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화를 그리는 화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시공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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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궁정화가 프란시스 고야의 판화 전시회에 갔을 때 그의 판화작품이 보여주는 사실성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회화작품이 아름다운 풍경화나 멋진 미모의 인물화를 다룬다고 연상한다면 고야의 그림들은 독특한 시도들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성의 발전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선 잔혹한 폭력의 역사이기도 했다. 고야의 작품중에 마드리드 수비군의 처형이란 그림을 보니  최근 잔인한 전쟁통에서  횡행된 살벌무도한 행동들이 인간의 역사와 함께 어디에서나 있어왔구나 생각이 든다.

스페인 작가 페레스-레베르떼는 20여년 전장을 누빈 종군기자로 활동한 경력의 소유자다. 실제 작가처럼 소설의 주인공 파울케즈역시 전쟁터에서 30년을 보낸 사진기자였다. 텔레비젼 뉴스에서 폭동의 와중에 쓰러진 한 청년의 숨이 끊어지는 장면이 동영상으로 비쳐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주변의 사람들은 의료를 요청할 형편도 못되는지 아무런 수습없이 방관하고 있었고 그 동영상을 찍은 누군가도 불쌍한 청년이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이나 캄보디아내전 당시 참혹한 민간인 살상 사진도 기억에 남아있다. 울며 맨발의 벌거벗은 여자아이가 걸어가던 사진은  퓰리쳐상도 수상했다고 했다.  

30년을 잔학한 살상의 장면과 부상당한 패잔병과 폭탄과 지뢰로 망가진 폐허와 시신들을 찍어온 사람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그리고 일터에서 만난 여인 올비도를 그 일터에서 잃어버리고 혼자 남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남자에게 어느 날 ’당신이 찍은 사진 한장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소’라고 하며 찾아온 남자가 있다면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섬의 망루에서 섬을 찾은 관광객 무리를 바라보고 가이드아가씨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멀리 조용한 바다를 응시하다가 하루의 일과로 전쟁화를 묵묵히 그려내는 화가는 그동안 찍어온 모든 사진의 형상을 다시 그림으로 재현해낸다. 

이 책 중에 화가가 올비도를 사랑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나온다. 그런데 그가 사진찍기를 관두고 그림그리기를 시작한 것도 그녀를 잃고난 이후였고 자신을 죽이겠다고 찾아온 마르코비츠의 협박속에서 이따금 떠올리는 전장의 모습에 언제나 그녀가 자리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그녀에 대한 묘사속에 주인공 파울케즈의 상실감은 축축하게 젖어있다. 그 뒤로 온갖 전쟁터의 잔혹한 영상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마르코비츠의 한 마디, 그녀를 사랑했나요?라는 말에 파울케즈의 올비도에 대한 사랑이 간접적으로 설명된다. 그가 그녀의 주검을 사진으로 남기고 현상액속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녀 귓볼에 매달린 금귀걸이를 보고(최근에 나온 파묵의 새 책에도 주인공이 애인이 남긴 귀걸이 한짝을 간직하는 장면이 나온단다) 저승가는 배삯이라고 생각했을 때 이미 그의 가슴은 찢어지고 없었다. 

마르코비츠는 자신의 인생을 파괴한 한 남자를 찾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왔지만 그 사진기자역시 자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작지 않은 피해자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책은 한 종군 사진기자의 삶을 통해 인간의 잔혹성과 폭력성의, 무모함과 무의미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바다를 헤엄쳐 나아가며 느낀 바닷물의 짠 맛에 섞인 카론에게 건네줄 동전의 구리맛이 어떤 것일까. 이제 그는 마침내 그녀 올비도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될까. 그는 파도를 헤치며  더 세차게 팔을 저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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