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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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어 놓으면 꽃가루가 바람에 날려 들어온다. 바닥에 쌓여 있는 노란 먼지를 응시한다. 개나리가 피었다가 지고 목련이 그 뒤를 잇고 철쭉이다. 벌들은 바쁘고 낮에는 더웠다가 밤에는 다시 기온이 내려가는 변덕 심한 날씨는 기어이 감기를 주고 낄낄댄다. 좋은 날은 모두 집어넣고 마음껏 기뻐하라고 하는 듯한 5월에 콧구멍에 휴지를 끼어 놓고 최은미의 『어제는 봄』을 읽었다. 우연하게도 (나는 우연이라는 걸 믿는 편이다) 소설과 현실의 시간이 일치한다. 『어제는 봄』의 주인공 정수진이 지내고 있는 시간도 봄이다.

수진은 10년 전 신춘문예로 등장한 소설가다. 글을 쓰는 사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문에 보낼 사진을 찍어주던 남편도 이제는 수진이 글을 쓰는 걸 지겨워한다. 식탁 위에 앉아 모니터의 커서를 바라보고 있는 수진에게 차라리 일을 하라고 소리친다. 그럼에도 수진은 딸 소은을 학교에 보내놓고 카페에 들어가 글을 쓴다. 10년간 청탁 한 번 받지 못했다.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소설을 써 내려간다. 장편 응모에 보낼 소설을 쓰려고 취재차 만난 경찰관 이선우를 만나 묘한 시간들을 마주한다.

소설은 수진의 시점에 따라 그녀가 보내는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보여준다. 딸과 남편을 각각의 이름으로 부르며 객관적인 시선을 취하려 한다. 누구의 엄마와 아내가 아닌 자신의 글을 쓰는 한 사람으로서 서기 위한 외침으로 말이다. 수진의 친정 엄마가 가지고 있는 비밀과 그로 인해 수진이 견뎌야 했던 불안과 분노는 『어제는 봄』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정서로 작용한다. 수진이 왜 그토록 글을 쓰려 하고 딸 윤소은에게 주의사항을 전달하며 한 번씩 미친 사람처럼 화를 내는지 소설은 정확히 알려주지 않으려고 한다.

『어제는 봄』은 전부를 말하면 안 되는 소설이다. 혹은 전부를 이야기하지 않기 위해 쓴 소설처럼 친절한 서사를 보여주지 않는다. 수진의 과거에 잠들어 있는 비밀은 수진의 현재에게까지 찾아와 그녀를 미치게 만든다. 우리는 상상해야 한다. 수진의 세계에 갇혀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아니 상상하지 않아도 된다. 『어제는 봄』에서 최은미는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이야기의 혼란을 독서의 즐거움으로 느끼게 만들어 준다. 소설을 쓰는 사이에 육아 카페에 들어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글에 댓글을 달아 스트레스를 풀고 윤소은의 반에서 열리는 학부모 총회에 참여해 폴리스 맘 활동을 하기도 한다.

생활은 이어져야 하는데 수진은 가위로 일상을 자르고 싶다. 그 와중에 만난 이선우와의 시간을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다. 이야기의 전부를 보고 싶었지만 『어제는 봄』은 한쪽 면의 반도 보여주지 않은 채 끝난다. 이 소설은 누군가를 향한 익명의 러브 레터로도 읽을 수 있다. 이쪽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사랑을 고백하는 소설 『어제는 봄』의 주인공 수진의 시간이 '오늘도 봄'이 됨을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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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고 앉아 씁니다
아사이 료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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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이 료의 에세이 『웃기고 앉아 씁니다』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진짜 웃기고 앉아 쓰네였다. 『시간을 달리는 여유』에서 변의를 참지 못해 버스에서 내려 시골집으로 달려간 일화를 재미있게 읽었다. 과민성 대장 증후군인 아사이 료는 하루에 4.7회 정도 화장실에 간다고 밝힌다. 『웃기고 앉아 씁니다』는 일러두기에서 '저자는 예민한 장의 소유자다'라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아사이 료는 책에서 익살스럽게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한다. 안과 의사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워한다. 외부 행사에 나갈 때 입을 옷을 고민해 친구의 친구를 통해 스타일을 바꾸기도 한다. 배구 마니아로서 했던 뻘짓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는 일본의 젊은 작가로 통한다. 대학생 때 문단에 데뷔해 나오키 상까지 받았다. 그런 그의 출생연도는 1989년 생이다. 젊다. 회사에 입사해 출근하기 전 글을 쓰고 점심때도 혼자 밥을 먹고 글을 쓴다. 회사원과 소설가로 두 세계에 발을 디디며 우뚝, 까지는 아니지만 굳건히 서 있다. 『웃기고 앉아 씁니다』를 읽으면 아사이 료는 항문 질환 때문에 앉아 있는 것보다 서 있는 것이 낫다는 걸 알 수 있다. 잘못된 진단 때문에 4년 넘게 항문에 병을 키웠다. 그리하여 병원 순례를 반복하여 열흘 동안 입원하며 수술을 받는 치료기록인 「항문기」가 탄생한다. 장엄할 정도의 치루 치유기인 「항문기」를 내가 왜 읽고 있어야 하나 의구심이 들지만 재미있다. 남의 고통을 즐거워하면 안 되지만 아사이 료의 에세이는 즐겁다.

배구 시합에 가서 팀원을 구하지 못해 서류 접수하는 아주머니와 팀을 이루고 세무사의 결혼식에 가서 이벤트를 하려고 소설가 유즈키 아사코와 노래와 춤을 연습한다. 일상을 담은 열두 편의 에세이와 신문 연재에 쓴 글 그리고 대망의 「항문기」까지 『웃기고 앉아 씁니다』는 독자를 웃기고 울린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했던 결혼식 웨이터 체험기, 외국에 나가는 친구를 위해 밴드 연주를 준비해주는 과정이 다채롭게 소설가의 일상을 장식한다. 국내에 아사이 료의 소설은 두 편 나와 있다. 『내 친구 기리마시 동아리 그만둔대』와 『누구』이다. 두 편 다 일본 내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누구』를 읽었는데 구직을 하는 인터넷 세대의 기묘한 이야기를 반전있게 그리고 있었다. 영상화하기 좋은 소재와 독특한 구성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에세이와 소설은 다른 감각으로 쓰인다. 아사이 료는 에세이에서 일상의 아사이 료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밴드 연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자신의 사진을 책에 실을 정도로 뻔뻔한 모습도 갖추고 있다. 좋아하는 배구를 마음껏 하고 치루가 부디 치유되기를 기원한다. 그리되면 국내에 나오는 대로 그의 소설을 힘껏 읽어주겠다. 도넛 방석에 앉아 글을 쓰다가 춤을 추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무엇인지 아는 소설가 아사이 료의 매일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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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무민 골짜기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8
토베 얀손 지음, 최정근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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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 골짜기에 가을이 찾아오자 스너프킨은 천막을 걷고 길을 떠난다. 토베 얀손의 무민 연작 소설 여덟 번째 이야기 『늦가을 무민 골짜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귀여운 캐릭터로만 알았던 무민의 이야기를 이제야 제대로 읽었다. 무민은 거인 트롤로서 얼굴이 하얗고 포동 포동 하고 마음이 따뜻하다. 무민 골짜기에서 무민 파파와 무민 마마, 미이와 함께 살아간다. 『늦가을 무민 골짜기』는 무민 가족이 겨울을 앞두고 집을 비워 놓고 여행을 떠난 이후의 일을 그린다. 무민 가족이 없는 집에 친구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무민 가족과 지냈던 여름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추운 겨울을 함께 보내려고 찾아온다.

청소하다가 죽을뻔한 필리용크를 비롯해 친구들은 무민 가족을 애타게 찾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다. 저마다의 사정을 가지고 무민의 집에 몰려든 친구들은 소동을 벌이고 화해하고 마음의 짐을 덜어낸다. 처음 읽은 무민 이야기인데 무민이 나오지 않아서 서운했지만 개성 강한 친구들의 활약을 보고 있으니 소란스럽고 즐거웠다. 그렇다. 『늦가을 무민 골짜기』는 무민 가족이 나오지 않는 유일한 시리즈이다. 방랑자 스너프킨이 떠나면 무민 골짜기에 추운 겨울이 찾아온다는 신호이다. 규칙적이고 모험을 좋아하는 스너프킨도 무민의 집에 들어온 친구들과 함께 늦가을을 보낸다.

맛있는 음식을 해주는 무민 마마도 고민을 들어주는 무민 파파도 없는 집에서 친구들은 잘 지낼 수 있을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읽을 수 있는 무민 연작 시리즈는 귀여운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개성과 다름을 인정하는 여정을 보여준다. 무민 가족이 없는 집에서 친구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걱정과 불안을 안고 있느라 밥을 해 먹는 간단한 일과에도 의견을 모으지 못한다. 그럴 때 그들은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한다. 일상을 두렵게 만드는 존재를 피하는 것이 아닌 마주 보는 것이다.

무민세대라는 말이 있다. 없을 '무'(無)에 의미하다를 뜻하는 '민'(mean)을 조합해서 만든 신조어이다. 각박하고 경쟁에 치여 사는 사람들이 의미가 없는 일을 하면서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말인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와 비슷한 맥락이다. 귀엽고 포동포동한 무민의 이름에서 빌려와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무민 이야기를 읽으며 의미 없음에 슬퍼하는 것이 아닌 의미가 없어도 좋은 시간을 보낸다. 무민의 친구들처럼 방 안을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고 걱정이 있으면 뒤뜰에 나가 혼자 시간을 보낸다. 『늦가을 무민 골짜기』에서 벌어지는 친구들의 하루하루는 내게도 필요한 시간이다. 그것이 의미가 있든 없든 간에 말이다.

무민 없는 무민의 이야기를 읽고 났더니 무민이 등장하는 다른 이야기도 읽고 싶어졌다. 골짜기에는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무민 골짜기의 다른 풍경도 궁금하다. 무민의 집에 모인 친구들은 각자의 고민을 덜어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혼자 남은 토프트는 무민 가족을 기다린다. 멀리 무민 가족이 탄 배의 불빛이 보인다. 친구들이 가진 고민과 해결하는 모습을 보며 힘을 내자,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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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
하유지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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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고민과 슬픔이 쌓여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시간에 바쳐지는 소설 『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 오해와 분노로 아버지를 보낸 영오는 서른셋의 시간을 살면서 화해하는 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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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
하유지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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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었다는 실감을 하는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 셀카를 찍어 못난 얼굴을 확인할 때. 요즘 애들이 듣는 노래를 따라 부르지 못할 때. 많이 잤는데도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뻐근해서 눈만 겨우 뜨고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 더 쓰고 싶은데 눈물이 앞을 가려서 이만 줄인다. 매 순간 나이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쓸쓸해질 것 같아 의식하지 않고 지내려고 한다. 주민번호를 불러야 하는 순간 정도에 이렇게나 많이 먹었어, 놀라고 있다. 하유지의 소설 『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의 주인공 오영오는 서른셋이 되는 순간에도 회사에 남아 일을 한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철야 작업을 하는 것이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서른셋이 되었다. 회사에서.

앞으로 말해도 오영오, 뒤로 말해도 오영오는 문제집을 만드는 편집자이다. 새 학기에 맞추어 야식을 먹어가며 일을 하고 있다. 서른셋이 된 지금 오영오는 혼자 살아간다. 엄마와 아버지 둘 다 죽었다. 아버지는 영오에게 약간의 보증금과 엄마가 쓰던 압력 밥솥, 수첩을 남겼다. 영오에게라고 시작한 수첩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영오는 아버지의 유언 같은 수첩의 이름들을 찾아 나선다. 소설은 한 사람의 쓸쓸한 서른셋의 순간을 따라간다. 보일러가 고장난 원룸에 혼자서 살고 있는 영오의 주변에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영오가 편집한 문제집에서 재미있는 객관식 문제를 발견해 전화를 걸어오는 미지. 아버지가 남겨 준 수첩에 적힌 첫 번째 이름의 수학 선생 홍강주. 맛 집으로 소문난 김밥 집 할머니 문옥봉. 그리고 한 명은 명보라. 보라는 책의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정체를 밝히지 않겠다. (뭐야, 앞에 미지, 강주, 옥봉의 정체를 밝혀 놓고 이제 와서 오리발이야 하고 말하면 할 말은 없다.) 그들이 영오 곁으로 모여들면서 영오의 서른셋은 낡은 천장에 붙여 놓은 야광별처럼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고민과 슬픔이 쌓여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시간에 바쳐지는 소설 『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 오해와 분노로 아버지를 보낸 영오는 서른셋의 시간을 살면서 화해하는 법을 배운다. 아버지는 혼자 남겨질 영오를 위해 수첩을 준비한다. 그 안에는 영오를 위해 함께 손잡아 줄 사람들이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은 혼자라는 막막한 기분에 휩싸일 때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설이다. 대책 없는 위로와 용기를 준다. 서른셋은 이제 서른넷이 될 것이다. 영오의 서른넷과 나의 내일에 적힐 희망의 이름을 떠올려 본다. 내가 가질 압력 밥솥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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