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런던 그리니치.
나이와 하녀 경력으로 볼 때 '미시즈 커비'가 더 어울리겠지만 '나의 앤'이라고 부르는 미스터 휘트마시.
"당신한테 주는 거요, 나의 앤."
출근하기 전, 나에게 건넨 간색 종이 포장.
리본이 아니라 끈으로 동여맨 꾸러미를 그가 떠난 뒤 끈을 풀어봅니다.
시집일까? 아니면 소설? 지도책? 어쨌거나 왜 그가 나한테 선물을 사줬을까?
포장지를 다 벗기자 시집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큼직한 책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미시즈 비턴의 가정 관리서'
실망감에 휩싸인 손가락을 움직여 책장을 넘기니 송아지 무릎 고기와 쌀...... 타르타르 머스터드...... 화이트소스를 뿌린 순무...... 요리책을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단어, 모든 재료가 묘하게 익숙하다. 책장을 넘긴다. 읽는다. 또 넘긴다. 그다음 장. 서서히 파악이 된다. 여기 실린 레시피들은 내 것이다. 물론 그녀 것이기도 하다. 내가 알아보는 것은 직접 조리해 봐서다. 내가 석판에 레시피의 관찰 기록을 적었기 때문이다. 분필 토막으로. 매일매일. 몇 년이나. - page 13
이 레시피들의 임자는 나와 아직 시신이 식지도 않은 채 무덤에 있는 미스 일라이저의 것임에 도둑질한 레시피 책을 두고 앤은 결심하게 됩니다.
이제 뭘 해야 될지 잘 안다. - page 14
그리고는 이야기가 30대 중반의 숙녀 일라이저와 사춘기의 하녀 앤이 번갈아가며 '요리'를 통해 여성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는 사회에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첫 시집으로 성공에 한껏 기대하며 출판사를 찾아간 일라이저.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답변은
"시는 숙녀의 영역이 아닙니다." - page 19
10년간의 산고가 허사로 돌아가 오장육부-내 영혼, 대담성-가 푹 퍼내져서 버려지는 기분이 든 일라이저.
그런 그녀에게
"요리책!"
...
"집에 가서 요리책을 써와요. 그러면 계약할 수도 있으니. 잘가요. 미스 액턴." - page 21 ~ 22
요리를 하지도, 할 줄도 모르는 그녀에게 요리책 집필을 요구하는 출판사.
"시를 쓸 수 있다면 레시피도 쓸 수 있을 겁니다." - page 22
수치심과 열패감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의 부도 소식과 함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뜻하지 않게 어머니와 '보다이크 하우스'라는 하숙집을 열게 되고
"요리책 저자들을 연구하는 중인데 제가 더 잘할 수 있어요. 일부는 제대로 된 글도 아니에요. 계량은 부정확하고 표현은 경박하고요. 명확성이 떨어지고, 심지어 레시피 자체도 입맛을 돋우지 않아요."
나는 어머니를 힐끗 쳐다본다. 그녀는 양손을 쥐어짜면서, 소리없이 입술과 턱을 달싹인다.
"요리사가 되려는 게 아니에요. 요리 '작가'가 될 거예요. 얼마든지 가능하다 싶어요." - page 65
본격적으로 요리책을 집필하고자 합니다.
한편 정신병에 시달리는 어머니와 전쟁터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10대 소녀 앤 커비.
요리사의 꿈을 갖고 있던 앤은 미스 일라이저의 주방 하녀로 일하게 되면서 일라이저와 신분을 뛰어넘는 우정, 다채로운 레시피를 실험하면서 요리 실력을 점점 쌓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된 두 여성의 음식과 우정 이야기.
그 속엔 여성의 자유와 독립적 지위, 창의적인 요리의 즐거움, 다양한 요리와 어우러지는 시와 삶에 대한 열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주방으로의 초대.
한 번 응해보시는 건 어떨지.
당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압을 받아야 했던...
그럼에도 그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그들.
"이걸 바꾸는 게 우리 임무야, 앤. 주방에서 제대로 요리된 음식처럼 영양가 있고 건강한 것은 없거든." - page 307
마침내 자신의 요리책 앞에서...
앤! 내 책을-우리 책을-앤에게 헌정하고 싶다...... 하지만 아니, 그리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작가도 하인에게 책을 헌정한 바 없고 어머니가 격노하리라. 앤과 수재너를 포함하는, 주방 친구가 필요한 누구에게나 말을 거는 헌정 대상을 찾아야 한다. 주방에서 추방된 이들...... 부자와 빈자, 기혼자와 미혼자, 유대인과 이교도를 아우르는 상대를, 머릿속에서 말들이 오려지고 접히기 시작한다. 명확하고 단순한, 핵심적인 어휘들이 필요하다. 내 레시피들 같은. 나 같은......
눈을 감는다. 불꽃이 천 개의 숨을 내뿜는 소리, 식품실에서 앤이 흥얼대는 소리, 그녀가 병들과 단지들을 배치하느라 덜컥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 음악으로부터 한 줄의 언어가 머릿속으로 흘러든다. 명확하고 단순한, 완전한 구절. 완벽한 헌사.
영국의 젊은 주부들에게 바칩니다. - page 421 ~ 422
그 어떤 말보다 더 빛났던 이 말.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그녀들의 주방 속으로 여행하게 되었고 만감이 교차되곤 하였습니다.
책을 덮는 그 순간까지도 이들의 소리와 음식의 향이 남아 잔잔히 미소가 번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