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가득히 동서 미스터리 북스 87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문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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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재주꾼 리플리 The Talented Mr. Ripley’입니다. 수차례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었는데 그중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와 맷 데이먼 주연의 ‘리플리’가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을 읽고 선명히 떠오른 것은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알랭 들롱이 아니라 맷 데이먼의 모습이었습니다. 원작의 톰 리플리는 잘생기고 우수어린 눈동자를 가진 알랭 들롱보다 섬세한 감수성이 엿보이는 어눌한 미소를 지어 보일 줄 아는 맷 데이먼이 더욱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노골적으로 풍기는 동성애적 뉘앙스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책의 원제는 매우 비아냥대는 농담이 담긴 제목입니다. 톰 리플리는 열등감과 자기혐오로 똘똘 뭉친 인물입니다. 더구나 자기 본모습을 감추기 위해 파렴치한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 사기꾼이자 영악한 살인자이기도 하죠. 그런 인물에게 재주꾼이라는 명칭은 어울리지 않죠.

허영심은 리플리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비루하고 남루한 현실을 증오합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기에 어울리는 그럴 듯한 새 삶을 꿈꿉니다. 스스로 그런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실제로 삼류인생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에 비해 리플리는 섬세한 영혼과 명민한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죠. 그러기에 현실의 벽에 부딪쳤을 때, 그러니까 남루한 현실을 자각했을 참을 수 없는 치욕을 느낍니다. 그 치욕은 리플리로 하여금 살인을 저지르게 만듭니다. 리플리가 부잣집 아들인 디키 행세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을 때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제는 토머스 리플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는 짐꾸리기를 계속했다. 그는 이로써 디키 그린리프도 마지막이라고 각오하니, 토머스 리플리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옛날의 자기 습관을 다시 몸에 익힌다는 일은 질색이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상대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하는 자기의 무능력한 마음이 정말 견딜 수 없이 싫었다. 다시금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이 견딜 수 없이 싫은 것은, 새것일 때에도 별로 고급이 아니었는데, 얼룩투성이며 다리지도 않은 다 닳아빠진 양복을 입고 싶지 않은 기분과 흡사했다.(p.240~241)
 
   

<태양은 가득히>의 가장 큰 매력은 리플리라는 인물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경찰과 탐정만큼이나 멍청하고 한심한 번역으로 만났음에도 리플리는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사람을 죽이고, 죽은 사람의 친구와 가족을 기만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할 때조차도 리플리를 동정하게 됩니다. 그만큼 리플리라는 인물에 공감하고 빠져들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쓴 ‘리플리’시리즈는 모두 다섯 권입니다. 만약 다른 작품들도 <태양은 가득히>에 버금가는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면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뛰는 일이 될 것입니다. 모출판사에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전작의 판권이 수년전에 싹쓸이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그러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하던 생각이, 이 작품을 읽고 뚝딱 바뀌었습니다. 도대체 언제 책을 낼 작정이야! 책을 내지 않는 속사정이야 알길이 없지만 이래저래 속 타는 마음을 해외에서 발간된 ‘리플리 전집’의 감동적인 북디자인을 보고는 것으로 달래보았습니다.







덧붙임.
말년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픕니다. 그녀가 겪은 세월이 어떤 모습이었기에 이렇게 늙어버린 걸까요? 그녀가 쓴 작품만큼이나 그녀의 삶도 궁금합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1995년에 죽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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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6-08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미국 국적이었지만 독일계 부친과 스코틀랜드계 모친과의 사이에 태어났고 자신의 작품이 유럽에서 인기가 높아선지 그 생애의 대부분을 유럽에서 지냈다고 하네요.무슨일을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싫어했다고 하며 그래선지 만년에는 스위스의 산중에서 2마리의 고양이와 살았다고 합니다.
태양은 가득히는 소설로도 읽었지만 영화가 더 유명한것 같은데 어느 출판사인지는 모르지만 판권계약이 됬다면 나머지 4권도 얼른 나왔으면 좋겠네요.
참고로 5권의 영문 제목은 아래와 갔습니다.
1 The Talented Mr. Ripley-1955
2 Ripley Under Ground-1970
3 Ripley's Game-1974
4 The Boy Who Followed Ripley-1980
5 Ripley Under Water-1991
첫번째 작품부터 마지막 작품이 완결되기까지 36년이란 시간이 흘렀네요^^



lazydevil 2009-06-08 21:44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고맙습니다. '36년 리플리 시리즈'를 좌악 정리해주셨네요^^
그러게요... 기왕이면 '재주꾼 리플리'부터 제대로 된 번역으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Forgettable. 2009-06-08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ㅡ 그 리플리가 이 리플리군요,
라고 말하는건 ㅎㅎ
전 리플리's 게임 영화만 봤어요, 존 말코비치 나오는거^^
기대도 안했는데 그냥 미스터 말코비치 이름보고 본건데 완전 득템이라 재밌다고 좋아했는데, 책의 리플리 시리즈가 있었군요~
리뷰를 보니, 제가 본 영화는 원작에 비하면 좀 많이 대중적인듯...

lazydevil 2009-06-08 21:46   좋아요 0 | URL
오호라~~ 리플리'스 게임이 영화로ㅡ 그것도 존 말코비치라고요? 이거 챙겨봐야겠네요^*^

쥬베이 2009-06-14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 lazydevil님 리뷰가 화려해요^^
저는 이렇게 이쁘게 못 씁니다ㅋㅋㅋ 텍스트만 나열하고 혼자 만족하는 타입이라-_-
(lazydevil님, 여름이라 슬럼프인데,속시원한 스릴러
하나 소개해 주세요~ 편하게 읽히면서도 재밌는..뭐 그런거 없을까요?)

2009-06-15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곤조 2009-06-18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니 저 이미지를 노출시키다니요!

lazydevil 2009-06-18 14:55   좋아요 0 | URL
리플리 전집 이미지, 곤조님이 저한테 보여주셨죠?! 출처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