스카프 등의 사물에 깃든 레오의 기억은 상황의 처절함을 오히려 담담하게 비춰준다.

소설은 아름다운 언어로 포장되어 있지만 묘하게 사실적이고 생생하다. 고통은 고통 그 자체보다 고통에 굴복해버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더 생생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주운 돈으로 사먹은 음식들을 몽땅 게워낸 뒤, 식당에 아직 양배추 수프가 남았을까 걱정하는 레오의 모습은 비극의 또렷한 이미지를 새긴다. 어느새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나약한 인간의 모습에서 좌절보다 더 깊은 충격을 받게 된다. 한밤에 불시에 불려나갈 때나, 문득 다른 일자리에 배정을 받을 때면 언제나 총살 당할 두려움에 떨면서도 이들은 어느덧 허기와 익숙함의 노예가 되어 늘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배고픈 천사'의 품으로.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뼈와 가죽의 시간'이 끝난 뒤, 갈망하던 세계조차 사라질 때 비극은 심화된다. '너는 돌아올 거야'란 할머니의 말을 주문처럼 가슴에 새기며 버텨왔던 세월의 끝에, 레오는 그 '돌아옴'의 의미조차 상실해버린다. 수용소의 시간과 수용소 밖의 시간은 그 질량이 다르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수용소 안의 시간이 멈추어어있는 동안 밖의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5년 만의 생환에도 불구하고,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레오가 끝없이 수용소의 삶을 그리워하도록 만든다.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하는 고통의 세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고통의 세월을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이들은 결국 수용소에서 함께 지내왔던 동료들 뿐이라는 사실은 고통의 종결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여러 편의 수필을 모아 놓은 것 같이 관조적인 서술에 의존한 각각의 이야기들은 수용소의 비참한 삶을 관통한다. 비참함은 구체적이기보다 상징적이다. 50년도 더 된 시절의 동유럽에서 일어난 이 비극적인 사건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공감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구체적인 역사적 공간이기보다 비참함이 형상화된 상징적인 공간에서의 일처럼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숨결을 그네뛰게 하는 <숨그네>는 제목 그대로 독자들의 호흡을 뒤흔든다. 사물을 향해 내뱉는 참신한 비유와 같은 낯설게 하기, 처참한 상황 속에 내던져진 나약한 인간들의 실존, 무한한 서정으로 가득찬 상처받은 주인공의 내면.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 책은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경지를 내보인다. 책장을 덮는 순간 깊은 꿈에서 깨어난 듯한 '몽롱한 각성상태'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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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 2010-08-0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문학동네 편집부의 고우리입니다.

이번에 제작하는 소책자 <헤르타 뮐러 스페셜북>에 독자님의 리뷰 일부를 게재하고 싶어 사용 허가 요청 드립니다. ^^ 보시는 대로 답글 또는 메일kupsch@naver.com로 허락 여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용하려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날카로운 펜 끝으로 고발하는 참혹한 현실은 뜻밖에도 몹시 서정적이다. 비극적인 역사가 생생하고 구체적인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유미적이고 압축적인 언어로 묘사된 까닭이다.


고맙습니다.


깐짜나부리 2010-08-06 12:51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제 서평의 일부지만 실어주신다면 저에겐 영광이죠^^
사용하셔도 됩니다.^^
헤르타뮐러 스페셜북 소책자가 다시 제작되는건가요?
이전의 소책자도 알찬 내용이 많았었는데, 새 책도 궁금하네요^^

문학동네 2010-08-09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 깐짜나부리님 ^^ 감사합니다!!
이번에 헤르타 뮐러의 <마음짐승>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가 출간되면서 스페셜북도 이른바 '개정판'이 출간됩니다. 책 좋아하시는 분이면 쉽게 구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