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초난난 - 비밀을 간직한 연인의 속삭임
오가와 이토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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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식당』 과 『츠바키 문구점』 의 작가 '오가와 이토'.

그녀의 작품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힘을 내재하고 있기에 읽으면서 힐링 되는, 그래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분입니다.

그런 그녀가 이십 대에 쓴 장편소설인 이 작품이 드디어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또 얼마나 감동을 더해줄까...

끝을 알면서도 시작되는 사랑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와 보낸 시간은 빛을 발하듯 아름다웠다."

초초난난



도쿄 시타마치의 모습이 남아 있는 야나카라는 동네에서 작은 앤티크 기모노 가게 히메마쓰야를 운영하고 있는 '시오리'.

집 앞 청소도, 화분 손질도 끝나고 가게 안으로 돌아와 마토카 씨가 준 과자를 먹으며 잠깐 쉬려는데 실례합니다, 하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찾는 게 있으신가요?"

조용히 다가가 묻자 남자는 허둥지둥 "아, 아뇨, 저, 기모노를 찾습니다만." 하고 대답했다. - page 13

클라리넷의 저음을 닮은 듣기 좋은 목소리와 어딘가 기린을 닮은 듯한 이 남자.

신년 다회에 입을 기모노를 찾고 있었고 다행히 남자 기모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매와 기장이 약간 짧아 사이즈 수선이 필요했기에 다음에 찾아올 것을 약속하며 서로의 명함을 주고받았는데 '기노시타 하루이치로' 씨...

이름이 근사하시네요, 라고 내가 칭찬하자 기노시타 씨는 봄의 첫 강풍(일본어로 '하루이치반')이 분 날 태어났거든요, 라고 부끄러운 듯 웃으며 대답했다. 웃으면 눈꼬리에 주름이 세 줄 지는, 왼손 약지에 결혼반지를 낀 사람이었다. - page 23

신년 다회 전날, 기노시타 씨는 오후 늦게 기모노를 찾으러 왔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는데 많은 이가 오가는데도 기노시타 씨가 있는 곳만 양지바른 곳처럼 환해 보이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를 만날 때마다 머리로는 이래도 되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몸은 기노시타 씨가 있는 쪽으로 달리기 시작한 시오리.

그렇게 이들은 봄날의 꽃구경을 시작으로 한여름 불꽃놀이를 지나 가을의 달맞이하며 다시 지독한 겨울 감기와 함께 사계절을 함께 애틋한 사랑을 하게 되는데...

이대로 이런 식으로 하루이치로 씨와 가까워지면 나는 더더욱 하루이치로 씨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난처한 사람은 하루이치로 씨다. 하루이치로 씨가 살아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한편, 내가 차츰 하루이치로 씨의 인생에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이 이상 다정하게 대하면 나는 참지 못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 알 수 있었다. - page 375 ~ 376

이 둘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

사계절과 함께 나아가는 아련한 사랑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수채화처럼 그려진 이들의 이야기.

몽실몽실하였고 아련함에 잔잔한 여운으로 남았던 이 소설.

무엇보다 시오리의 내면이 섬세히 그려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문장...

그래도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싶다. 마음속에 잔해처럼 무질서하게 쌓인 감정과 감정 사이로, 빛을 구해 지상에 고개를 내미는 꽃처럼 나도 환한 쪽을 향해 살아가고 싶다. - page 427 ~ 428

오가와 이토의 작품에서만 맛볼 수 있는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모습이었습니다.

덕분에 따스한 바람이 제 가슴에 살랑 불어와 핑크빛으로 물들여주었습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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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보는 은밀한 세계사 - 흥미로운 역사가 담긴 16통의 가장 사적인 기록, 편지 세계사
송영심 지음 / 팜파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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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만나는 또 다른 재미.

이번에는 '편지'였습니다.

'편지'라 하니 딱! 떠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편지'.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조마리아 여사가 안중근 의사에게 보낸 편지 중

어미의 마음보다는 의연하게 조국 수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라고 전한 조마리아 여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앞으로도 살아갈 모두에게 큰 울림을 선사하였었는데...

이뿐만 아니라 또 다른 편지에선 어떤 서사가 그려져있을지 기대가 되었습니다.

"그날 그 편지가 없었다면 역사는 바뀌었을까?"

세계사를 만나는 또 다른 재미,

16통의 편지가 그려 내는 감동과 반전의 드라마틱 세계사

편지로 보는 은밀한 세계사



공식적으로 역사 속에 그려진 인물의 이면을 들여다보기는 여간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는 잘 알 수 없는 진정한 인간의 목소리와 절절한 사연이 담겨있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편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메시지, 삶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도 희망을 희구하는 마음, 그리운 조국에 보내는 안쓰럽기 이를 데 없는 부탁들, 울분을 토하며 나라를 생각하고 죽음의 현장으로 달려가면서도 애써 웃으며 벗에게 보내는 메시지, 접고 또 접고 들킬까 또 접은 비밀 편지의 흔적, 내일이면 처형장에서 숨이 끊어지는데 오늘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누이를 만나며 눈짓으로 램프 아래 숨긴 시를 알리는 역사적 인물의 모습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편지글을 읽다 보면, 영광과 명예를 모두 내던지고 혁명을 위해 떠나는 이를 향한 뜨거운 존경심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가 하면, 역사 속 상식처럼 알고 왔던 지식이 사실은 진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니 새로운 시선을, 감동과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편지만이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의 내밀한 면모와 은밀한 속내.

그래서 오롯이 한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며 공감을 하고 울림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전쟁이라는 오명을 남긴 '아편전쟁'.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억울함을 알린 청나라의 임칙서의 울분에 찬 편지.

당신의 나라에서 아편을 흡연하는 걸 엄격히 금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은 당신들이 아편으로 인한 해악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자기 나라에 해악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 해악을 다른 나라에 전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중국에게!

_임칙서가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낸 편지

어떻게 보면 임칙서는 아편 전쟁을 일으킨 도화선에 불을 붙인 장본인으로 볼 수 있지만 그의 강직한 성품으로 나라를 위해 영국 여왕에게도 굽히지 않는 용기를 가진 애국지사임을, 그렇기에 양면을 바라보는 시각의 중요성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오갔지만 정작 이 역의 이름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던 '충정로역'.

이는 충정공 민영환 선생을 기리기 위해 '충정로'라고 지었다는데...

고종을 모시던 최고 공직자였던 민영환 선생.

그는 나라가 기울어 가는 책임을 오롯이 짊어지고 외교권이 강탈된 것에 항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첫닭이 울 때까지 자신이 지니던 명함을 꺼내어 격한 심정을 담았던 유서.



나라를 위해 소중한 목숨을 내놓은 그의 충절.

마지막에 '혈죽가'의 일부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다가왔었습니다.

슬프도다, 슬프도다./우리 국민 슬프도다.

저버렸네, 저버렸네./민충정을 저버렸네.

한칼로 순국하던/정충대절 그 영혼.

구원명명 저 가운데/우리 국민 굽어보네.

이 책은 역사적 인물의 민낯과 은밀한 속내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뒤늦게 후대의 평판이 달라지고 있는 콜럼버스의 변화가 고스란히 담긴 편지.



콜럼버스의 탐욕과 폭력으로 처음 콜럼버스가 만났던 아라와크 족은 약 25만 명이 살고 있었지만 100여 년이 지나면서 생존자가 없이 그저 그런 부족이 살았다는 기록만이 남았다는 사실을.

그래서 사람들은 콜럼버스를 모기 같은 피만 빨아먹는 쓸모없는 제독이라 하여 '모기 제독'이라 불렀고 이사벨 여왕이 죽은 후 콜럼버스도 몰락하여 쓸쓸히 생을 마쳤다고 하니 이제라도 불편하게 여겨질 진실에 정면으로 대해야 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좀 더 인물에 다가가서 바라본 역사.

보다 입체적으로 다가왔었습니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제는 편지 쓸 일이 없어졌는데 괜스레 편지를 써 보고 싶어졌습니다.

이 편지가 훗날 나의 역사의 한 조각을 장식할지도 모르기에...

진심 어린 손 편지 하나 써내려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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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걷기 수업 - 두 발로 다다르는 행복에 대하여
알베르트 키츨러 지음, 유영미 옮김 / 푸른숲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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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겐 『걷는 사람, 하정우』 책을 읽고 난 뒤 '걷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운동 중에서 제 몸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도 언제든 할 수 있는 걷기를 시작하였었습니다.

시간이 날 때면,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이어폰을 끼고 걷기 시작하는데...

그러면서 비로소 깨달았던...

내 갈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것, 내 보폭을 알고 무리하지 않는 것, 내 숨으로 걷는 것, 걷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묘하게도 인생과 이토록 닮았다. -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문학동네, 2018, page 41

그렇기에 오늘도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는 길을 나서게 됩니다.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문학동네, 2018, page 291 ~ 292

아무튼!

'걷기'에 관심이 많기에 이와 관련된 책이 있으면 찾아 읽곤 합니다.

이 책 역시도 '걷기'에 대해, 그를 통한 '행복'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기에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학자가 건네는 걷기의 철학.

어떤 울림을 줄지...

"걷는 동안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우리는 다시금 자기 자신이 된다."

노자,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루소...

위대한 철학자들이 건네는 걷기의 철학

철학자의 걷기 수업



대학에서 법학과 철학을 전공한 뒤 변호사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던 저자.

그는 남미로 1년 일정의 도보 여행을 떠나면서 인생 최대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낯선 땅을 돌아다니며 인생을 반추하고 젊은 시절의 꿈이었던 영화 제작에 대한 열망을 되찾고 방향을 틀어 12년간 영화 제작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다 코르시카섬으로 떠난 두 번째 도보 여행으로부터 또다시 삶의 행로를 바꾸게 됩니다.

쉬이 떨쳐내기 어려운 내면의 소리를 좇아 철학의 길을 걷기로 합니다.

책에서 그는 대자연과 하나 되며 자기 자신의 중심에 가닿았던 크고 작은 걷기의 경험과 함께, 걷기를 즐겨 한 역사적 인물들의 사례와 철학적 사유를 엮어냈습니다.

자연을 찾아 발길을 옮기는 걷기의 가치가 건강 유지나 힐링 차원의 휴식 그 이상임을,

우리의 삶 자체가 걷기의 한 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전하며 온전한 나를 되찾고, 소란한 마음을 잠재우고 싶다면 잠깐이라도 좋으니 밖으로 나가 한 발 천천히 내딛기를 권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무작정 걷는다고 삶에 대한 사색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침묵 속에서 홀로 자신의 생각에 젖어 걸어갈 때 자기 자신의 상황, 타인과의 관계,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 혹은 큰 기쁨을 주는 것에 대해 사색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실천 철학의 시작'이라 하였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안식에 이르게 되고 비로소 자신의 '이타카(《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고향으로, 오디세우스에게는 출발지이자 목적지인 곳)'을 발견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특히나 자연 속을 걷는 일은 오감을 충족시키는 총체적 경험으로 자연에 대한 깊은 경험은 우리를 내적으로 성장시키고, 가치 체계를 바라잡아준다고 하였습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일상의 문제들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기에 진정한 걷기를 하기 위해선 잠시 일상과 거리를 두고 자연 속을 걸어볼 것을 제안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을 유유히 거닐 때처럼 길을 걷는 것 자체가 목표이지,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초연하고 겸허한 태도를 지닐 것을 일러주었습니다.

걸음 속도처럼 천천히 읽어내려갔던 이 책.

한 발 한 발 사유하게 되었고 차분히 제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꼭 걷기만이 답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걷기를 통해 '고요한 행복'에 다다르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제 또다시 저도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봅니다.

"걸어 다니면서 새롭게 힘을 얻고 스스로 곧추설 때만이

내 운명의 주인이자, 키잡이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걷기 없는 인생을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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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끄고 씁니다 - 가족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의 특별한 삶
양영희 지음, 인예니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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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고레에다 히로카즈, 김윤석, 양익준 극찬

요즘 들어 박찬욱 감독의 추천작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음...

뭐지...

아무튼 이번엔 좀 더 특별한 만남이었습니다.

2005년 처음 세상에 내놓은 <디어 평양>으로 제56회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 NETPAC상, 제22회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등을 받았고,

<굿바이, 평양> (2009)은 베를린영화제를 비롯한 유수의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첫 극영화 <가족의 나라> (2012)로 제62회 베를린영화제 포럼 부문에서 CICAE상을 수상하며 영화감독으로서 입지를 굳힌 '양영희' 감독.

재일코리안 가족의 아픈 역사를 그려낸 그녀가 신작 <수프와 이데올로기> 개봉에 맞춰 이 책을 내놓았다고 하였고...

저는 이번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카메라를 끄고 그려낼 이야기는 어떨지...

그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가족이란 사라지지 않고, 끝나지도 않아"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수프와 이데올로기>

가족 다큐멘터리 3부작을 완성한 양영희의 첫 산문집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



'조선인 부락'이라 불리던 오사카시 이카이노(현 이쿠노구) 출신 재일코리안 2세인 그녀, 양영희.

열렬한 조총련 활동가 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일곱 살 즈음, 세 오빠를 이른바 '귀국 사업'으로 북에 떠나보내고 상실감과 오랜 세월 자신을 괴롭힌 트라우마를 원동력 삼아 가족의 이야기를 캠코더에 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 편의 다큐멘터리의 타임라인을 따라가며 아버지-북의 가족들(분신과도 같은 조카 선화 포함)-어머니의 이야기를 이 책에서 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연고라고는 없던 북한을 지지하고 맹목적으로 조총련 활동을 하던 부모님.

그 내면엔 제주4.3사건이 있었고 이는 한 가족의 삶에, 나아가 한반도와 재일코리안의 역사에 거둘 수 없는 그림자를 남기고 말았었습니다.

상황이 그러했고 당신들의 선택에 맹목적이고 편협했던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답답함에...

'아들을 돌려줘!' 가슴속으로 수없이 외쳐댔을 부모님의 회한을 생각하면 누구에게 터뜨려야 할지 모를 분노가 솟구쳤다. 동시에 북송 사업의 선봉장이었던 부모님의 설득으로 북에 건너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부모님을 규탄하고 싶어졌다. 세 아들과 가족들을 볼모로 만든 부모님을 결과만 놓고 공격하려는 스스로가 유치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입 밖으로 뱉지 못하고 삼켜버린 생각들이 끝없이 머릿속을 맴돌아서, 원룸으로 돌아갈 때쯤이면 부모님과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지쳐버렸다. - page 47 ~ 48

그녀가 가족을 향해 카메라를 든 건 결국 그들을 제대로 마주 본 다음에 해방되고 싶어서였습니다.

영화 하나 만들었다고 무엇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손목 발목에 주렁주렁 차고 있는 그것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그것들의 정체를 알아내야 했다. 알아야만 비로소 벗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 page 31

평양에 살고 있는 세 아들과 며느리들, 성장에 따라 커져가는 손주들에게 보낼 짐을 싸면서 항상 웃으시면 하시던

"이런 짓은 나만 하면 돼. 부모니까 하는 거지"

말씀이,

뇌경색 전에 무엇보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세 명 전부 보내서 후회해?" 갑자기 물어보자 침묵이 흘렀다. 될 대로 되라지 생각한 순간,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미 가버린 건 별수 없다 싶지만, 그, 가서...... 가지 않았으면 더 좋았으려나 그렇게는 생각하지." 내 귀를 의심하면서 신중하게 질문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타임캡슐을 타고 북송 사업이 활발했던 무렵으로 돌아가서 목차를 훑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때 아버지 연세가? 아들들을 보냈을 때. 아버지는 몇 살이셨죠?"

"몇 살이었으려나......"

"지금부터 32, 33년 전이면 아버지가 43, 44세?"

"당시 전망이라는 게, 재일조선인 운동이 제일 양양하던 시기이기도 하고. 문제가 다 잘 풀리는 쪽으로 보았으니까. 안일했지......" - page 92

그리고 자신의 죽음 앞에 딸에게 건넨 이 한 마디가

"영희가 정한 길, 쭈욱 가면 돼."

참 울컥하게도 만들었었습니다.

분노와 반발심으로 그토록 벗어나고팠던 가족이 한 걸음 뒤에서 관찰하고 기록함으로써 이해와 용서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국적의 '아라이 카오루'라는 남자의 등장은 가족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쳤던 양영희에게 새로운 '가족'을 선사하게 됩니다.

어머니와 카오루가 테이블에 마주 앉아 함께 장을 봐온 마늘 껍질을 벗기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목격했을 때, 이 장면이 작품의 핵심이 되리라 확신했다. 이데올로기가 달라 서로 탓하고 싸우고 죽이는 세상에서,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가족이 되어 함께 밥을 해서 나눠 먹는다는 사실이 무척 숭고하게 느껴졌다. 생각이나 가치관이 달라도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어머니와 카오루가 증명해주는 것만 같았다. - page 172 ~ 174

양영희 감독이 전한 이야기.

비극적인 현대사 위에 켜켜이 쌓여간 애달픈 가족의 서사는 그 어떤 기록문보다도 소중하였습니다.

감독이 앞서 말했던

"가족이란 사라지지 않고, 끝나지도 않아. 아무리 귀찮아도 만날 수 없더라도 언제까지나 가족이다"

오랫동안 가슴에 맴돌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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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 고길동을 부탁해 둘리 에세이 (열림원)
아기공룡 둘리.김수정 원작, 김미조 엮음 / 열림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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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엔 '고길동'이 밉기만 하였습니다.

툴툴거리며 맨날 둘리를 구박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 아저씨는 나쁜 아저씨임에 틀림없다며 미워했었는데...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된 지금에서 고길동을 바라보니...

짠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젠 그를 이해한다고 할까나...

『둘리, 행복은 가까이 있어』에 이어서 읽게 된 이 책.

더 많은 공감과 위로를 받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이 시대 고길동들에게 전하는 둘리의 위로

"혼자 힘내지 말고 함께 힘내요!"

둘리, 고길동을 부탁해



본문에 들어가기 전 깐따삐야 별에서 온 도우너가 말을 건네주었습니다.

뜻밖에 자신이 탄 우주선이 고장나 지구에 불시착하게 된 도우너.

당혹스러움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잠잘 곳도 문제였는데 그때 둘리를 만나게 됩니다.

"너 참 이상하게 생겼다."

서로 이상하게 생겼다고 말은 하지만 서로를 밀어내거나 경계하지는 않는, 그렇게 '이상하게 생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그들.

그리고 둘리로부터 애완동물인 희동이, 또치, 영희, 철수를 만나게 됩니다.

또, '길동이'까지.

툭하면 화내고,

툭하면 소리 지르고,

즐거운 일이 있어도 환하게 웃지 않고,

미안하거나 고맙다는 말도 쉽게 하지 못하는 그, 길동이.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 그를 보며 도우너가 전한 이야기는...

알고 보니 둘리도 길동이 덕분에 이 험난한 여행지에서

따뜻하게 살고 있었어요.

길동이는 정말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이죠?

그래서 귀여울 때도 있지만 안쓰럽기도 해요.

서투른 감정 표현 때문에 곧잘 오해를 받거든요.

이곳은 내가 원했던 목적지는 아니지만

난 지금은 이곳에서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길동이에게 구박받아 맘 상할 때도 있고,

둘리와 말다툼을 할 때도 있지만

훗날 깐따삐야 별로 돌아가면 이 순간이 그리울 거예요.

난 그래서 떠남이 좋아요. - <프롤로그> 중

그렇게 떠남의 경험으로 얻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온전히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나이를 먹는 만큼 고민에 고민이 더해지는 일상.

머리는 복잡하고 가슴은 답답한...

그야말로 일상에 지치고 갈 곳을 잃어버리기 일쑤인데 그런 우리들에게 건넨 다정한 한 마디.

그냥 아무 고민 없이 오늘 하루를 보내봐요.

무엇을 할까,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지도 말아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움직여요.

수많은 날 중에 하루쯤은

그렇게 움직여도 괜찮아요.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 걱정 말아요. - page 79

마음 가는 대로 움직여도 괜찮다는 이 말이 참 따뜻하게 다가왔었습니다.

만년 '과장'이지만 여러 식구의 '가장'이기도 한 고길동.

왜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이해를 하게 된 것일까... 란 생각을 해 보니 내 모습과도 닮아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누구보다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을 지닌 그.



그런 그가 곧잘 말하는 이 말이 진하게 남았었습니다.

"사는 게 이런 거지."

그러면서 어느 순간 가족이 된 식객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닮아가는 모습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길동 아저씨에게 외치고 싶었습니다.

몸은 물론이고

마음도 아프지 말아요.

가장이라서가 아니라

과장이라서가 아니라

가족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님이니까요.

아프지 말아요.

가장님, 과장님!

당신을 사랑하세요. - page 195

이 말은 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건넨 메시지였기에 큰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고길동.

잠시나마 등짐을 내려놓고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을 기대어 보기를, 그리고 주위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음을 느끼는 하루를 보내는 건 어떨지요.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 걱정 말아요,

우리의 가장 길동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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