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거리는 고요
박범신 지음 / 파람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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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데뷔 50주년을 맞아 두 권의 산문집 《두근거리는 고요》와 《순례》.

《순례》를 통해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순례길 앞에 서 있는 순례자와도 같음을 느꼈었고 무엇보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에 잠기곤 하였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

고향 논산으로 내려간 뒤의 소소하고 의미 있는 일상을 그만의 특유의 다정한 문체로 고백하면서, 삶의 뒤꼍에 숨겨두었던 아픈 기억들과 문학에 대한 치열한 갈망을 술회하고, 자본에게 점령단한 현대사회의 불평등구조와 부조리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시선으로 써 내려간 일상의 이야기.

또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을까...

"머리가 희어질수록 붉어지는 가슴이여!"

일상에 대한 성찰과 인생에 대한 통찰

고요 속에 일렁이는 문학에 대한 순정한 갈망

두근거리는 고요



와초재(고향 논산에 있는 집필실), 문학, 사랑, 세상을 테마로 총 4부로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무던히 써 내려간 그 이야기들은 고요 속에서 찬란히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읽으면서 어느새 저도 그 불빛을 쫓고 있었습니다.

생은 멀고, 또한 찰나적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렇다. 봄꽃의 낙화를 보라. 길고 혹독한 겨울 동안의 인내를 생각하면 봄꽃들의 황홀한 개화는 찰나에 불과하다. 곧 지고 만다. 그러니 봄꽃의 낙화는 얼마나 속절없고 애달픈가. 어디 봄꽃만 그렇겠는가. 청춘의 광채도 그러하고 사랑의 열락도 그러하다. - page 74

어느새 이 말의 의미를 느끼게 된다는 게...

낙화도 그렇듯 우리의 인생의 과정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낙화로부터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픈 이야기.

지금 지는 꽃이 작년의 그 꽃이 아니며, 지금 나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강물이 어제의 그 강물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꽃이 지는 게 죽음이 아니라, 변혁 없이 머물러 있으면 그것이 곧 죽음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이에 '걸맞게' 살아야 좋다는, 시간의 일반적인 양식에 따른 속임수에 넘어가고 싶지 않다. - page 77

나이에 '걸맞게' 살아야 함을.

잘 아는 이야기 같지만 또다시 주억거리게 되었습니다.

<'당신'이라는 말>이야기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의 많은 작품 중에 읽은 소설이라고는 《당신-꽃잎보다 붉던》이었었는데...

그 소설에서 저 역시도 인상적인 구절이었던

"가슴이 마구 무너진다. 당신, 이라는 낱말이 왜 이리 슬플까. 함께 견디어 온 삶의 물집들이 세월과 함께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눈물겨운 낱말이다. 그늘과 양지, 한숨과 정염, 미움과 감미가 더께로 얹혀 곰삭으면 그렇다. 그것이 당신일 것이다."

너무나도 아련한 그 단어, 당신.

이 책에서도 그가 전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최종적으로 이기지 못할 건 시간과 허공, 두 가지밖에 없다. 연애의 본질인 '정염'은 너무나 찰나적이어서 믿을 수 없으나 세월의 더께가 입혀진 '당신'이란 말은 시간을 넘어선 부동심과 만나면서 마침내 불멸의 한 끝에 닿는다. 너와 나로 요약되는 젊은 날의 '연애'는 끝내 상실의 슬픈 종말과 만나지만, 오랜 세월 함께 견디면서 나아가다가 얻는 '당신'으로서의 관계는 시간의 제한을 넘어설 수 있다는 뜻이다. 시간의 제한을 넘어서면 그것이야말로 곧 불멸의 사랑이지 않겠는가. - page 162

그 어떤 사랑 표현보다 더 멋진 말인 듯하였습니다.

당신...

나는 무엇을 찾아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좌초해있는가 하는 질문이 아프게 가슴을 후비는 햇빛 밝은 날이에요. 젊을 땐 그랬었지요. 환갑을 넘기고 나면 최소한 내가 왜 세상으로 왔는지, 나는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 사는 일이 늘 환한 아침 들길 걷는 것 같으리라 상상했어요. 그러나 여전히 나는 여기, 생의 비의에 따른 어떤 불가사의한 프로그램 사이에 놓여 있을 뿐이라고 지금 느껴요. 그럼요, 아직도 나는 내가 왜 이 세상에 와 있는지 모르지만, 살아 앉아 길을 묻고 있으니 존재의 빛이 아주 꺼진 게 아니라고 여겨요.

세상이 비춰주는 서치라이트가 아니라, 내 안에 간직된 이 빛이야말로 나의 참된 등불이겠지요. 세상의 서치라이트보다 내 안에 간직된 이것, 희미하고 푸른 불빛에 의지해 걸어가는 게 남은 생의 지혜라 생각해요. 푸르스름한 존재의 비밀스런 불빛 속에서 보면 아, 살아있는 일이 얼마나 아름답고 존귀한지요. - page 144 ~ 145

오늘도 내 안에 간직된 그 빛을 따라 나만의 걸음 속도로 걸어가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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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슬픔의 거울 오르부아르 3부작 3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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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가장 재미있는 거장> '피에르 르메트르'의 신작!

이 작가분의 전작 『화재의 색』을 읽으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에 그의 신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피에르 르메트르'.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이 소설은 자신이 양차 세계 대전이라는 역사의 큰 그림을 그리며 20세기 전반의 역사를 관통하는 3부작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그린 『오르부아르』,

전간기를 그린 『화재의 색』,

그리고 이번 작품인 제2차 세계 대전을 그린 『우리 슬픔의 거울』까지.

대미를 장식할 이 소설은 또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길지 기대하며 책장을 펼쳤습니다.

뒤틀린 삶을 바로잡기 위해 내달리는 평범한 영웅들

그리고 비참한 피란길의 프레스코화

우리 슬픔의 거울



전쟁이 곧 시작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시들해져 있었고, 누구보다도 쥘 씨가 그랬다. - page 13

1940년 4월 6일 독일군이 프랑스로 쳐들어온다고는 했지만 아직은 몸소 느껴지지 않는 여느 때와 같은 날.

파리의 레스토랑 라 프티트 보엠 주인이자 주방장이기도 한 쥘 씨와 초등학교 교사이자 퇴근 후 집 앞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종업원 루이즈.

그런데 <의사 선생>이라 불리는, 늘 정오경에 와서는 신문을 가지고 자리 잡고 신문을 읽기도 하고, 거리를 내다보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물병을 비우기도 하다가, 루이즈가 금전 등록기를 정리하는 2시경이 되면 자리를 떠나는 그 티리옹이 갑자기 4주 전,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당신의 벗은 모습을 보고 싶소.」 그가 말했다. 「딱 한 번만. 그냥 보기만 하고 다른 것은 안 해요.」 - page 16

성적인 부탁이 맞기는 했지만, 그것은...... 글쎄......

처음에는 어리벙벙했다가 곧 화가 치밀었지만 막상 분노가 가라앉고 말아버린 루이즈는 고액의 금액을 불러 거절의 의사를 보이려 했지만

그녀는 액수가 너무 많아 겁이 났다. 근무를 마친 그녀는 만 프랑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한번 적어 보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남자에게 돈을 받고 옷 벗는 일을 받아들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창녀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관념과도 일치했다. 또 그녀는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벗은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병원에서 의사에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녀의 동료 중 하나는 어느 미술 학교에서 누드모델 일을 하는데, 그 일은 단지 지루할 뿐이며 감기 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밖에 없다는 거였다. - page 27

금요일 저녁 호텔에서 그와 만나게 되고 그녀 앞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마지노선에서 근무하는 군인 가브리엘과 라울.

전쟁이 일어나는 건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힘겨운 건 당직 근무, 통로를 따라 놓인 접이식 탁자들, 비좁은 내무반, 그리고 식수 제한과 더불어 이곳을 잠수함의 내부처럼 느껴지게 하는 이 좁아터지고 답답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런 독일군의 공격에 전선이 무너지면서 그들은 탈영병 신세가 되고 맙니다.

초등 교사였고 에브뢰 항공 클럽의 조종사였으며 변호사였던, 진정한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데지레 미고.

그렇지 않아도 매력적인 이 젊은이의 말솜씨에 다들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역시도 사기를 치다가 결국 정체가 발각되게 되었고 결국 사라지게 되는데...

독일의 침공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된 파리 시민들.

같이 피란을 가자는 아내 알리스의 청을 뿌리치고 파리에 남겠다는 기동 헌병대원 페르낭.

하지만 엄청난 비밀이 담긴 가방을 얻게 되면서 불법적인 일에 휘말리게 되고 아내와 연락도 끊기도 마는데...

과연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펼쳐질지...

하지만 얼마 안 있어 한 사건이,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고,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깨닫기도 전에 가브리엘은 시대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내던져질 것이다. 그의 삶은 변하여 다시는 같은 것이 되지 않을 거였다. - page 109

전쟁 통을 가로지르며 인생을 바로잡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으로부터 전쟁으로부터의 비극이 희극과 어우러져 아이러니를 선사하고 있었습니다.

책의 제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황금빛 석양의 시간도 끝났고, 이제 오를레앙에서 빠져나오는 도로로, 목마른 말들이 겅중겅중 울타리를 뛰어넘는 들판을 따라 가구를 실은 수레들이 가득한 그 대로로 돌아와야 했다. 부유한 이들의 탈출은 이미 며칠 전에 끝났고, 지금은 그렇지 못한 이들이 군복 차림의 병사, 농부, 민간인, 장애인 들이 뒤섞인 잡다한 무리를 이루어 힘겹게 걷고 있었다. 한 시청 차량에 탄 어느 유곽의 매춘부들, 그리고 양 세 마리를 몰고 가는 목동 등 도로 위엔 그야말로 온 백성이 모여 있었다.

갈가리 찢기고 버려진 이 나라의 모습 자체인 이 피란민의 물결 속에서 자동차는 천천히 덜컹거렸다. 어디에나 얼굴들, 얼굴들이 있었다. 어떤 거대한 장례 행렬 같다고 루이즈는 생각했다.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패배의 가혹한 거울이 된 거대한 장례 행렬이었다. - page 458 ~ 459

전쟁의 비참함에 대해 피란길을 '슬픔의, 패배의 거울'이라는 표현함으로 더없는 비극을...

그 와중에서 권력은, 국가 시스템은 어떠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평범하고도 나약한 시민의 삶의 대조가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통해 엿볼 수 있었던 '희망'.

'사람'을 통해 힘겨운 상황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또다시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마냥 소설로만 치부할 수 없었던 이야기.

지금 우리의 세계 어디서도 일어나고 있고 그들의 슬픔의 거울이 지속되지 않길 바랄 마음밖에 없음에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3부작의 포문을 열었던 『오르부아르』도 찾아 읽어 역사의 큰 그림을 완성해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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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방문
장일호 지음 / 낮은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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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에세이 첫문을 '여행'으로 시작되었고 마지막 문으로 장식될 '방문'.

솔직히 책 제목부터 '슬픈 건 싫은데......'라는 마음에 선뜻 읽을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이번에 '가치' 읽기에 도전을 하게 된 이 책.

슬픔이 찾아온 그 뒷모습이 너무 아프지만은 않길 바라며...

슬픔의 자리에서

비로소 열리는 가능성에 관하여

슬픔의 방문



첫 문장부터 강렬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살했다. 당신 나이 스물아홉 살에. - page 15

엄마의 은폐 덕분에 아버지의 죽음을 삼십 년 가까지 교통사고로 알고 지냈던 그녀.

"사실은 자살"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살짝 놀랐지만 근사한 측면도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한 그녀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내 꿈을 대신 이뤘다. 내가 요절할까 봐 본인이 죽어 버린 게 분명했다. 아버지는 '멋진 글' 대신 '멋진 나'를 남겼으니까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해 버린 건 아닐까. 나는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남긴 사랑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살면서 가끔 필요하고 때로 간절했던 '부정'의 결핍을 나는 이런 식으로 채우곤 했다. - page 16 ~ 17

김애란의 소설로부터 아버지의 부재를, 엄마의 '있음'을 극복했던 그녀.

그렇게 가난했던 유년 시절부터 기자로 살아가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슬픔의 자리마다 책을 통해 메워가고 있었습니다.

책에서 취한 살과 뼈에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마음대로 이어 붙였다. 읽기'는 자주 '일기'가 되었다. 밑줄을 따라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나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들고 책 앞에 서곤 했다. 삶도, 세계도, 타인도, 나 자신조차도 책에 포개어 읽었다. 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반드시 만들어 주었다. 슬픔의 얼굴은 구체적이었다. "나는 항상 패배자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약하다. 환자, 외국인, 반에서 뚱뚱한 남자애, 아무도 춤추자고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심장이 뛴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영원히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프고 다친 채로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원했다. 고통으로 부서진 자리마다 열리는 가능성을 책 속에서 찾았다. 죽고, 아프고, 다치고, 미친 사람들이 즐비한 책 사이를 헤매며 내 삶의 마디들을 만들어 갔다. - page 9 ~ 10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박현주 옮김, 마음산책, 2005

'자살 유가족', '성폭력 피해자', '암 환자',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상처와 슬픔들을 바라보며 읽는 내내 목이 메어왔었습니다.

나라면 슬픔 속에 허우적거릴 텐데...

그럼에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다가도 슬픔이 묵직하게 방문하면 마음 둘 곳을 몰라 서성인다. 가능하면 몰려오는 감정을 피하지 않고 맞선다. - page 80

상처받는 마음을 돌보는

슬픔의 상상력에 기대어

나의 마음에 타인의 자리를 만들곤 했다.

살아가는 일이 살아남는 일이 되는 세상에서

기꺼이 슬픔과 나란히 앉는다.

라며 슬픔을 곁에 둔 채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에 마냥 슬픔을 외면했던 내 태도를 되돌아보며 슬픔의 자리에서야 비로소 열리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도 갖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글이 있었는데...

살아 있는 일은 마음에 그렇게 몇 번이고 무덤을 만드는 일임을, 슬픔은 그 모든 일을 대표하는 감정이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 page 84 ~ 85

나의 마음에 타인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

그렇다고 마냥 슬픔이 아니요, 이 또한 살아나아가는 것임을 일러준 이 말이 자꾸만 입가에 맴도는 건... 왜일까......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슬픔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

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던 그녀의 이야기.

읽어보길 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아련히 남은 이 여운을 진한 커피향과 함께 잠시나마 즐겨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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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일라이저의 영국 주방 - 현대 요리책의 시초가 된 일라이저 액턴의 맛있는 인생
애너벨 앱스 지음, 공경희 옮김 / 소소의책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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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현대 요리책 저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이라는 점에서 이끌려서 읽게 된 이 책.

사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보지 않았던 '요리책'이지만 이제는 주방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는 중요하고도 애정 하는 요리책의 시초를 만난다니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인이자 선구적인 요리책 저자였던 '일라이저 액턴'의 생애와 그녀의 조수 '앤 커비'에 대한 서너 가지 사실에 기초한 허구의 소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일라이저 액턴이 10년에 걸쳐 쓴 책은 모든 현대 요리책 작가의 교본이 되었다!"

미스 일라이저, 오늘은 어떤 음식이 나가나요?

"요리책을 가져와요, 시는 아무도 읽지 않으니."

미스 일라이저의 영국 주방



1861년 런던 그리니치.

나이와 하녀 경력으로 볼 때 '미시즈 커비'가 더 어울리겠지만 '나의 앤'이라고 부르는 미스터 휘트마시.

"당신한테 주는 거요, 나의 앤."

출근하기 전, 나에게 건넨 간색 종이 포장.

리본이 아니라 끈으로 동여맨 꾸러미를 그가 떠난 뒤 끈을 풀어봅니다.

시집일까? 아니면 소설? 지도책? 어쨌거나 왜 그가 나한테 선물을 사줬을까?

포장지를 다 벗기자 시집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큼직한 책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미시즈 비턴의 가정 관리서'

실망감에 휩싸인 손가락을 움직여 책장을 넘기니 송아지 무릎 고기와 쌀...... 타르타르 머스터드...... 화이트소스를 뿌린 순무...... 요리책을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단어, 모든 재료가 묘하게 익숙하다. 책장을 넘긴다. 읽는다. 또 넘긴다. 그다음 장. 서서히 파악이 된다. 여기 실린 레시피들은 내 것이다. 물론 그녀 것이기도 하다. 내가 알아보는 것은 직접 조리해 봐서다. 내가 석판에 레시피의 관찰 기록을 적었기 때문이다. 분필 토막으로. 매일매일. 몇 년이나. - page 13

이 레시피들의 임자는 나와 아직 시신이 식지도 않은 채 무덤에 있는 미스 일라이저의 것임에 도둑질한 레시피 책을 두고 앤은 결심하게 됩니다.

이제 뭘 해야 될지 잘 안다. - page 14

그리고는 이야기가 30대 중반의 숙녀 일라이저와 사춘기의 하녀 앤이 번갈아가며 '요리'를 통해 여성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는 사회에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첫 시집으로 성공에 한껏 기대하며 출판사를 찾아간 일라이저.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답변은

"시는 숙녀의 영역이 아닙니다." - page 19

10년간의 산고가 허사로 돌아가 오장육부-내 영혼, 대담성-가 푹 퍼내져서 버려지는 기분이 든 일라이저.

그런 그녀에게

"요리책!"

...

"집에 가서 요리책을 써와요. 그러면 계약할 수도 있으니. 잘가요. 미스 액턴." - page 21 ~ 22

요리를 하지도, 할 줄도 모르는 그녀에게 요리책 집필을 요구하는 출판사.

"시를 쓸 수 있다면 레시피도 쓸 수 있을 겁니다." - page 22

수치심과 열패감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의 부도 소식과 함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뜻하지 않게 어머니와 '보다이크 하우스'라는 하숙집을 열게 되고

"요리책 저자들을 연구하는 중인데 제가 더 잘할 수 있어요. 일부는 제대로 된 글도 아니에요. 계량은 부정확하고 표현은 경박하고요. 명확성이 떨어지고, 심지어 레시피 자체도 입맛을 돋우지 않아요."

나는 어머니를 힐끗 쳐다본다. 그녀는 양손을 쥐어짜면서, 소리없이 입술과 턱을 달싹인다.

"요리사가 되려는 게 아니에요. 요리 '작가'가 될 거예요. 얼마든지 가능하다 싶어요." - page 65

본격적으로 요리책을 집필하고자 합니다.

한편 정신병에 시달리는 어머니와 전쟁터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10대 소녀 앤 커비.

요리사의 꿈을 갖고 있던 앤은 미스 일라이저의 주방 하녀로 일하게 되면서 일라이저와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 다채로운 레시피를 실험하면서 요리 실력을 점점 쌓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된 두 여성의 음식과 우정 이야기.

그 속엔 여성의 자유와 독립적 지위, 창의적인 요리의 즐거움, 다양한 요리와 어우러지는 시와 삶에 대한 열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주방으로의 초대.

한 번 응해보시는 건 어떨지.

당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압을 받아야 했던...

그럼에도 그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그들.

"이걸 바꾸는 게 우리 임무야, 앤. 주방에서 제대로 요리된 음식처럼 영양가 있고 건강한 것은 없거든." - page 307

마침내 자신의 요리책 앞에서...

앤! 내 책을-우리 책을-앤에게 헌정하고 싶다...... 하지만 아니, 그리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작가도 하인에게 책을 헌정한 바 없고 어머니가 격노하리라. 앤과 수재너를 포함하는, 주방 친구가 필요한 누구에게나 말을 거는 헌정 대상을 찾아야 한다. 주방에서 추방된 이들...... 부자와 빈자, 기혼자와 미혼자, 유대인과 이교도를 아우르는 상대를, 머릿속에서 말들이 오려지고 접히기 시작한다. 명확하고 단순한, 핵심적인 어휘들이 필요하다. 내 레시피들 같은. 나 같은......

눈을 감는다. 불꽃이 천 개의 숨을 내뿜는 소리, 식품실에서 앤이 흥얼대는 소리, 그녀가 병들과 단지들을 배치하느라 덜컥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 음악으로부터 한 줄의 언어가 머릿속으로 흘러든다. 명확하고 단순한, 완전한 구절. 완벽한 헌사.

영국의 젊은 주부들에게 바칩니다. - page 421 ~ 422

그 어떤 말보다 더 빛났던 이 말.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그녀들의 주방 속으로 여행하게 되었고 만감이 교차되곤 하였습니다.

책을 덮는 그 순간까지도 이들의 소리와 음식의 향이 남아 잔잔히 미소가 번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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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 그 높고 깊고 아득한
박범신 지음 / 파람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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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50주년을 맞아 2종의 산문집을 발표한 '박범신' 작가.

정말 오랜만에 작품을 만나는 것 같았습니다.

2종의 산문집 중에서도 먼저 이 책이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이야기하는 바람'

박범신의 높고 깊은 산문미학!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의 순례길을 따라가보려 합니다.

"나는 본래 길이었으며 바람이었다"

삶의 비의와 신의 음성을 찾아가는 머나먼 길

지극한 정신과 육체로 몰아붙인 순수의 여정

순례



아마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닐까.

질주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십상이기에 너나없이 오로지 앞으로 달려가는 우리들.

그렇게 한참을 앞만 보고 내달리다가, 어떤 새벽이나 한낮, 또는 어떤 저녁 어스름에 순간적으로 가슴 한쪽을 면도날로 긋고 가는 듯한 예리한 동통을 느끼며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이렇게 중얼거리는 순간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이런 순간을 그는 여기, 히말라야에 온다고 하였습니다.

히말라야는 무엇보다 내가 내 집, 내가 속한 사회에서 악을 써가며 지키고자 했던 것, 사악한 전투, 거짓말, 허세, 그리고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이 주었던 상처들까지, 얼마나 나와 상관없이 주입된 가짜 꿈들에서 비롯된 것인지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걷는 것뿐입니다. 자동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습니다. 오직 내 앞에 놓인 길만이 나를 도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은 분산되지 않습니다. 멀리 있으니 오히려 내 나라가 조감도처럼 한눈에 보이고 그곳에서 습관에 의지해 죽을 둥 살 둥 달려온 나의 지난 삶도 아프게 보입니다. 바로 '은혜로운 생음'이 불러온 본원적 세계를 사실적으로 보고 느끼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 page 17

그렇게 히말라야로, 킬리만자로로, 피레네산맥으로 자신 앞에 놓인 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몸은 고될지언정 불안감엔 사로잡히지 않는 그 길 위에 순례자가 되어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나는 비로소 눈물겹게 확인합니다. 불멸의 주인은 에베레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오르고 또 올라도 허공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모든 길은 허공에서 시작되고 갈라지고 끝난다는 것을요. 살아서 무엇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근원적으로 우리가 불멸의 환희에 도달할 수 없는 건 스스로 허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 page 79

나는 무엇을 찾아 헤매었던가.

끊임없이 그가 묻고 또 물었던 이 질문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와 묻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히말라야 산협을 걸으면서 가장 아프게 다가온 회한은 고백하건대 대개 사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남녀 간의 '연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을 떠받치고 있는 근본으로서의 에너지가 사랑이라면 너무 보편적일까요. 범박하다고 질책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살아서 불멸은 꿈일진대, 사랑 이외에 우리가 진정을 다해 말해야 할 것이, 사랑 이외에 우리가 목 놓아 울어야 할 것이, 사랑 이외에 우리가 모든 진심을 맡겨도 좋은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하고 생각한 날이 많았습니다.

그렇고말고요, K형. 돌이켜보니 나는 사람이었고, 사람이므로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 사랑은 나의 명줄이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썼고, 사랑 때문에 세상과 더러 싸웠고, 사랑 때문에 노동과 모든 수고를 바쳤으며, 사랑 때문에 자주 엎드려 울었습니다. 그러나 히말라야를 걸으며 나는 아프게 자책했습니다. 나의 사랑은 사랑이었다기보다 사랑의 습관, 사랑의 습관이라기보다 사랑의 '모방'은 혹시 아니었을까 하고요. - page 116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폐렴을 얻고 돌아와 폐암 판정을 받은 그.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암종이 나의 숨구멍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는 전갈을 듣고 나는 순간적으로 이제까지 걸었던 길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순례가 시작되겠구나하고 생각한 것 같아요. 마침내 하나의 먼 길이 끝나고 또 다른 하나의 먼 길이 시작되는 문 앞에 당도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내가 이 책의 말미에 이 글을 덧붙이는 건 그 때문이에요. 마음 아프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죽든 살든, 어차피 한 세상 사는 건 당연히 하나의 순례니까요. - page 292

인생도 하나의 순례라 외치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순례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숙연해졌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내 앞에 놓은 길.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나아가야할지 잠시 생각에 잠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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