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처음 인류가 배를 타고 대서양을 넘어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금속으로 된 비행선은 뜰 수 없고, 설령 뜬다고 해도 너무 크기 때문에 이동하지 못한다" - page 21
며 독일에선 체펠린의 비행선 프로젝트를 반려하곤 했지만 몇 년 뒤 운송수단으로서 비행선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 독일 정부는 국가 차원에서 제플린 프로젝트를 지원하게 됩니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의 도구로서 자리 잡게 되고 피의 역사로 돌진하게 됩니다.
피의 역사 속에서 비행과 관련한 19가지 장면을 선별해 책 속에 '비행의 역사'를, 결국 우리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친숙한 인물과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어린 왕자』로 친숙한 비행을 좋아한 '생텍쥐페리'.
'글 쓰는 조종사'가 아닌 비행기를 좋아한 작가였던 그.
자신이 라테코에르에서 처음 우편 비행을 시작했던 비행기의 등록 부호 A-612에서 따온 이름을 『어린 왕자』의 고향인 소행성 B-612라 이름 지을 만큼 비행에 애정이 있었지만 비행 실력과 무성의한 태도를 지녔던 그의 최후는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어린 왕자가 장미꽃을 사랑한 것처럼 사람들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를 사랑했다. 그의 실종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 노력을 기울인 것이 그 증거다. 그가 어떤 조종사였든 그의 문학적 유산은 삶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영감의 근원이 될 것임에는 분명하다. - page 66
그리고 인상적이었던 일본의 조종사가 된 조성 여성 '박경원'.
경상북도 대구의 한 양가에 다섯째 딸로 태어난 그녀.
원래 넷째 딸이 태어났을 때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고 이름을 '섭섭'이라고 지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다섯째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분통이 터져 딸의 이름을'원통'이라고 지었다는 그녀는 어릴 적 장군감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골격과 힘이 좋았습니다.
신명여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패기 넘치는 당당한 신여성이 되어 평생을 원통이로 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법원을 찾아가 이름을 '경원'으로 개명하게 됩니다.
경원을 눈여겨본 일본인 사장이 보다 넓은 세상에 나가 신문물을 배워보라고 권유하게 되고 박경원은 이듬해 일본인 사장이 소개해 준 요코하마 실업학교에 입학하지만 그녀가 스무 살이 되자 결혼하라며 종용하는 아버지로부터 대구로 돌아와 자혜병원 간호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러다 그녀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어느 날 간호사들로부터 제국비행대회 출신의 안창남이란 조종사가 여의도 비행장에서 열린 에어쇼를 보고난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파일럿이 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무모함에 가까운 패기가 필요했던 그녀의 스토리는 《동아일보》에 특집 기사로 연재되었었습니다.
7월 9일
여용사 박경원 양, 부모의 만류와 약혼자도 버리고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학교 입학
9월 4일
조선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 양. 비행학교 졸업은 하였으나 돈이 없어 면허를 따지 못해
12월 12일
박경원 양, 2천 원이 없어 공중 정복 불능. 공부하고도 돈이 없어 하늘을 정복 못해
당당함으로 이미 일본 최고의 신여성이었던 '박경원'.
하늘과 비행 그 자체를 좋아했던 그녀는 오로지 조종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며 그 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일만친선황군위문비행이면 어떠랴, 도쿄에서 경성을 거쳐 하얼빈까지 장장 2,500킬로미터를 홀로 날아간다는 사실에 벅찬 가슴을 안고 비행을 하지만...
이륙한지 50분 만에 조종간을 잡은 채 사망하게 된 서른세 살 박경원의 파란만장한 삶.
2005년 영화 <청연>에서도 만날 수 있다고 하니 조만간 한번 보려 합니다.
영화가 개봉되기도 전에 '누가 제국의 치어걸을 미화하는가'라는 비판과 함께 친일 영화를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했다. 감독이 "영화는 영화로만 봐 달라"고 호소했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시대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역사상 그 누구도 시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감독은 자연인 박경원의 비행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도전만을 그리고 싶었겠지만, 한 인간의 삶에서 시대를 제거할 수는 없는 법이다. - page 142 ~ 143
영화감독의 말처럼 '비행'의 역사라 해도 결국 '사람'이 있었습니다.
항공우편 항로를 개척한 '라테코에르'
가미카제의 비행기 제로센을 만든 '호리코시 지로'
정치인 '매케인' 등 33명의 인물뿐만 아니겠지만 비행의 발전 속엔 누군가의 희생이, 인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읽고 난 뒤 인간적인 면모가 남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자의 인생은 개인의 선택이며 그 누구도 결코 시대를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서른세 명의 선택을 비판하지 않았다. 하늘에 올라가면 대륙과 바다의 배치가 한눈에 보이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역시 한걸음 떨어져서 볼 때 비로소 그 모습이 보인다. - page 7
오늘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엔 인간의 욕심도, 경계도 없었습니다.
떠다니는 구름...
책 속에서 그려졌던 이들의 이야기들이 어렴풋이 그려지면서 그들의 순수했던 꿈과 미래를 계산하지 않았던 열정이 파란 하늘 속에서 참 아련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다 마주한 비행기를 보며 또다시 비행을 꿈꾸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