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
정확히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5학년 여름쯤 이었던 것 같다. 나는 교실에서 친구들과 당시 인기 영화 '백 투 더 퓨처'에 대해 떠들어 대고 있었다. 아마 영화 속 타임머신에 대해 앞으로 기술이 발전하면 가능하네 마네 우격다짐식 토론을 벌이고 있었으리라. 그런데 멀리서 C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잠깐 머뭇거리다 입을 떼는 게 아닌가.
"저기... 근데 말이야..."
우리는 놀랐다.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한 반에 한두 명쯤은 꼭 그런 애들이 있었다. 같은 반 친구인지도 잘 모를 듯한 존재감을 가진, 친구들과 말 한마디 나누는 모습조차 보기 힘든 아이. 딱 그런 친구였다. 짙은 눈썹과 덥수룩한 머리에 거뭇한 코밑수염이 보이기 시작하는 그 애는 또래 아이들보다 어른스러워 보였다.
"어? 무슨 할 얘기 있어?"
신기한듯 한 친구가 말을 받았다.
"시... 시간 여행 있잖아? 음... 그게 꿈같은 얘기가 아니고 실제로 가능할 수도 있어..."
몇몇 아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쳐다봤다. 이 친구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도 처음 보는데 그 주제가 타임머신이라니.
"뭐?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한 아이가 소리쳤다.
"내가 설명할 수 있어. 어떻게 가능한지"
어느덧 쭈뼛거리는 말투도 사라졌다. 작고 나지막하지만, 말끝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낯선 호기심에 내가 물었다.
"어떻게?"
"우리가 사물을 볼 수 있는 건 빛 때문이거든. 태양 빛이 사물에 부딪히면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반사돼서 튕겨 나온단 말이야 알지?"
"그냥 눈으로 보는 거 아니었어?"
다른 아이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냥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빛을 통해서 보는 거야 빛"
"응 그래서?"
그가 내 대답에 반가운 듯 아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반사돼서 튕겨 나온 빛이 우리 눈 안에 시신경을 자극해서 물체를 인식할 수 있는 거란 말이야. 근데 눈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 빛은 어떻게 될까? 물체의 정보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그 빛 말이야"
"빛이 물체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벌써부터 머리가 저릿하다. 확실히 이 친구는 우리와는 다르다. 쓰는 말이며 생각하는 수준까지.
"그래 정보. 색깔이며 형태며 질감까지. 그런 정보를 담고 있으니까 우리 뇌가 그걸 분석해서 세계를 재구성하는 거라고. 본다는 게 그렇게 작동되는 거야. 그렇다면 과거의 정보를 담은 빛을 우리가 볼 수만 있다면, 따라가서 관찰할 수만 있다면 과거를 볼 수 있는 거라고!"
어느새 그의 목소리에는 잔뜩 힘까지 실렸다.
"빛을 보면 과거의 순간을 볼 수 있다고? 아니 근데 그 빛은 어디 있는 건데?"
"아까 일부는 우리 눈에 들어온다고 했잖아. 나머지는 우리를 지나쳐 일부는 계속 직진해서 지구 바깥 우주 공간으로 퍼져 나갔을 거고, 나머지는 산란돼서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거지. 이 세계를 가득."
"뭐? 여기 과거의 빛이 있다고? 그게 공간을 채우고 있다고? 벌써 다 없어진 거 아니야?"
"광자는 질량이 없어. 그래서 공간을 점유하지도 않아.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사라질 수 있겠어? 단지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 사이에 포개져서 중첩되어 있는 거야. 계속 그 자리에."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그걸 어떻게 볼 수 있는데?"
"따라가야지... 빛의 속도로."
"빛의 속도로 따라간다고? 백 투 더 퓨처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는 게 아니고?"
"열역학 법칙에 의하면 과거로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해. 단지 볼 수만 있지"
"열 뭐라고?"
"그냥 그런 게 있어."
"아니 근데 우리가 어떻게 빛의 속도를 따라가서 빛을 본다는 거야?"
"물질은 불가능해. 하지만 의식이라면..."
"의식?"
"응. 어쩌면 그게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인지도 몰라"
"야! 수업 종 쳤어~ 선생님 오셨다!"
누군가 이렇게 소리치는 걸 듣고야 정신을 차렸다. 이게 다 무슨 소린가? 내가 꿈을 꾼 건가? 저 녀석이 살짝 미친 건가?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여름의 뜨거운 태양 빛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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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30년도 더 된 일이다. 세월의 더께 속에 모든 기억과 상상들은 뒤섞여 버렸고 그것을 표현해 줄 언어조차 믿음직하지 못하다. 한낮의 짧은 꿈을 꾼 듯 그날의 대화는 날것처럼 선명하다가도 입안의 솜사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기도 한다. 아주 가끔 나조차도 낯선 느낌이 드는 어느 여름날 창살 넘어들어오는 강렬한 태양 빛이 느껴질 때면 그때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여전히 체념과 후회가 익숙하지 않은 일상에서 내가 디딘 이곳이 불안하기 그지없을 때, 과거의 빛이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상하리만치 묘한 안도감을 준다. 아직도 여기 존재할까?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내가 빛의 속도로 갈 수만 있다면, 이 공간에 흩어져 포개져 있는 그 빛을 정면으로 볼 수만 있다면 과거의 나를 볼 수 있을까? 늘 나른했던 일상의 희미함과 초등학교 시절 그와 나눴던 그때 그 대화까지 말이다.
-이 글은 김초엽의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고 제목에 영감을 받아 쓴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