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기에 릴리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내 뇌리에는 맨 먼저 툇마루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던 조그맣고 포동포동한 그녀의 실루엣이 무지개처럼 아련히 나타나곤 한다. - page 8
이야기는 신슈에서, 나와 릴리를 둘러싼, 같은 피가 흐르는 가족 이야기 시작되었습니다.
호타카의 작은 여관에서 태어난 겁 많은 소년 '류세이'.
해마다 여름이면 도쿄에서 특급 '아즈사'를 타고 찾아오는 '릴리'.
그렇기에 어린 소년에게 여름은 곧 릴리고, 릴리는 곧 여름이었습니다.
릴리는 가끔 하늘나라 여행에 빠지는 어딘가 아련하였고, 귀엽기는 하지만 조금 심술쟁이인, 도시 아이 주제에 자연 속에서 놀거리를 찾아내는 그런 그녀와 함께 지내는 여름만이 소년에게 살아갈 힘을 주었기에 언제나 여름만 기다리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릴리가
"류"
라고 부를 때면 배 속 구석구석까지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 같은, 사랑인 줄도 모른 채 릴리만을 바라보는 류세이.
그러다 우연히 강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다'란 이름을 지어주고 바다를 통해 일 년 내내 릴리가 찾아올 여름만 기다리던 소년에게 모든 계절이 발하는 순간순간의 반짝임을 배우게 됩니다.
나, 릴리, 바다가 아름다운 삼각형을 그리듯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해 여름을 조용히 지냈다. - page 100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다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소년에게 릴리의 나지막한 목소리.
"어쩔 수 없는 일이야." - page 120
그렇게 소년은 큰 좌절과 절망을 겪으며 어른으로의 여정에 들어서게 됩니다.
어른이 되면서도 그의 방황은 계속되고 그런 그에게 건넨 기쿠 할머니의 이야기는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었습니다.
흙 찜질을 하면서
"흙 속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렇게 풀이 우거졌기 때문이야. 인간은 금세 잡초라고 뽑아 버리고 말려 죽이고 하잖냐? 하지만 세상에 신께서 만드신 것 중에 쓸모없는 건 하나도 없는 거야. 쓸모없는 건 인간이 돈벌이를 위해 만든 것뿐이지. 땅과 가까운 곳에 있으면 여러 가지가 아주 잘 보인단다."
나는 정말 기분이 평온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그때 불이 나서......"라고 했을 때,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내 기억으로 기쿠 할머니가 구체적으로 화재를 언급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불이 나서 다행이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 하고 또 그렇게 단순한 일은 아니다만, 그래도 말이다, 류세이."
기쿠 할머니는 또렷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내 뺨은 그때 이미 눈물로 빛나고 있었을 터였다.
"살아 있으면 꼭 좋은 일도 있는 법이야. 신께서 그렇게 심술궂은 일은 하지 않으신단다. 선하게 살기만 하면 언젠가 자기한테 돌아오는 법이야." - page 201 ~ 202
릴리와 류세이, 여관을 운영하는 기쿠 할머니와 그 아들 스바루 아저씨, 여관에 세 든 형태로 살고 있는 류세이 가족, 아버지가 두 집 살림을 하는 릴리네 가족 등 기쿠 할머니로부터 뻗어 나온 나무는 대를 이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덤덤히 그려나간 이야기.
하지만 각각의 인물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섬세했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누구나 겪는 성장통.
마냥 아파하지 않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은 혼자선 살아갈 수 없구나. 릴리, 너랑 멀어지고 나서 그걸 잘 알았어."
나는 말했다.
"사람이 한 사람한테서 태어날 수 없는 거랑 마찬가지일지도 몰라." - page 373
지금 존재하고 있는 나는 결코 혼자 서 있는 것이 아님을 일러준 이 소설.
덕분에 주변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