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평범한 재료나 행동이 특정한 조합을 이룰 때 '딱히 쓸모는 없지만 독특한 능력', 바로 '레시피'가 생겨난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작품으로 이야기들 속에는 어딘가 모자라 보이지만 저마다의 비범함을 지닌 이들이 유머러스하게 포착되어 능청스러운 위로를 건네고 있었습니다.
읽으면서 피식 웃음이 나기 시작하더니 그 웃음은 어느새 뭉클함으로 남았었는데...
등장인물이 건넨 위로에...
묘하게 적어들었습니다.
세 편의 연작소설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등장한 건 설화 '방귀쟁이 며느리'의 후손인 여고생 '다홍'의 이야기 <방귀 전사 볼 빨간>이었습니다.
'방귀쟁이 며느리'의 후손들, 특히 여자들은 엄혹한 시기마다 자신의 방귀 능력을 몰래 사용해 가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만주의 독립군으로서 남장을 하고 최전선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6.25 전쟁 중에는 피난민들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고
민주화운동 시기에도 암암리에 활약한,
그래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이들을 '방귀 전사'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방귀 능력이라서
하필이면 여자라서
아니, 여자가 방귀를 뀌어서
이들의 활약은 인정받지 못했고 그 결과 자신의 방귀 능력을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가문의 규율이 만들어졌습니다.
"제 아무리 강력한 방귀라도 해도, 방귀는 방귀였으니까."
내가 물었다.
"그럼, 엄마도...?"
옥미 이모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지막 방귀 전사. 그게 언니였어." - page 100
그렇게 여고생 홍도 방귀 능력자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고 평범한 여고생처럼 보이고 싶었지만, 위험에 처한 이들을 보면 몸이 먼저 나서게 되는...!
그러다 친구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그동안 수련했던 '방아일체'의 경지를 보이는데...
새로운 방귀 전사가 탄생하면서, 전대 방귀 전사였던 엄마는 자연스럽게 은퇴 처리되었다.
어느 날 밤 꿈에 엄마가 나왔다.
여전히 멋진 선글라스를 쓴 엄마가 내게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 page 158
역시나 '방귀' 소재는 웃음 버튼이 될 수밖에 없었고
상황은 억측스럽지 않은,
읽고 나서는 입가에 짙은 미소가 남았던...
한 소녀의 성장기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 <깜박이는 쌍둥이 엄마>는 고장 난 형광등처럼 깜박거리다 갑자기 남편을 사라지게 만든 쌍둥이 엄마 '슬기'의 남편을 데려오기 위한 '가내모험극'이 그려졌습니다.
아무래도 개인적으로는 이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슬기의 어릴 적 꿈은 세계 정복이었다. 하지만 자라면서 생각해 보니 나중에는 어차피 엄마가 될 텐데, 세계를 정복해 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 page 169
첫 문장을 읽자마자 울컥!
아이와 보내는 모든 순간이 소중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가 아닐까...
아무튼 쌍둥이 육아하는 슬기는 어느 날부터
깜빡깜빡
"출산 후에 뭔가를 깜빡하는 증상은 비교적 흔해요. 기억력은 호르몬 변화나 수면 부족에 영향을..."
"아니요. 그런 깜빡이 아니라요. 제가, 제 몸이 깜빡거리는 거 같아요. 그 있죠 왜, 망가진 형광등처럼요." - page 173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긴 원장.
그래서 별다른 차도가 없었는데...
슬기의 하소연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남편에게 '깜빡이는' 자신을 보여주려다 오히려 남편을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당황한 슬기에게 찾아온 의문의 두 사람.
[대한민국 레시피 조사국]
조사원 김선생
이 이상한 사람들...
"자, 잘 들으세요. 레시피라는 건 말이에요. 그러니까 평범해 보이는 물건이나 행동, 상황, 감정, 경험 같은 것들이 어떤 조건에 놓이거나, 혹은 우연히 조합될 때 발생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다들 잘 모르셔서 그렇지, 이런 현상들이 주변에서 꽤 많이 일어나거든요. 예를 들어볼까요?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요. 1991년도에 만들어진 500원짜리 동전을 주머니에 넣고, 흰색 선만 밟으면서, '동 동 동대문을 열어라' 아시죠? 그 동요를 부르게 되면 초록불 길이가 3초 정도 짧아지거든요. 자, 이 모든 상황이 우연히 조합될 확률은 낮습니다만, 낮긴 해도 제로는 아니고 가끔 문제적인 레시피가 발생하기도 해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될까요? 아까 제 신분증 보여드렸죠? 레시피 조사국 조사원인 저희가 이렇게 현장에 찾아와서 해결을......" - page 204 ~ 205
과연 사라진 남편을 데려오기 위한 레시피는 있는 것일까...?!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카페에 가서 바닐라라테를 마셔. 아이스로"
...
"테이크아웃은 안 돼. 혼자, 카페에서 최소 두 시간 이상을 보낼 것! 찬밥에 김 대충 싸서 먹지 말고, 제대로 된 밥을 차려서 먹어. 주말엔 무조건 최소 일곱 시간을 통으로 자도록 해. 그럴 수 있으려면..." - page 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