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 제3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함윤이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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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예감이 있다. 어쩐지 세상은 나에게만 가혹하게 대할 거라는. 그런 예감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이상하게도 꽤 괜찮은 날이 이어진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마주한다. 거대한 불행의 얼굴을 한 세상의 정면을. 그래 그러면 그렇지. 세상이 나에게 호락호락 할리 없지. 이게 맞지 하면서 불행의 얼굴을 뜯어본다. 


곧 울 것 같으면서도 입술을 깨문 얼굴을. 함윤이의 장편 소설 『정전』의 주인공 막의 처지가 그렇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면서 막은 세상의 다정한 얼굴과 마주한다. 왜 이렇지 하면서도 다정하고 친절하게 구는 시간을 즐긴다. 아버지는 믿었던 삼촌에게 배신을 당한다. 이게 맞지. 가세가 기울면서 대학을 휴학하는 일련의 서사가 내게는 어울리지. 


막은 다양한 아르바이트 중에서도 그나마 숙련도를 덜 요구하고 임금이 센 제약회사에서 일을 시작한다. 약을 선별하는 작업을 한다. 시절 인연으로 남겠지만 공장에서 만난 사람들을 막은 소중하게 여긴다. 아직 세상의 우울한 얼굴을 보지 않았기에 그럴 수 있었다. 불행하지만 너의 표정을 바꿔 주겠다의 결심이 막에게는 있다. 


그러다 변하겠지. 세상은 불행한 채로 밥을 먹고 머리를 감고 커피를 사 마시는 어두운 아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자신의 다정함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겠지. 막은 공장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때문에(덕분에) 휴학을 하고 공장으로 일을 다니게 되었지만 한 가지 좋은 순간을 맞이한다. 


스리랑카에서 취업 비자로 온 라히루. 그 애의 잘생긴 얼굴에 눈이 가고 그 애와 함께 하는 시간이 애틋하고. 세상, 너 마냥 나에게 막 대하지는 않네. 이 정도면 괜찮아. 난 견딜 수 있어의 희망 고문의 시간이 찾아온다. 등록금을 벌고 학교에 돌아가서도 그 인연은 이어질 줄 알았지만 공장에서 사고가 난다. 이럴 때 또 그 말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그렇지. 나 같은 인간한데 사랑은 무슨, 행복은 무슨. 


『정전』의 장르를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까. 공장과 노조가 나오니 노동 소설? 막이 겪어 내는 건 사랑의 고통이니까 로맨스? 스포일러가 될까 봐 이야기의 전부를 풀어내지 못했지만 후반부에 몰아치는 사건 때문에 초능력 장르 소설? 글쎄 이제 나는 하나의 현상에 정확한 정의를 내리고 분석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문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모르겠음. 모르겠음. 모르겠음. 평서문.


으로 남겨야겠다. (영화든 소설이든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세계와 빨리 만나길 바란다. 오바!)


진짜 모르겠다니까. 『정전』의 장점은 이상한데 이상한 힘으로 소설을 계속 읽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이게 가능해 하면서도 그건 모르겠고 나는 막과 그의 친구가 벌이는 해괴한 일을 따라갈래 막무가내로 돌진하게 한다. 공모전 수상작이라 소설의 뒤 편에 심사평이 실려 있다. 신형철의 말은 모르겠고 이유리의 말은 조금 알겠다. 


너를 위해 잠시 불을 끄겠다. 잠깐 세상을 암흑으로 만들어 불행한 세상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 다시 불이 켜져 내내 불행한 세상의 얼굴을 보겠지만 좀 웃어봐 어깨를 토닥여 줄래의 마음이 『정전』에 있다. 이거면 됐지. 세상과 함께 살아가는 건. 더 나은 내일과 미래는 가짜의 삶이고 오늘보다 덜 불행한 내일과 미래면 된다. 사랑은 그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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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광고 카피 도감
오하림 지음 / 서교책방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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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지만 내일도 어김없이 살아야 할 거란 걸 알고 있습니다. 오늘이 슬펐다면 내일은 조금 기뻐질 수 있도록 나만의 방법을 찾아내곤 합니다. 사고 싶은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아침에는 비우기. 아트박스나 모던 하우스에 들어가서 신상 물건 구경하기. 신간 책이 나왔다면 한 권씩 사기. 써 놓고 보니 모두 소비와 관련한 것들이네요. 


물건을 사는 즐거움 그러니까 소비로서 내일이 조금은 괜찮아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주 단순한 방법을 찾아냈지만 이는 통장 잔고 사정을 생각하면 지양해야 할 행동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문 앞에 놓여 있는 택배 상자를 보면서 잠시 마음이 환해지는 순간에 나를 세워 놓습니다. 광고라는 걸 알면서도 영상을 보며 쓰임새를 찾아내는 저녁의 나를 어쩌지 못합니다. 


오하림의 『일본 광고 카피 도감』은 물욕을 다스리지 못하는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일본 광고의 문장들을 가져와 지쳐 있는 오늘의 나를 다독입니다. 괜찮아. 여행도 휴식도 소비도 너에겐 모두 필요한 일이야 하면서요. 70개의 일본 광고 카피가 실려 있으면서 이를 해석해 주는 작가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을 받습니다. 광고의 종류도 다양해서 여러 업체에서 나를 응원해 주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배당받은 하루치의 사회인 역할극을 끝내고 돌아와 누우면. 다들 무얼 하시나요. 이미 에너지는 바닥났습니다.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갓생 영상에 자극을 받아 책상 앞에 앉으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그대로 누워 있습니다. 꼭 필요하진 않은데 사고 나면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거나 다정하게도 나만을 위해 추천해주는 알고리즘 영상을 끊임없이 위로 올립니다. 


그런 저녁에. 『일본 광고 카피 도감』에 실린 광고 카피를 하나씩 읽어갑니다. 종이 위에 많은 활자를 보기는 힘들어서 딱 이 정도 분량의 문장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면서요. 한 줄의 문장. 제품을 홍보하기 위한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문장이지만 그 안에 '사람'과 '위로'를 찾아냅니다. 그야말로 엄선한 한 줄의 문장을 지친 나에게 가져다줍니다.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될까요. 


당연하죠. 책을 읽는 우리는 이런 호사를 누리고 받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책을 읽는 저녁을 지나 어제와 같은 오늘이 찾아오죠.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달립니다. 배차 간격이 15분이라서요. 사람이 많아 늘 서서 가지만 그래도 오늘 버스 타기에 성공했네 작은 성취감이 듭니다. '마음에, 모험을' 어제 읽은 『일본 광고 카피 도감』에 실린 신초샤 여름 추천 도서 100선의 카피를 떠올립니다. 


출근길 버스 타기이지만 이런 한 줄이면 어떨까요? 


'어른은 모두, 여행의 도중'(JR 동일본·기차여행) 


버스에 실린 나의 모습 위로 말이죠. 마음에 모험을 담고 이 길은 여행의 도중이라는 생각을 하면 책가방을 앞으로 메지 않고 뒤로 맨 채로 서 있는 학생의 등도 예쁘게 봐줄 수 있는 거죠. 『일본 광고 카피 도감』을 읽으며 이런 문장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문장이 떠오르면 스쳐 가는 걸 보고만 있었는데 어쩐지 이 문장은 쓰고 싶어졌습니다. 


엄마 나는 잘 지내, 그럭저럭. 


어떤 제품의 광고 카피로 적당할까요.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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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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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취업한 곳에서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집에 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새로 시작하고 싶어. 지금까지의 일은 지우고 다시 1부터 시작하는 거야. 생각한 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았고 내가 스스로 나를 구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다시 시작하기. 리셋 버튼을 쥔 자는 나였으므로 내가 이 삶을 책임져야 했다. 자주 번번이 도망쳤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들 했지만 대체로 그전보다 나은 곳이었다. 


이런 식인 거다. 한 번은 못 견디는 곳. 다음번은 견디는 곳. 지금은 견디는 곳에 와 있고 경험상 다음번은 못 견디는 곳일 거라서 약간 우울한 상태에 있다. 그런 거다. 인생은 둘 중에 하나를 고르거나 둘 중에 한 곳에 와 있는 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는 최상의 상태라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김영하의 에세이 『단 한 번의 삶』을 읽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타 작가의 삶에서도 단 한 번의 삶은 화두로써 작용한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하고 남아 있는 자로서 느끼는 상실감에 어쩔 줄 몰라 한다. 평범한 인간이 느낄 법한 비애를 같이 경험한다. 모두 어쩔 수 없는 상태로서 지낸다. 이런 안도. 쉽게 말해 나만 힘들고 지치고 병이 날 것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확인을 책에서 받는 거다. 


나는 이제 사람이 무섭다. 이렇게 쓰니까 좋다. 사람이 무서운데 무섭다고 어디에다 말할 데가 없었는데 쓸 수 있다니. 한 번 더 적어야지. 나는 이제 사람이 무섭고 더 정확히 말하면 까다로운 사람들이 두렵다. 마침표와 띄어쓰기, 글자체에 집착하고 큰 소리로 화를 내는 사람들이. 그런 이들에게 묻고 싶다. 이 생은 단 한 번인 걸 아느냐고. 


『단 한 번의 삶』에서 김영하는 어머니의 죽음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다. 알츠하이머를 앓은 어머니는 현재부터 기억을 지워 나간다. 현재의 자신이 누군지 모른 상태로 과거에서 반짝인다. 그런 어머니의 소실을 지켜보는 작가의 시선은 애틋하다. 일회용인 삶. 한 번 쓰면 재생이 힘든 키친타월 같은 삶. 그런 삶에서 죽음은 특별한 경험이 아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는 것처럼 당연한 이야기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구는 사람들을 만나면 숨이 막히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 잘못된 과거를 지워 버릴 수는 없기에(리셋 버튼을 찾을 수는 없었다.) 현재의 시간을 수리하는 방식으로 살아갔다. 고장 난 건 과거가 아닌 현재이므로 잘못을 고친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책이 건네는 다정한 위로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를 『단 한 번의 삶』의 마지막에서 김영하는 들려준다. 퉁퉁 부은 손으로 그 문장을 필사했다. 무얼 해야 좋을지 몰라 방황하는 이 삶도 나의 삶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와 나와 달라졌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 때문이라도 내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삶을 잘 마무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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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안 써지세요? 저도요
정지음 지음 / 오리지널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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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제목 봐라. 하루치의 슬픔과 스트레스를 책 사기로 날리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을 때 정지음의 신간 『글이 안 써지세요? 저도요』를 발견했다. 제목이 제목 한 책. 제목이 저러한데 어찌 사지 않을 수 있을까. 나또책(나 또 책 산다.) 해야지. 보통 글쓰기 책이라 함은 야너두(야 너두 할 수 있다.) 같은 대책 없는 응원의 제목 혹은 비법 전수(**완성법, **필살기) 부류의 제목을 달고 있는데. 


정지음은 다르다. 먼저 묻는다. 글이 안 써지세요? 그러고 답을 듣지 않는다. 냅다 자신의 말을 한다. 저도요. 작가인 본인도 글이 안 써진다는데 분명 글쓰기 책인데 글이 안 써진다고 먼저 말해버리는 책이라니. 참 대책 없으면서도 즐겁고 재밌다. 나만 그런 게 아니란 말이지. 나만 글쓰기가 막막하고 책상 앞에만 앉으면 나를 위해 추천해 주는 쇼핑 목록을 정신없이 보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글이 안 써지세요? 저도요』를 보는 순간 책의 제목만 읽었는데도 안도감이 들었다. 


이상한 원칙주의자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책을 읽을 땐 차례대로 읽는다. 병렬 독서는 개뿔. 직렬 독서도 제대로 못 한다. 한 권을 천천히 다 읽고 다른 책을 읽는다. 순서대로. 강박적으로. 『글이 안 써지세요? 저도요』는 달랐다. 먼저 목차를 훑어보고 그중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챕터를 펼쳤다. 「첫 문장 노트 만들기」(121p)라는 소제목이 끌렸다. 


『글이 안 써지세요? 저도요』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글쓰기 비법이나 작법서를 흉내 내는 척하면서 정지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게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것이다를 자주 쓴다고 밝히고(맞아. 나도 그래. 것이다라고 끝내지 않으면 불안한 것이다.) 쿠팡 상자에 반품이라는 손 글씨만 썼다고 집 안을 온통 둘러보아도 필기감 좋은 볼펜과 쓸만한 노트가 없었다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글쓰기 책인데 글쓰기에 관한 내용이 없어서 좋았다는 것이다.) 줄줄줄 늘어놓는다. 


친구들 이야기, 반려묘 이야기, 학창 시절 이야기.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 속에서 글과 관련한 이야기가 사알짝씩 있다. 그리하여 디게디게디게 좋다. 각 잡고 문장, 조사, 문법에 대한 진지한 글쓰기 책이었으면 텅 빈 나의 뇌가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골라 첫 문장을 필사해 보라는 조언. 출퇴근 시간에 휴대전화로 단어, 문장을 써 보라는 조언. 쓰다가 막히면 가만히 있지 말고 샤워를 한다거나 다른 글쓰기를 하라는 조언. 


글이 도무지 써지지 않을 때는 글의 형식을 바꿔 보라는 것도. 다 좋다. 오랫동안 쓰지 않던(정지음 작가와 다르게 나는 필기감 좋은 볼펜과 질 좋은 종이의 공책이 다량으로 있다.) 노트를 꺼냈다, 그리하여. 나는 시작이 어려운 사람이지 막상 한다고 마음먹으면 한다. 읽으려는 책의 첫 문장을 적어 보기로 결심했다. 첫 문장을 옮기다가 필이 꽂히면 첫 문단을 첫 페이지를 옮겨 보기도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슬프거나 화나거나 두렵거나 불안한 나의 감정을 방치하지 않으려고 한다. 일단 쓴다.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소중한 첫 독자인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머릿속에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감정을 종이로 불러 모은다. 너희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봐. 글이 되게 해봐. 슬픔과 분노와 불안이는 이때다 하고 달려 나온다. 빈 화면에 커서가 반짝이는 틈을 주지 않는다. 글을 써서 내일을 살 수 있다면 계속 써야지 뭐 어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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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피플 존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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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소설집 『노 피플 존』에 실린 첫 번째 소설의 제목은 「실패담 크루」이다. 요즘 유행하는 '러닝 크루'도 아닌 '실패담 크루'라니 어떤 이야기일까 궁금했다. 호기심을 가지고 소설을 읽다가 제목을 변형해서 '거짓말 크루'라는 소설도 있었으면 했다. 실패담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 전부 거짓말을 하는 거다. 듣다 보면 거짓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한데 진실인 것 같은 이야기를 하는 모임에 대한 소설. 


「실패담 크루」의 짝퉁 냄새가 풀풀 풍기겠지만 「거짓말 크루」도 나름 진정성 있는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실패와 거짓말은 묘하게 닮아 있으니까. 실패는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게 만들기도 하니까. 실패와 비슷한 패배라는 단어를 넣어서 만들어도 괜찮겠다. 계속 만들어 보는 거다. '패배담 크루'까지. 실패와 거짓말, 패배까지. 사람 만나는 게 힘에 부치긴 하지만 이런 크루가 결성되어 있다면 한 번쯤 참여해 보는 거다. 대체 어떤 실패와 거짓말과 패배가 존재하는지. 


『노 피플 존』에는 「노 피플 존」이 없다. 소설을 읽다 보면 발견할 수 있는 단어가 소설의 제목이 되었다. 사람 없는 구역이라니. 돈을 내고서라도 입장하고 싶다. 이력서에 쓰기에도 민망하게 최단기간 일을 한 이유는 역시나 사람 때문이었다. 원래 그 사람 성향이 그래. 무시해버려. 일만 하러 왔으니까 일만 하자. 내 안의 나는 무수히 많이 바깥의 나를 설득했다. 


몸이 아파서 더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는 핑계고(몸이 아프게 될 지경이긴 했다. 긴장과 스트레스와 신경쇠약으로) 사실은 짜증과 화를 수시로 내는 그 사람 때문에 그만두었다. 그만둔 다음날부터 일을 하게 되었는데(일 복이 타고났나 봐. 이 생에서. 나는.) 그곳과 이곳은 천지차이였다. 1분마다 전화가 걸려 오는 곳에서 하루 종일 한 통 정도의 전화가 걸려 오는 곳. 아무도 화나 짜증과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곳. (아직까지는)


얼굴 피부가 좋아지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스트레스도 작용했으리라. 홍당무 얼굴로 일을 하고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가서 울었다. 『노 피플 존』에 담긴 소설을 읽어 나가면서 3개월의 시간을 다시금 돌아봤다. 소설에는 다양한 여자들이 나온다. 아홉 편의 소설 속 주인공은 여자들로 그녀들은 일을 하고 육아를 해낸다. 일만 해도 이렇게 힘에 부친데 『노 피플 존』 속 그녀들은 육아와 살림도 함께 한다.


일을 하는 어려움에도 지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꿋꿋하게 해낸다. 인수인계받으면서 만난 다른 여자들(언니들)의 모습이 『노 피플 존』의 현실 인물인 것 같은 경험도 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여기에 모여 있네. 능숙하게 자동차를 운전하고 전화 응대를 하고 틀린 숫자를 바로잡는다.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단단한 모습에 반했다. 


『노 피플 존』의 실린 소설들을 차례로 읽지 않았다. 첫 문장을 읽고 이걸 지금 내가 읽어 낼 수 있나 견적을 내보고 괜찮겠다(그만큼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는 뜻) 싶으면 읽었다. 마지막에 읽은 소설은 「언니」이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고민할 때 인회 언니는 두 가지 선택 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의 선택지만 들이미는 사람이 아니었다. 타인의 어려움을 쉽게 간파하는 인회 언니. 아직 현실에서 인회 언니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지만 한 번쯤은 만나고 싶은 사람의 이상형을 『노 피플 존』에서 찾았다. 


이 글 『노 피플 존』의 리뷰 속에 슬쩍 끼워 넣은 나의 이야기는 실패담과 거짓말, 패배담 중 어디에 속할까. 「이모에 관하여」 속 육십 세, 흑룡강성, 유치원 교사 출신 김남이 이모를 만난다면 물어봐야겠다. 나의 이야기를 실컷 하고 투박하게 들려주는 위로나 혹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겠다. 힘에 부쳐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씩씩하게 내일로 밀고 가는 여자들이 『노 피플 존』에 있다. 사람은 없지만 그녀들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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