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시스터즈 키퍼 - 쌍둥이별
조디 피콜트 지음, 곽영미 옮김 / 이레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픈 딸을 위해 딸과 유전적으로 같은 배아르 찾아 착상시켜 아이를 가진 엄마.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언니를 위해 제대혈과 골수를 주고  나중에는 신장이식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아이는 이제 더이상 언니에게 희생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이것이 이 소설의 광고에 등장하는 줄거리이다. 물론 이 내용은 적확한 지적이다. 이 책은 그러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책을 끝까지 읽어가다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들의 일반적 문제제기가 아주 덧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가족의 끈끈한 사랑의 힘에 당연하면서도 정당한 어떤 것을 작가의 눈속임으로 인해 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줄기세포로 자신과 똑같은 또다른 자신을 만들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다는 이야기는 섬뜩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에스에프영화에서만 목격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미 우리의 과학과 장수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틀림없이 이런 과정으로 진전될 것이다. 적어도 똑같은 자신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여분의 장기를 만들어 두는 것이 유행이 되는 세상은 머지 않아 도래할 것이다. 아픈 사람을 위해 뇌사자의 장기를 이식하는 의료행위도 몇십년전에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꺼려지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마음대로 성형을 밥먹듯하는 세상이 되었음을 연예인들은 자기의 어느부위를 고쳤다는 말을 서스럼없이 하게 되었다. 조금있으면 당당하게 말하게 될 것이다. 사고의 진화또는 퇴보란 상상외로 빠른 속도를 보여준다.

 

영화 아일랜드에서 아기를 갖기 위해 자신의 분신에게 임신을 시키는 여성이 나온다. 그리고 아이를 낳자마자 분신인 대리모는 목숨을 잃는다. 원래의 인간을 위해 수많은 분신들이 다른 세계에서 자신이 이용되는 시기만을 위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고 그 때가 되면 자신은 꿈의 섬으로 이주하게 됨을 자축하며 떠나간다. 또 에일리언에서의 여주인공은 또다른 분신으로 영속되는 삶을 산다. 과거에 죽은 나는 유전자로 다시 태어난 새로운 나와 동일체로 해석된다.  한 외신에서는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가 죽자 그 고양이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고양이를 만들고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치료를 위해 그것도 한 가족내에서 가장 유사한 유전자배아를 찾아 동생을 태어나게 한다는 것은 치명적 병에 시달리는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는 누구나 생각해봄직한 시도일 것같다. 아픈 아이를 둔 부모가 무슨 일인들 못할까. 그런데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도대체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한 서글픈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세상 모든 인간이 두 남녀의 거룩한 만남과 잉태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종족유지의 본능이라는 생물적 자연, 즉 우리속의 이기적 유전자의 정보대로 움직이는 기생하는 유전자의 숙주로서의 단순한 행위때문에 태어나는 생명이 수두룩하다. 그래도 언니의 치료를 위해 자신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동생에게는 회의적인 생각밖에 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은 이런 절박한 상황에 처한 한 소녀의 입장을 모티브로 내검으로써 그 어느 이야기보다 흥미와 문제해결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차서 책장을 들춰보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다.

 

동생 안나는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응석받이처럼 묻고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고만 하는 아이인가? 최후의 반전(안나의 교통사고)과 달리 최초의 반전인 안나와 케이트의 관계라는 공고한 기반은 소송으로 비춰지던 이야기의 전개에 커다란 반성의 물결을 만들어준다. 가족의 힘이라는 상식적으로 느낄 수 있는데도 작가의 꼬드김으로 잠시 망각하고 있던 그것을 그제야 깨닫게 된다. 작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렇지 바로 그거야하고 깨닫는다. 이야기는 더이상 소송이 아니고 가족문제가 된다. 엄마인 사라가 말했던 가족문제이지만 문제가 있는 가족이 아니라 사랑이 가득찬 가족이다.

 

안나이야기에 겹쳐지는 줄리아와 캠벨의 사랑도 후반의 반전이 있기까지 갈등과 의혹이 점철된다. 캠벨에 대한 독자의 비난은 동정과 애정으로 탈바꿈하고 우리가 아는 표면뒤에는 더 큰 사랑의 힘이 존재함을 믿는 작가의 긍정적 사고를 느끼게 한다. 이런 어려운 의학적, 윤리적 문제가 어떤 식으로 해결될 것인가라는 호기심에서 시작되는 책읽기는 그렇지 바로 그거였어라는 잠시 망각한 진실의 뚜껑을 열고 훈훈한 사랑을 만끽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결말에서 주인공의 사고는 작가가 염두에둔 희생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현재의 행복은 누군가의 희생에 의한 것이라는 진리를 말해주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까. 안나의 출생은 한 가족에게 이용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케이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어긋난 길을 걷는 제시의 행동에도 드러난다. 즉 안나는 케이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다행스러운 아이였다. 최후에 일어난 희생은 그렇게 도움을 줄수 있어서 행복했던 주인공의 최고의 희생이자 선물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희생이란 비참하게 스러져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고대제의에서 바쳐졌던 희생의 동물들도 고대인들에게는 무한한 성스러움의 상징이었다. 결말이 불만스럽다면 나는 이 승화된 희생의 의미를 되새겨봄이 어떨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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