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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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그 유명한 철학 입문서의 고전(?)이다. 사실 입문서라고 하기에는 좀 뭣하긴 한데, 왜냐하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만 얄팍한 입문서에 비할 수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 초심자가 바로 읽기에는 좀 어려울 수 있으니 쉬운 책을 몇 권 정도 읽고 보면 더 좋을 듯하다. 대개의 입문서가 여러 철학자나 사상들을 시대순으로 나열하고 소개하는 것에 그친다면 이 책은 뚜렷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근대와 근대 이후의 철학을 요리조리 뜯어보고 의미를 부여한다.

근대철학의 문제 설정은 이원론을 배경으로 주체와 객체(진리)를 분리하고 어떻게 하면 그 둘을 일치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과정이었다. 이를 위해 신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진리를 주체 속에서 찾거나 절대정신의 개념을 고안하기도 했다. 이런 근대철학을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등은 주체의 확실성이나 통일성을 해체하거나 진리에 대한 개념을 해체하면서 근대적 문제 설정의 경계 너머로 새로운 철학적 흐름을 만들어 냈다.

그냥 넘어가기 좀 아쉬우니까 살짝 예를 들어 본다면, 지금 내 눈앞에 '사과'라는 진리가 있다고 가정하자. 나는 여러 가지 감각이나 이성을 활용해 이 사과를 인식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과라는 진리를 바르게 인식하려면 내가 인식하는 사과(주체)와 내 눈앞에 있는 사과(객체)가 같다는 것이 보장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주체와 객체가 일치해야 진리를 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이게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의 감각은 항상 왜곡과 과장에 노출되어 있으며 개개인의 사고나 판단 또한 같지 않다. 눈앞에 실제로 사과가 있지만 내가 수박이나 자두처럼 다른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고, 내가 인식하는 사과와 타인이 인식하는 사과가 다를 수도 있다. 나라는 주체에 확실성이나 통일성이 없을 수도 있고 심지어 사과라는 객체(진리)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근대 철학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주체와 객체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칸트가 시도했던 방법을 또 살짝만 얘기해보자. 일단 칸트는 사과라는 실재는 우리가 알 수 없다고 했다(물자체). 단지 사과의 형상만이 이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럼 이 형상인 사과를 어떻게 바로 인식할 수 있을까? 아니 바로 인식했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칸트는 그 답을 주체의 인식틀, 인식 방식에서 찾았다. 인간의 인식틀이 동일하다고 보면 모든 인간은 눈앞에 놓인 사과를 동일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각자가 카메라라고 가정해보자. 물론 조금씩은 모양이나 성능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렌즈, 필름, 조리개 등 카메라의 기본 구조는 같을 것이다. 이런 카메라가 앞의 사과를 찍는다고 하면 다 똑같은 사과가 나올 것이다. 어떤 카메라는 사과를 찍었는데 배가 나오거나 다른 것이 나오거나 아예 나오지 않는다거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본 구조가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카메라끼리는' 이 찍힌 사과를 객체(진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칸트는 이런 식으로 주체와 객체의 일치 문제를 해결했다.

지금까지 이 책을 서너 번쯤 읽은 거 같은데 볼 때마다 많은 영감을 준다. 내가 가진 파편화된 철학적 담론과 지식이 인식론적 배치를 통해 그 의미가 분명해지고, 문제 설정이라는 도구는 어떤 철학자나 사상의 경계를 파악하고 그 경계의 의미를 읽어내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책 중간마다 삽입된 그림과 해설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본문의 개념 설명과 왠지 모를 괴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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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거니즘 만화 - 어느 비건의 채식 & 동물권 이야기
보선 지음 / 푸른숲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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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지하게 동물복지에 대해 고민한 건 피터 싱어의 <실천윤리학>과 <동물해방>을 읽고 나서부터였다. 냉철하면서 날카로운 그의 글은 마치 죽비를 든 스님처럼 날 얼마나 내리치던지. 정말 아팠다.(-_-;) 감정적 기름기를 쫙 뺀 그의 논리는 단순했다. 육식은 엄연한 종 차별주의적 행동이고 제러미 벤담이 말했듯이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것. 이 이상 어떤 논리가 필요하겠는가?

이 책은 싱어 형님보다는 훨씬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비거니즘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만화라서 읽기도 쉽고 재미있다.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고 참고 자료도 충실하다.

인식과 실천의 공극은 작을수록 좋다지만 채식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다. 저자가 말했듯 각자의 철학과 삶에 방식에 맞게 천천히 비건이 될 수 있다면 참 좋지 않을까?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리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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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런던 - 노동자이자 혁명가, 탐험가이자 소설가인 잭 런던의 세계일주
코자 지음, 마야 미앵두 채색, 김미정 옮김 / 생각비행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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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런던! 그의 책을 좀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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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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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은 있음(기억)+상실이다.

상실의 대상은 여러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안아볼 수도,만질 수도 없는 실체이기도 하고 <입동>, <노찬성과 에반>,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교회에서 수험생들에게 나눠주는 밥을 먹기 위해 같은 줄에 서 있었던 주인공들이 부엌과 거실의 공간으로 ‘건너편‘이 되게 만든 어떤 것이기도 하고 <건너편>, 전형적인 삶으로부터의 일탈에 대한 작은 기대감 같은 것이기도 하다 <풍경의 쓸모>.

없음에 대해 우리가 또렷이 인식할수록 세계에 대한 나의 재구성에 균열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는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하고, ‘볼 안에서는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시차의 차이‘를 만들기도 한다.

기억이 존재하는 한 우리가 없음을 인식하지 않기란 어려울 듯하다. 혹 깨달음을 얻는다면 모를까. 특히 있음에 대한 기억이 강렬할수록 그 고통은 커질 수밖에 없다. 설사 없음을 미리 알 수 있다고 해도,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겪지 않을 수 있다고 해도 우리의 자유의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영화 <컨택트>에서 주인공은 외계 생명체의 언어를 습득하면서 놀라운 능력을 갖게 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선형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처음과 끝을 동시에 아우르는 비선형적 삶의 방식을 획득하게 된다. 즉 삶에서 선택과 결과가 동시에 인식되는 것이다. 그녀의 선택은 사랑스러운 딸의 존재를 있음으로 만들 수도, 아니면 불치병으로 죽게 되는 딸의 존재를 없음으로 만들 수도 있다. 만약 우리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영화 속 그녀의 선택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찌 보면 그것이 인간,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If you could see your whole life from start to finish, would you change things?
- 영화 <컨택트> 대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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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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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쓰는 후려치기란 말은 적합한 단어는 아니다. 정확한 표현은 요약하기, 간추리기 정도가 될 것이다. 원래 후려치기의 사전적 의미는 주먹이나 사물을 휘둘러 갈긴다든가, 아니면 물건값을 터무니없이 깎는다든가 할 때 쓰는 표현이다. 적합한 단어도 아니고 부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들었을 때 직관적으로 와닿기 때문에 아랫글에서 이 표현을 사용할 것이고, 어떤 사상이나 개념을 요약, 정리해서 핵심 알맹이만 남긴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좋겠다.

갑자기 후려치기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것은 언젠가 이런 부류의 책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글을 읽은 것이 생각나서다. 흔히 개론서나 입문서, 요약서 등을 비판하는 논지는 뚜렷하다. 질리도록 들은 수박 겉핥기식의 독서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후려치기와 수박 겉핥기는 좀 다른 것 같다. 후려치기는 사상이나 글의 요점을 잘 파악해서 곁가지를 쳐내고 요지만 남기는 행위라고 한다면, 수박 겉핥기는 말 그대로 핵심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겉만 핥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입문서와 개론서를 읽으면서 쉽고 재미있게 해당 분야에 관심을 두게 되고 나아가 원전까지 찾아 읽는 즐거움을 누리지 않는가? 내가 철학에 관심을 두고 나름 공부하는 척하는 것도 다 수많은 입문서 덕분이었다.^^;

원래 하려고 했던 얘기는 이것이다. 어떤 철학자나 사상가의 개념이나 논리는 우리가 세계를 필터링해서 볼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그런 필터를 가진 안경은 복잡한 세상을 좀 더 단순하고 선명하게 보게 도와준다. 그런데 어떤 사상이든 깊게 들어가 보면 그 사상의 거대한 줄기에 달린 잔가지들, 즉 예외가 너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들까지 다 고려하면서 필터를 만든다면 그 필터는 고유의 색(관점)을 잃어버리고 거의 투명하게 변할 것이다. 예를 들어 흔히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일컫는다. 공리주의를 깊게 들어가 보면 꼭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할 수는 없고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얼마나 강력한 필터인가? 세계는 얼핏 보기에 복잡하다. 아니 사실 자세히 봐도 엄청나게 복잡하다. 이런 복잡함 속에서 우리의 인식을 간결하고 뚜렷하게끔 도와주는 안경은 후려치기밖에 없다...는 아니고-_-;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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