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류행 - 건축과 풍경의 내밀한 대화
백진 지음 / 효형출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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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건축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면 처마의 곡선, 살짝 추켜 세운 추녀를 꼽는다. 하지만 처마 밑에 보이는 공포에 대해서는 그리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다. 사실 관심을 가지려고 해도 너무 복잡해서 이내 포기기 십상이다. 게다가 단청마저 칠해져 있다면 거의 매직아이 수준이어서 뚫어지게 바라보기 조차 힘들다. 기둥 위에 올라 앉아 지붕을 비롯 상부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공포는 조형적 아름다움을 위해 그토록 복잡하게 만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최소의 부재로 최적의 형태를 추구한 것이며 나뭇가지가 태양을 향해 뻗듯 하중에 의해 자연스레 자란 것이다. 건축가 서현의 <배흘림기둥의 고백>을 읽어보면 공포의 탄생 과정을 매우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생명체가 주어진 환경에 맞춰 진화하며 그것에 적응해 발달해 나가는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건축도 마찬가지이다. 공포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으로 자라듯 건축물도 자신이 놓인 환경에서 가장 잘 살아갈 수 있는 방식으로 설계되고 지어진다. 쉬운 예로 우리나라에서는 구들이, 일본에서는 다다미가 발달하는 것이다. 건축이 제아무리 용을 쓴다고 해도 지진이 많은 나라에서는 높아질 수 없고, 북극과 같은 곳에서는 나무로 지어질 수 없다. 그것은 자연스런 방식, 최적의 방식이 아니기에 불굴의 건축적 기적을 이루려는 특별한 의도가 아닌 이상 기를 쓰고 구현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건축의 발생에 운명적인 밑그림을 제시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건축 사조나 건축 기술의 위에 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기후이다.

 

저자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이 관계를 '풍경'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접한 일본의 환경철학자 와쓰지 데쓰로의 저서에서 매우 적합하고도 유사한 단어를 찾아낸다. 그것은 이 저서의 제목이기도 한 단어로, 기본적으로는 '기후'에서 출발했으나 이것이 자연과 인간과의 내밀한 관계를 나타내는데 미흡하다고 생각하여 '풍토'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고 한다. <풍경류행>의 '풍경'도 많은 의미에서 '풍토'와 같다. 그리고 이 책은 단순한 건축 순례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관계해 나가는 풍토 속에서의 건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4가지의 풍경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우리가 얼마나 자연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풍경과 삶), 세계관을 형성하고(풍경과 마음), 삶의 터전을 만들어가는지(풍경과 공동체)에 대해 새삼 깨닫게 한다. 시야를 넓혀 더 큰 그림을 바라보게 만드는 에세이들은 건축이란 인간의 손길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기 쉬운 우리의 속단에 허를 찌르듯 무향, 무미, 무취로 우리 곁에 늘 존재하는 자연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그리고 일반적인 건축서에서 말하듯 자연과 건축을 최단거리 직선으로 연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에둘러 길고 굽은 자연스런 선분을 그려나가고 있다.

 

이어령 선생이 적었듯 모든 것을 축소하여 소유하기를 원하는 일본인의 마음이 정원에도 반영되어 있다면,(중략) 자연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고 심지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뛸 때도 있으니, 내 말을 잘 따라주는 유순한 자연을 각고 싶었을 것이다.(중략) 정원 속의 자연이 고요하고, 맑고, 정돈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바깥 자연이 정글처럼 얽혀 있고, 지진처럼 난폭하다는 반증일 것이다.(p.22-24)

 

몬순지대 사람들은 체념적이고 순종적으로 만드는 데는 또 다른 풍토적 원인이 있다. 몬순지대의 자연은 습기가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주기적으로 난폭해진다.(중략) 이렇게 해서 몸에 밴 체념과 순종이 낳은 세계관은 무엇일까? 와쓰지에 의하면 체념과 순종은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어떤 형태의 자연물이든 힘을 지니고 있거나 특색이 있으면 다 신격화되었다. 특히 인도가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p.72)

 

좋은 광장은 한 천재에 의해 완성된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을 담아내고, 필요하면 변형할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러한 광장이야 말로 나의 것이 되고 너의 것이 되며 더 나아가 우리의 것이 된다.(중략) 이름없는 이들이 이름없는 건물을 하나씩 더해가는 무명의 광장이 필요하다.(p.137)

 

저자가 풍토를 강조하는 까닭은 지속적인 풍경, 그리고 그 안의 지속적인 건축을 위해서이다. 그가 생각하는 지속적인 건축이란 세계 각국의 권위자들이 모여 친환경적 기술을 개발하고 에너지 문제를 논의해서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다. 자연보다는 풍경을 바라보고 재발견하며, 자연과 더불어 공동체성이 살아있는 풍경이 친환경적이요, 지속적이라 믿는 것이다. 요즘처럼 도시 안에 건축물의 개별성과 차별성이 넘쳐나고, 어느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기 위한 아우성이 거세지는 시기에 주어진 환경 속에서 인간과 어우러지며 자연히 그러하게 자라나는 그럴 연(然)의 건축은 커다란 미덕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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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브렌델 피아노를 듣는 시간
알프레트 브렌델 지음, 홍은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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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는 음악의 기본입니다.

우리는 음악의 앞, 뒤, 안, 아래, 뒤에서 고요를 발견합니다.

많은 작품들은 고요로부터 음악적 형상을 빚어내고 고요 속으로 회귀하지요.

 

고요는 모든 음악회의 근간을 이루기도 합니다. 아니, 그래야만 하지요.

영어에는 listen=silent라는 흥미로운 글자놀이가 있습니다.

청취와 고요는 동일하다는 의미지요.(p.162)

 

 

고요가 S자로 시작되지 않았더라면 이 아름다운 구절은 책의 맨 첫 머리에 쓰여졌을 것이다. 피아노의 거장 알프레트 브렌델이 말하길, 고요는 음악의 기본이라 하지 않은가! 모든 것이 기본으로부터 시작되고 기본으로부터 성장하니 악상기호도, 리듬도, 천재적인 작곡가의 이름들도 모두 고요를 앞세우고 뒤로 물러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태초의 기본이 어둠이었던 것을 상기해 보며 조금은 차분한 마음으로 고요하게 이 책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알프레트 브렌델의 <피아노를 듣는 시간>은 피아노에 관련된 그의 단상들을 알파벳 순으로 기록한 교본이요, 명상록이요, 잠언집이다. 단상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매우 전문적인 부분도 있고 철학적인 부분도 눈에 뜨인다. 그러나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음악 전문가를 위한 심오한 책도, 클래식 입문자를 위한 길라잡이 책도 아닌 순수하게 피아노와 음악에 대해 고백하는 따스한 모노로그 이니까. 그 안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얻든, 피아노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든, 그것도 아니면 한 사람의 외길 인생에 매료되든, 모든 것은 당신의 몫이다.

 

모든 피아니스트가 다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렌델은 유독 섬세하고 다정하며 유머가 넘친다. 그리고 몇몇 일화를 통해서는 상당히 엉뚱하고 대담한 면모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연주에 대한 신념에서도 잘 나타나며 당연히 글 솜씨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잘 알지 못하는 피아노의 세계라도 깊게 빨려 들어가고 청량한 감동에서 오는 미소와 신선한 충격에서 오는 폭소를 반복하게 된다.

 

나는 작은 음들이 등장하는 부분이 특성상 가벼운 리듬의 연주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 한 전자의 편에 서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자그마한 물방울 같은 짧은 음들을 한데 뒤엉키게 만들어 버리는지 정말 이해하기 힘드네요.(p.98 '작은 음'에서)

* 여기서 전자는 짧은 음들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연주자, 후자는 주요음을 더 중요시하는 연주자를 의미한다.

 

음향으로 변해야 비로소 음악이 숨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연주자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음악은 이미 기록되는 순간부터 살아있습니다. 다만 잠자고 있을 뿐이죠. 해석자는 잠자고 있는 음악을 깨워야 합니다. 좀 더 달콤하게 말하자면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키스를 선사해야 합니다. (p.84 '해석1'에서)

 

한 번은 시카고에서 연주회를 할 때 이런 일이 있었지요. 내가 아주 작게 연주해야 하는 곡을 치다가 중간에 멈추고 청중들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했답니다. "나는 여러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여러분은 내 연주를 들을 수가 없겠군요." 그 말을 내뱉은 뒤로는 정말 아무도 기침을 하지 않았지요.(중략) P.S 유머러스한 곡에서는 웃어도 됩니다.(p.77-78 '기침'에서)

 

'기침'에 관한 글을 읽으며 깔깔 웃다가 문득 연주자의 입장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대부분 음악에 대해 쓴 책들은 '청중으로서' 어떻게 음악을 감상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기에 우리는 늘 듣는 사람으로 나의 입장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브렌델은 연주자의 입장, 연주자의 다양한 견해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작곡가들의 생각까지 내보여 주기에 우리는 음악을 바라보는 시각을 더 넓히게 된다. 영화로 말하자면, 그냥 영화의 내용을 보는 평범한 관객으로 감상할 때 느끼는 생각의 폭과 영화와 관련된 카메라 촬영 기법, 특수효과, 감독의 상황과 입장 등을 알고 볼 때의 생각의 폭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기침'에서는 단순히 연주회에 대한 청중의 예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연주장의 음향상태는 연주자의 음악과 청중으로부터의 소리가 상호적으로 작용하며 그런 음향상태에서 최적의 소리를 내기 위해 연주자가 얼마나 큰 긴장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여실히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브렌델은 최고의 피아니스트답게 악상기호나 운지법을 비롯 피아노의 모든 것을 세밀히 감지한다. 스타카토, 크레센도, 디미누엔도 등 우리가 흔히 아는 악상 기호에서도 남다른 느낌과 노하우를 말하고 피아노 건반에 관해서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의아할 만큼 다채로운 터치를 꿰뚫고 있다.

 

우리는 피아노를 다양한 방식으로 - 건반으로부터 떨어지면서, 건반을 밀어 넣으며, 건반 안에서 밖으로 향하면서, 건반을 관통하며 - 연주할 수 있습니다. (p.89)

 

바로 이런 부분들이 피아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들이다. 건반을 연주하는 다양한 방식(떨어지면서, 밀어 넣으며 등등)에 대해 아무리 브렌델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해도 도대체 이 다양한 연주 방식이 어떤 다른 소리를 내는지 이해할 길이 없다. 같은 '도'음을 건반으로부터 떨어져 치건, 건반을 밀어 넣으며 치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악상 기호나 주법, 운지법, 혹은 악보나 악곡에 대한 전문적인 조언들에도 반드시 새겨듣고 생각할 것들이 있다. 소리를 내는 방식의 다채로움, 악상기호의 미묘한 강도와 시차, 그밖에 피아노곡들이 가지는 독자적인 개성과 디테일한 표현의 차이 등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피아노에 대해 '감상'이라는 영역을 너머 피아노를 구성하는 다양한 영역으로 시야를 확장시킬 수 있다.

 

<피아노를 듣는 시간>은 피아노곡에 대한 이야기와 해석을 들려주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피아노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전문적인 조언을, 피아노에 관심이 있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피아노의 세계에 대한 다양한 사색과 경이로움을 전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피아노를 듣는 시간'의 의미는 피아노 그 자체와 그것을 둘러싼 모든 것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한평생을 피아노 앞에서 살아온 한 사람이 쏟아내는 피아노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그토록 하나의 악기에 대해 섬세하고 다양한 생각들을 펼친다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피아노를 친구로 삼았고, 도전의 대상으로도 삼았으며, 피아노에서 배우고, 피아노와 교감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브렌델이라면 난 그저 피아노를 즐겼을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피아노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동시에 그로 인해 고군분투했음이 틀림 없다. 그래서 브렌델의 이야기에는 피아노에 대한 겸손과 경건함이 묻어난다.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에 대한 예우처럼, 끝없는 예술적 경지에 대한 찬미처럼. 지금까지 수많은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어봤지만 브렌델처럼 음악과 같은 글로 피아노 앞에서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한 이는 없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이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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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러스트 1 오늘의 일러스트 1
김윤경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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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몇 개를 사오면서 버스에 앉아 빵봉투의 토끼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밝은 다홍색의 옷에 얌전하고 귀여운 토끼는 보면 볼수록 눈에 익은 모습이다. 이 토끼를 어디서 봤지? 토끼는 시간에 쫓기는 흰토끼도 아니고, 나 역시 앨리스가 아니다. 어디서 본 듯한 토끼의 출처를 굳이 집요하게 따라갈 필요는 없는데 애써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다가 생각났다. 바로 <오늘의 일러스트>에 실렸던 일러스트레이터 경연미의 토끼다(빙고!).

 

미술학도들이 배우는 교재에는 일러스트레이션(이하 일러스트)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일러스트는 생활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종의 시각예술이다. 일러스트 작품들은 전시회를 통해 접할수도 있고 때론 화집으로 묶여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상업적 디자인과 결합되어 생활 곳곳에 스미게 된다. 어떤 면에서 일러스트는 순수예술을 표방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철저히 상업적이 될 수있다. 춤으로 치면 재즈댄스와 같다고 해야할까? 발레나 현대무용같은 순수예술의 면모를 지니면서도 주로 뮤지컬이나 방송댄스의 일부로 접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정의나 분류가 어떻든 간에 일러스트는 늘 우리 곁에서 사소한 기쁨과 미적 쾌감을 선사하는 생활의 윤활유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니 일상 중에 눈에 익은 일러스트를 만나면 친구처럼 반가움이 느껴지는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늘의 일러스트>에 실린 작품들을 보면 눈에 익은 그림들이 제법 있다. 대부분 상업적인 일러스트로 잡지광고, 문구류, 패션, 포스터, 책표지 등에서 볼 수 있었던 그림들이다. 이렇게 눈에 익은 작품들이 많다는 것은 일러스트 작가들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만큼 일러스트의 수요가 많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일러스트를 공부하면 화가와 마찬가지로 막연한 아티스트의 외길을 걸어야 했는데 이제는 어느덧 대중들에게도 주목받고 급격히 활성화되는 분야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러스트 작가는 명품 패션브랜드나 심지어 고급 자동차에까지 자신의 작품을 반영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얻기도 한다. 일러스트가 대중의 예술에서 명품의 예술 영역으로 진입한 것에 대해 분분한 의견이 있겠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많은 그만큼 일러스트의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상업적으로 주가를 올리는 일러스트들도 있는 반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위주로 작업하는 작가들도 많다. 이들은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 사회적 이슈에 대한 비판, 환경 보호, 현대인의 자화상에 대한 고발 등 다양한 주제를 우리들에게 소구하고 있는데, 일러스트가 이해하기 쉽고 친근한 그림이라는 점을 잘 활용해 그 가치를 십분 발휘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런 메시지 위주의 작품들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이며 상업적 일러스트 못지않게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아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일깨운다.

 

 

 

한편 전형적인 일러스트라고 할 수 있는 화풍을 꾸준히 유지하며 아름답고 몽환적이고 동화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품들도 더욱 정교하고 세련되어졌다. 이런 류의 작품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사랑받는 것 같다.

 

 

 

오늘날의 일러스트가 가진 동향 중에서 많이 두드러지는 것은 어린이의 그림과 같은 순진하고 단순한 그림체이다. 이런 그림체는 기성 작가든 대학생이든 너무 많이 활용해서 한편으론 식상하기도 하지만 유독 노석미의 작품은 개성이 뚜렷한 가운데 다른 일러스트와 차별된다. 화가 김점선처럼 담대한 선 놀림과 명랑한 기운이 바로 이 작가의 작품에 눈길이 가는 이유인 것 같다. 다른 동향으로는 망원경으로 바라본 듯 커다란 스케일의 그림을 세밀하고 왁자지껄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인터넷이 발달하고 세계라는 광대한 공간이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이 이런 전지적 관점을 주목하게 한 것 같다(개인적 생각이지만). 그리고 섬세한 그로테스크도 돋보인다. 마치 이곤 쉴레의 그림처럼 신경질적으로 일그러진 얼굴들, 반항기 가득한 표정, 은밀히 배어있는 악마적인 느낌들은 젊은 층, 특히 20대를 타겟으로 한 상업적 일러스트에서 많이 등장한다.

 

 

 

세상은 넓고 일러스트의 작품은 많지만 그럼에도 콕 찝어 눈에 들어오는 작가가 있다. 모두 개성충만하고 상상력이 난무해서 어지러울지경인 가운데 갑자기 중심을 똑바로 세우고 정신차리게 하는 작품. 바로 일러스트레이터 노준구의 작품들이다. 건축 도면기법 중 하나인 엑소노메트릭과 유사한 방식으로 공간을 표현하는 것도 특이하지만 색감도 상당히 이국적이면서 개성적이고 어느 부류의 화풍에도 분류해 넣기 힘든 독창성이 돋보인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일러스트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 그 느낌이 참 좋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일러스트의 환경 디자인적 활용이다. 특히 명랑하고 친숙한 만화같은 이미지라면 거리의 풍경에 활기를 더하는데 무척 유용할 것 같다. 앞으로 우리 일러스트의 방향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노준구 작가와 같은 개성있는 작가, 그리고 사회와 환경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작품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오늘의 일러스트>는 활발하게 활동중인 일러스트 작가들의 작품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점도 좋았지만 그들이 가진 생각을 꽤 섬세하게 담았다는 점에서도 칭찬할만 하다. 대부분 여러 아티스트들을 모아 작품집을 구성하면 그들이의 약력이 소개되고 의례적으로 인터뷰 내용이나 아티스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글, 혹은 작품에 대한 내용들이 실리곤 하는데 그림에 비해 훨씬 적은 지면을 할애하는 탓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내용은 그들의 세계를 한껏 보여줄 만큼 충분치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오늘의 일러스트>는 얼마 안되는 지면에서도 그들이 가진 예술적 신념, 작업에 대한 열정, 작품에 관한 생각들의 요점을 매우 명확하게 잘 짚어내고 있어 더 흡족스럽다. 그리고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 책을 많은 젊은이들이 읽었으면 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무언가를 고민하는 모습과 자신의 일에 대해 열정과 사랑을 다하는 모습 속에서 각자의 길을 걸어나갈 힘을 얻게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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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디자인 Design Culture Book 1
유인경.박선주 지음 / 지콜론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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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디자인이 좋다'고 말할 때면 그것은 어떤 물건이 아름답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다른 생각 없이 찬성하거나 혹은 '내 취향은 아니야'라며 반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디자인이 좋다는 건 말이지...'하면서 딴지를 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다음과 같다. '디자인이 좋다', 혹은 '좋은 디자인이다'라는 뜻은 기능성에 위배되지 않아야 하고, 제작에도 용이해야 하며, 가장 최소한의 재료로 최적의 결과물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리고 덧붙이길, 본래 디자인이라는 것은 계획하다, 고안하다 라는 뜻으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우선으로 하려는 의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그렇다. 좋은 디자인은 딴지를 건 사람의 말한 것을 모두 갖추었을 때 성립되며 희한하게도 그럴 때에 아름다움이 자연적으로 따라온다.

 

이제 세상은 좋은 디자인의 시대를 너머 예술 같은 디자인의 시대로 폭주하는 것 같다. 유명 디자이너들의 제품은 질겁할 만큼 비싼 가격에 붙여지고, 오래 전 수공예작품들이 가졌을 법한 희소성을 '한정판'이라는 이름으로 복귀시킨다. 필요한 상품에 못지 않게 유희적이고 잉여적인 상품들이 탄생하고(예를 들면 극장에서 자리를 맡아놓는데 쓴다는 쏟아진 커피+커피잔 모형),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는 탓에 네모난 기계 하나가 작아졌다 커졌다 넓적해졌다 길어졌다 바람 잘 날이 없다. 솔직히 말해 눈에 띄어야 버텨나가는 기업들의 경쟁 속에서 충견 노릇을 톡톡히 하는 디자인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기능성에 충실한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이 그리워지는 것도 아니다. 이쯤에서 어디로든 디자인을 위한 탈출구가 마련되어야 할 것 같다.

 

<위로의 디자인>은 디자인을 통해 오랜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기능성과 예술성과 의미가 모두 충족되는 수작들을 접할 수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의 의도는 사용자와 소통이 가능하고 일상에 온기를 제공하는 디자인들을 소개하려는 것인데 한편으론 이것이 바로 디자인을 위한 탈출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책 속에 소개된 모든 제품들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려는 의도가 때론 황홀하게, 때론 위트 있게, 때론 가슴 뭉클하게 배어있다. 뿐만 아니라 의도적인 아름다움의 추구가 아니라 진심에 의해 자동적으로 발산되는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황량한 곳에는 인간적인 터치를, 자연 앞에서는 겸손함을 발휘할 줄 아는 아름다움이며, 고독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감싸는 살가운 마음씨와 할 말은 다 하는 당당함, 그리고 생과 사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하는 사려 깊음, 언제나 마주해도 질리지 않는 위트를 하나씩은 장점으로 가진 아름다움이다.

 

이 책에서는 생활 곳곳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사물들이 주는 긍정적 에너지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책에 등장하는 사물들을 '디자인'이라 지칭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자연과 같이 그 자체로 완벽한 '디자인'을 포함해) 그것들은 그저 운 좋게 그렇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작자들이, 사용자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시킬 뿐 아니라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철저한 사고와 노력 끝에 세상에 내 놓은 '계획된 창조물들'이기 때문입니다. (p.7)


다양한 디자인 작품들을 형식상으로 크게 나눈다면 설치/환경 디자인과 제품 디자인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의미상으로 나눈다면 온기를 부여하는 디자인과 유머와 위트가 돋보이는 디자인, 그리고 삶을 성찰하는 디자인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설치/환경 디자인에 어떤 작품들이 있나 살펴보면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이 맨 첫머리에 실린 '나부끼는 빛'이다. 이것은 거리의 조명으로서 기능을 다하고 동시에 설치예술로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환호를 자아낸다. 같은 설치 작품이지만 반대로 그늘을 제공하는 바람개비 지붕(?)도 눈여겨볼만하다. 이것의 기특한 점은 바로 폐지가 된 신문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형상을 한 송전탑은 진정 디자인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하고 자연과 문명, 그리고 인간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도 엿볼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에서 유독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생과 사에 대한 생각을 디자인에 반영한 작품들이다. 모름지기 즐거움을 위해 택하는 것이 디자인이지만 생각하게 만드는 디자인도 우리에게 훌륭한 자극제가 된다. 담벼락에 낙서하던 추억을 상기시키는 커다란 블랙보드는 사소한 낙서 대신 '내가 죽기 전에'라는 문장을 완성하도록 유도하면서 삶의 의미를 돌이켜보게 한다. 단순히 담벼락에 설치한 간단한 장치인데도 우리가 평소에 생각지 않았던 질문에 정면으로 맞서게 함으로써 블랙보드 이상의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옆에 있는 작은 화분은 묘지가 될 곳에 심는 나무이다(수목장과 같은). 나무가 자라면 하얀 링이 깨지면서 땅속으로 분해되어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자연의 일부로 대단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소리 없이 묵묵히 사라지는 것이다.

 

 

 

위트와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그 안에 반영된 의도의 기발함에서 발현되는 멋진 위트와 유머이다. 'Dr. Hard drive Bag'이라는 이름을 가진 제품은 안티바이러스 기능을 가진 하드드라이브이다. 형태와 거치대를 마치 수혈대처럼 만들어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신선한 피(데이터)를 공급한다는 의미를 재미있게 표현했다. 양처럼 깜찍한 의자도 relation'sheep'이라는 비상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를 형성하는데 여러가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이 의자는 양털 같은 포근함을 더하며 (relation)ship에서 sheep이라는 단어교체로 위트도 더한다. 마지막으로 한 여자가 펼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이불이다. 잠 못 이루는 사람들에게 외롭고 심심하지 말라고 이불 위에 읽을 거리를 적어놓은 것이다. 글자도 큼직하고 페이지도 널찍한데다 겹겹으로 된 이불이니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눈독을 들일 법도 하다.

 

 

 

책 속의 작품들을 몇 가지 소개해 보았지만 나머지 작품들도 못지않게 훌륭하다. 아니, 더 훌륭하지만 미래의 독자를 위해 비밀로 남기고 싶은 작품들, 혹은 한 컷으로 소개하기 어려운 작품들도 상당히 있다. 유명 디자이너들의 수작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기발한 작품 몇 점을 좀 더 구경한다고 무슨 위로가 되며 뭐가 달라질까 생각하는 생각도 들겠지만 글솜씨 좋은 저자의 설명을 곁들여 천천히 작품을 감상한다면 특별한 감동을 얻을 수 있고, 디자인이 가진 외형이 아니라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진솔한 목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게 된다.

 

 

끝으로 저자가 쓴 한 구절의 문장에서 디자인의 탈출구를 발견할 수 있었기에 그대로 적어본다.

 

그림책 작가 고미 타로(Gomi Taro)의 <똑똑하게 사는 법>(한림출판사,2009)이라는 책이 있다. 제대로 세상을 사는 방법들이 실려있는데, 개중에는 '연을 제대로 날리는 법'도 있다. 거기에 "물론 스스로 날 수 있는 사람은 연을 날릴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문장이 있다. 연은 날고 싶은 인간의 염원을 대신 이루어 준다. 그런 의미에서 연은 날 수 없는,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인간의 자기 인식 그 자체가 아닐지.
예술의 역할도 어쩌면 연 같은 것일지 모른다. 은유적 의미에서 인간을 날게 해주는 것.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하며 정신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 예술과 디자인의 탁월한 작품들은 우리를 무지와 아집, 교만으로부터 해방시킨다.(P.16-17)

 

이제 디자인은 기능에 충실한 최적의 제품을 너머, 외형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제품을 너머, 우리들의 마음에 날개를 달아주는 정신적인 사물로 재탄생해야 할 것 같다. 디자인이 사람들의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와 닿는다면 우리들을 무지와 아집, 교만 뿐만 아니라 탐욕에서도 해방시킬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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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4-01-03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히~ 나도 이거 있지롱~
새해 인사 들어왔다가 분홍신 님과 찌찌뽕 하네요. ^^
지인의 강력한 추천으로 이제 읽기 시작하는데요. 제목부터 인간미가 넘쳐서 좋았어요.
아..
진격의 거인 같은 저 송전탑은..가슴이 찌르르한 것이..왠지 슬퍼지는데요.ㅠ.ㅠ

탄하 2014-01-04 16:17   좋아요 0 | URL
네, 저라도 이거 강추했을 거예요.
사실 '디자인'에 관한 책들에는 크게 감탄하지 않는 편이고, 그래서 잘 사지도 않는데 이 책은 많이 다르네요.
맞아요, 저 송전탑. 가슴이 찌릿한게 왠지 슬픈 느낌. 딱 그거예요. 진짜 찌찌뽕.^^
 
붉은 소파 - 세상에 말을 건네다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지음, 민병일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조금은 떠들썩했던 분위기의 사진수업시간. 갑자기 선생님께서 화통하게 웃으셨다. 아이들은 일제히 선생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선생님은 들고 있던 사진 한 장을 우리들을 향해 내보여 주셨다. 그건 그 선생님 앞에 앉아 있던 학생의 작품이었는데, 우리들은 그 작품을 보자마자 박장대소하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 사진에는 엄청난 용기와 불굴의 의지와, 그리고 성인이 된 청춘이라면 환호할만한 '섹시(sexy)'가 한 자리에 있었으므로.

 

설명을 더 해보자면 이렇다. 사진은 시청 앞 잔디밭에 덩치 커다란 3인용 소파를 옮겨다 놓고, 섹시하게 차린 요염한 자세의 여인을 찍은 것이었다. 감히 시청이라는 정부기관 앞뜰에 소파를 가져다 놓은 용기도 용기지만, 그것을 그곳까지 실어 나른 불굴의 의지, 그리고 정치인에게 X먹으라는 의도로 비춰질 수 있는 과감한 이미지가 모두의 쾌재를 불러낸 것이었다. 그 사진을 찍은 학생은 소파를 옮겨가며 세상의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은 어떤 사진작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은 비록 소파를 들고 여러 곳을 다니지는 못하지만 정부를 향해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과 그 사람들의 다양성을 담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때 그 학생이 언급한 사진작가가 바로 호르스트 바커바르트이다. 물론 9자나 되는 긴 이름을 내가 기억할 리 없지만 <붉은 소파>라는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땐 매우 뚜렷하게, 그 때 그 학생이 말했던 작가임을 알 수 있었다.

 

추억 반, 호기심 반으로 펼쳐 본 이 책은 정말 독특했다. 그동안 봐왔던 인물사진('초상'이라 불리는)은 크게 두 부류였는데, 하나는 인물의 얼굴을 위주로 그 사람의 내면세계와 숨겨진 모습, 혹은 그 인물이 가진 고유성을 잘 포착해 찍은 사진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한 사람을 말해줄 수 있는 다른 것들을 곁들여 그 사람이 살아온 삶과 관심사, 업적 등에 대해 묘사하는 사진들이다. 대체적으로 이런 사진들은 그 사람이 주로 거하는 장소를 택하기 마련이고(장소마저 그 사람을 설명해 주므로) 야외풍경이 될 경우 십중팔구 그저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또한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인물사진의 경우에서도 아방가르드나 개념예술 등을 표방하면서 그로테스크하거나 암울하거나 난해한 것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붉은 소파>의 인물사진들은 확연히 달랐다. 한 사람의 특성과 삶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사적인 장소가 아닌 공적 장소로 나선 것이 대부분이고, 때로는 대자연이 그 사람을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더불어 파격적이고 실험적이긴 하지만 어둡고 난해한 느낌은 없고 따스하고 정겨우며 보는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한다. 책 설명에 따르면 호르스트 바커바르트는 인물 사진에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작가라는데, 가히 그 명칭에 동의할만하다.

 

그런데 왜 하필 붉은 소파일까? 사진마다 늘 등장하는 소파에 대해 한번쯤은 답을 내려고 애써보지 않을 수 없다. 언뜻 떠오르는 것은 귀한 손님에 대한 예우이다. 누굴 만나든 붉은 소파로 초대되는 순간 아주 특별하고 귀한 사람으로 대우받는 것이다. 그리고 붉은 색은 다양하고 난잡한 색깔들 틈에서도 눈에 잘 띄며 특히 자연의 푸른빛과도 매우 잘 어울린다. 어쩌면 인터뷰의 대상이 모두 서구인이라 그들의 피부색깔에도 잘 어울릴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붉은 색에는 뜨거운 피나 태양과 같은 생명력이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는 자리라면 이 색깔이 가장 적합한 것이 아닐까?

 

사진 속에서 인터뷰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정말 다양하다. 제인 구달, 고르바쵸프 같은 유명인도 있는가 하면 예술인, 기자, 과학자, 군인도 있고, 서점 주인이나 항구 노동자, 농부, 미용사, 심지어는 연금생활자와 죽은 자(누군가의 묘지), 그리고 그저 쌍둥이 자매, 대학생, 초등학생도 있다. 이런 구성을 보면 사진 인터뷰를 통해 유명한 사람들의 명언과 같은 답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답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소박한 바램 내지는 항변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터뷰의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지며 예술가나 철학자나 과학자나 그리고 노동자나 농부나 아이들이나 답변들은 하나같이 사려 깊고 순수하며 삶에 대한 성찰과 애정을 담고 있다.

 

<붉은 소파>는 사적인 공간에 있어야 할 물건을 외부로 내놓음으로써 세상을 더욱 아늑한 어떤 곳으로 변모시킨다. 우연히 마주친 사람과 친구처럼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 이 소파로 인해 생성되는 것이다. 또한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붉은 소파 하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친절한 평등의 마음씨 같다. 아무런 조건도 내세우지 않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같은 자리에 초대해 똑같은 발언권을 주었으니 모두 다 소중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펼칠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양한 사람들의 개성을 살리는데 있어서 만큼은 소파 역시 무궁무진하게 변모한다. 기본적으로 놓여지는 각도가 변화하는 것도 그렇고, 때론 소파의 붉은 천만 사용하기도 하고, 때론 소파의 방석부분만 사용되거나 멀찌감치 밀어놓기도 한다. 그러므로 같은 소파가 다른 사람을 만남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세상에 말을 건네는 이 소파는 여기에 누구라도 앉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기 위해 사진가가 건네 올 질문들에 답변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게도 한다. 만일 호르스트 바커바르트가 "여기 앉으실래요?"라고 물어올 때 흔쾌히 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삶을 잘 알고 나의 얘기를 세상에 들려줄 만큼 단단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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