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빛깔들의 밤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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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의 장편 소설 『모든 빛깔들의 밤』은 서늘한 스릴러를 표방한다. 방심한 상태로 읽어 나가다가 긴장을 느껴야 했다. 시간을 넘나들며 한 아이의 죽음을 둘러싼 암시와 처절한 슬픔을 보여준다. 아이를 묻은 나무 아래를 찾아간 남자의 이야기부터 소설은 출발한다. 죽은 아이가 나타난다는 소문을 들은 남자는 힘겹게 숲으로 간다.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남자는 통곡을 한다.

과거의 시간은 현재로 넘어온다. 할아버지를 보러 가는 아기와 엄마. 기차를 탄 모자는 다정하다. 공간이 바뀌고 조제실에서 약을 짓던 희중은 뉴스를 본다. 기차가 탈선을 했다는 소식. 희중은 밖으로 뛰쳐나간다. 자신이 직접 예매한 그 기차에 아내와 아이가 타고 있었던 것이다. 돈을 받지 못한 트럭 운전사가 선로에 누워 자살을 했다. 열차는 멈춰 섰고 침하된 지반을 만나 큰 사고로 이어졌다.

불이 난 열차 안에서 희중의 아내, 조안은 선택을 했다. 그 선택으로 인해 희중과 조안의 현재는 비틀어진다. 소설 중후반에 가서 과거의 비밀이 그들의 현재를 압도해 나갔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모든 빛깔들의 밤』은 낯설고 기이한 형태로 끝나게 된다. 비밀과 거짓말이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소설은 묻는다. 꼭꼭 숨겨서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없게 만드는 게 나을까. 진실을 왜곡한 형태로 거짓말로 사건을 가리는 게 나을까.

『모든 빛깔들의 밤』은 죽음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난다. 1991년에 죽은 아이로 인해 여러 사람들의 삶이 일그러진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아이는 세상에 다시 등장한다. 23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말이다.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갈 뿐이다. 다만 죽음이 지금 여기에 있지 않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모든 빛깔들의 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과거에 죽음을 겪으며 현재를 살아간다. 비밀과 거짓말로 선택해 숨겨 두거나 가리면서.

소설의 결말에 다다르면 숨을 참게 된다. 희중이 마주한 놀라운 진실 때문이다. 아이의 죽음으로 무너진 삶을 복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설 속의 인물들. 그들이 겪어내는 실패를 보면서 현실의 나는 결코 괜찮아질 수 없다. 소설은 현실을 더 좋게 더 괜찮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읽는다. 헙, 하고 숨이 막히는 『모든 빛깔들의 밤』의 마지막 장을 넘기니 바로(전자책으로 읽어서 가능하다) 소설의 출간 날짜가 찍혀 있었다. '초판 발행 2014년 12월 1일'

소설에서 죽은 아이들은 모두 현실을 떠나지 못한다. 아이들뿐 아니다. 열차 안에서 죽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이곳을 떠돈다. 믿기지 않는 죽음 앞에서 산 자들은 헛것이라고 생각될지라도 죽은 이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 간절한 바람을 들은 것일까. 죽은 그들이 찾아온다. 희중을 도와준 노인은 말한다. 잊을 수 없으면 지워야 하고, 지울 수 없으면 죽여야 한다고. 과격한 표현이지만 산 자들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제의로써 그들을 한 번 더 죽여야 한다.

괜찮아질 수 없어 괜찮은 척 살아간다. 비밀과 거짓말을 선택해서 그럴듯한 얼굴로 살아가면 안 된다는 것을 『모든 빛깔들의 밤』은 말한다. 진실을 아는 자는 입을 열어야 한다. 그것이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위해 살아 있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한 번 더 죽인다는 건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지우게 해서 그들의 분노와 고통을 죽인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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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병동
가키야 미우 지음, 송경원 옮김 / 왼쪽주머니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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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후회왕이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 어떤 일에 대해서 항상 미련을 갖고 산다. 왜 그 일을 했나. 왜 그 일은 안 했나. 물건을 사도 후회. 안 사도 후회. 조금 과장하자면 하루를 후회하는 일로 보내는 듯하다. 먹어서 후회. 안 먹어서 후회. 오랫동안 이런 상태로 살다 보니 후회하는 일이 나의 일이 되어버린 듯. 죽기 전 나는 삶에 대해서 후회만 하다 눈을 감을 것 같다. 후회하지 않는 오늘을 보내라고 한다. 말이 쉽지.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만족하며 떠나겠지.

가키야 미우의 『후회병동』은 연명 치료를 거부한 시한부 환자들의 마지막 순간을 따뜻하고 정감 있게 그려낸다. 나이와 연령이 다양한 환자들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서른셋으로 유방암 말기의 마이코. IT 회사 직원으로 일만 하다 병을 얻은 휴가. 말기 암 환자인 일흔여섯의 유키무라. 췌장에 생긴 암이 간으로 전이된 야에가시. 네 명의 환자를 돌보는 의사 루미코를 중심으로 병동의 이야기는 펼쳐진다.

루미코는 타인과의 대화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젊은 애인과 떠나버린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 혼자 루미코를 길렀다.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서글픔을 채워주려 했다. 의대에 진학해 어머니의 자랑이 되었지만 사회성은 좋지 못하다. 환자에게 건네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어려워한다. 그런 루미코가 뜰에 놓인 청진기를 주우면서 소설은 흥미진진해진다. 청진기를 환자의 가슴에 대는 순간 환자의 속마음이 읽히는 것이다.

청진기를 통해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마음을 헤아린다. 그들이 생에 있어서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를 듣는다. 어쩌면 다른 선택을 했다면 펼쳐졌을 인생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환자 자신들은 다른 인생을 경험하면서 삶의 의미를 깨달으며 죽음을 맞이한다. 후회로 가득한 삶이었다. 죽음이란 마치 내게서 머나먼 일처럼 행동했다. 그런 마음으로 그들은 루미코가 보여주는 인생의 문을 통해 들어가 다른 삶을 살아본다.

결과는? 옳고 그름은 없다. 자신이 선택한 삶에 최선을 다한 것으로 만족하면 된다. 그때 그 일을 했어야 했나. 했다면 좀 더 나은 인생을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후회의 마음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할 필요는 없다고 『후회병동』은 말한다. "선생님, 하루하루를 소중히 하세요. 누구나 죽게 되어 있고,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 정도가 딱 좋지 않나 싶어요." 젊은 아내와 아이를 남겨 두고 떠나야 하는 휴가는 이렇게 말한다.

격렬하게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최선이라고 믿는 길로 후회하지 않고 걸어가면 된다. 나의 선택과 결심을 존중하면서 말이다. 일상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삶의 의미를 다감하게 일러주는 『후회병동』. 하루가 버겁고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는 마음이 들 때 읽으면 씩씩하게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는 소설이다. 환자의 마음을 읽어내는 청진기를 통해 루미코 자신도 인생의 빛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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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어 우리 딸 - 나는 이렇게 은재아빠가 되었다
서효인 지음 / 난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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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몰랐어.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걸 물으면 취향이 없어 우물쭈물하기 바빴지. 기껏 말한다는 게 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이러고 나면 그건 그냥 농담이 되는 거야. 고기는 말고도 좋아하는 어른이 아주 많거든. 나는 이제 은재 네가 좋아. 다운증후군을 가진 친구들이 좋아. 사람들이 그러더라. 우리 아이들이 바로 천사라고. 밝게 웃어주고 유머를 즐기고 참을성이 깊다고. 네가 자라면 무엇이 될까. 천사는 직업이 아니니까 직장에서는 네 정체를 숨겨야 해!
(서효인, 『잘 왔어 우리 딸』中에서)

은재는 좋겠다. 시인 아빠 서효인과 함께라서. 대학 때는 술을 마시고 당구 치는 걸 좋아했고. 좋아하는 애인이 문학을 좋아해서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문학을 더 좋아하는 척했다. 좋아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속도를 살짝 올려서 결혼을 했다. 결혼 전에 무수히 많은 난관들을 헤치면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살게 되었다. 목포에서 올라온 엄마와 집을 보러 다니고 감자탕을 먹고. 그나마 본 집 중에서 볕이 들고 공원이 있는 집을 계약했다.

시인 아빠는 아이의 이름을 미리 지어 두었다. '사랑의 재능'이라는 뜻을 가진 은재로. 태명은 땅콩이. 조심조심 지내며 태어날 아이를 기다렸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세상의 소리는 잠시 멈췄다. 울어야 할 아이는 울지 못했다. 대신 이런 말들이 들렸다. '다운 같지? 네 그런 것 같아요. 생긴 게 그렇지? 얼른 데려가. 얼른.' 구급차를 타고 큰 병원으로 갔다. 인큐베이터 안의 은재는 작았다. 아내가 있는 병원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집을 함께 보러 다녀준 엄마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택시 운전사는 요금을 깎아 주며 아내를 잘 돌보라고 했다.

『잘 왔어 우리 딸』은 시인 서효인이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아빠가 엄마를 만나기 전으로 시작해서 은재 너를 갖게 되고 태어나서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기 위해 쓰였다. 다른 아이들보다 염색체가 하나 많은 은재에게 아빠는 말한다. 괜찮아, 잘 왔어, 난 네가 좋아라고. 서효인은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다고 밝힌다. 기껏해야 고기 정도를 좋아한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비싼 소고기보다 삼겹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딸아이를 가장 좋아하는 아빠가 된다. 『잘 왔어 우리 딸』은 은재를 위한 마음과 아빠로서 더 잘하고 싶은 책임이 가득 담겼다. '은재'로 시작한 책은 '당신'으로 끝이 난다. 누구보다 용기가 필요하고 필요했을 '당신'에게 서효인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다독인다. '누구의 어머니 아버지가 아닌 우리 자신으로, 동시에 부모로 가족으로 살'아 가자고 이야기한다. 천사는 직업이 될 수 없다고 아빠는 은재에게 말한다. 그러니 네 정체를 잘 숨기라고도.

문학이 아닌 바깥의 영역에서 인과 관계를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 된다. 시인 서효인은 그것을 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다. 엄마 곁이 아닌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서 있어야 할 은재에게 '신생아집중치료실의 보스'라고 별명을 붙여 주면서 지금 보다 괜찮아지기를 기대한다. 태어난 아이에게 조금 늦게 도착한 축복의 말을 감사하게 여긴다.

아침이를 타고 가는 긴 귀성길에도 은재는 칭얼대지 않는다. 좁은 차 안에서 힘들었을 텐데. '사랑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골고루 나누어 주는 것으로 제 몫을 다 해낸다. 잘 웃고 뒤집기를 해내며 걷고 태어날 동생을 기다리며 지구 위에서 반짝인다. 나중에 은재가 커서 『잘 왔어 우리 딸』을 읽게 된다면 이토록 가득한 사랑의 온기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음에 얼마나 황홀해할지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힌다. 좋겠다. 좋겠어. 마구 부럽다고 말해본다.

두렵고 당황했던 마음을 딛고 고기와 커피보다 좋은 마법사 은재를 만나며 시인은 그렇게 아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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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 미혼출산
가키야 미우 지음, 권경하 옮김 / 늘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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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마흔이 되는 유코에게 걱정거리가 생겼다. 여행사에서 과장으로 일하는 그녀. 얼마 전에 캄보디아 출장에서 부하 직원인 미즈노와 분위기에 취해 얼떨결에 하룻밤을 보내고 말았다. 가키야 미우의 소설 『40세, 미혼출산』은 유코가 임신임을 확인하는 일로 시작한다. 먼저 든 생각은 자신의 나이. 이십대는 사내에서 유부남과 연애를 했다. 그 일로 결혼 시기를 놓쳐 버렸다. 일과 결혼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먼 나라의 일처럼 느껴진 유코였다. 결심을 한다. 자신에게 찾아온 아이를 낳겠다고. 결혼은 그 후의 문제다. 유코는 임신을 한 상태로 아버지의 7주기에 참여한다. 그곳에서 아직은 폐쇄적인 결혼관을 가진 친척들을 만난다. 마흔이 다 되어 가는데 결혼을 하지 않는 유코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친척들. 여자 나이 마흔이면 결혼도 출산도 무리라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동창들. 유코의 결심은 흔들린다.

회사 내에서도 은근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화장실에 누가 있는 줄 모르고 언니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부하 직원인 미즈노는 자신의 아이냐고 물어본다. 미즈노가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알아 유코는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게 시작이었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부르고 일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40세, 미혼출산』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결코 가볍지 않은 소재를 이끌어 가는 서사의 힘이 놀랍다.

유코는 아이를 낳아도 끝까지 회사에 남아 일하고 싶다. 육아 휴직을 쓰고 보육원에 보내고 단축 근무를 하고 싶다. 일본 사회가 가지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40세, 미혼출산』에는 그대로 드러나 있다. 노골적으로 퇴직을 강요하는 부장. 호주제를 중심으로 여성에게 불리한 법적 제도. 소설에서 유코의 어머니는 딸의 임신 사실을 알고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은 유코의 남자 동창들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들에게 법적인 아버지가 되어 달라고 한다. 서글픈 현실을 딛고 유코는 어떤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겠구나. 여성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에서는 더더욱. 유코는 흔들리기도 하고 실수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소설은 유코 혼자 나아가게 두지 않는다. 좌충우돌이지만 유코 주변의 사람들은 유코의 결심을 지지하고 도움을 준다. 차별과 배제를 극복하는 청량한 용기를 유코의 이야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에게서 치유받으면서 『40세, 미혼출산』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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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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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15일 이후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나의 기분의 형태란 중간이 없는 그야말로 극과 극의 상태를 오랫동안 자랑해 왔다. 좋고 싫음이 분명해서 금방 좋았다가 금방 싫었다가. 평정심이 뭐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존경한다.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니까. 수요일에서 목요일로 넘어가는 그 시간 이후로 기분은 내내 좋음과 맑음과 환희의 감정을 유지하고 있다. 잠을 덜 잤는데도 피곤하지 않고(커피를 많이 마셔서 그런가) 소소하게 행복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쉬는 날인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이렇게 된 건 우연한 일 때문이었다. 꼬박꼬박 뉴스를 보지도 않았고 보더라도 연예면을 기웃거리는 정도였다. 정치와 사회에 관심이 1도 없었는데. 사람은 변화하기보다는 가보지 않은 길에 발을 들여놓고 개미지옥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태로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는다. 세상이 바뀔 것이란 기대는 없다. 내가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관심을 보인다고 해서 없던 게 있게 되고 보기 싫은 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저 왜 아파해야 하고 눈물 흘리는 이에게 위로를 보내야 하는지 합당한 이유를 알게 되어서 다행한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기분이 내내 좋은 상태로 김금희의 산문집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을 읽었다. 새벽 1시에 잠이 들었는데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요즘은 4시가 넘어서 자고 있다. 고요한 새벽의 공기를 흡입하며 책을 읽어 나갔다. 역시나 김금희의 산문은 김금희의 소설처럼 다정이 넘치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긴 문장으로 숨을 참아가며 읽어야 해서, 좋았다. 당연하지. 소설과 산문을 쓰는 모든 주체는 김금희니까. 나는 김금희에게서만은 아무런 비판도 꼬여 있는 감정도 없는 상태로 당신이 쓰는 모든 글을 좋아해 주겠어라는 마음으로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니까. 그런 마음가짐은 문학에서 멀어진 오랫동안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다.

올해 초 김금희는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에도 잠깐 나오지만 그는 문학을 앓는 내내 이상문학상을 염원했고 소원했다. 언젠가는 수상자 목록에 자신이 들어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언니가 사온 그 책들을 읽곤 했었다. 그런 상을 거부한다고 상에 따라오는 불공정한 계약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내었다. 아, 내가 소설가 하나는 잘 보는구나. 「조중균의 세계」를 읽고 단박에 좋아해서 나오는 책을 모조리 읽고 리뷰를 쓴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나 스스로를 칭찬했다.

에스엔에스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 일 이후에 소설가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계정이라도 파서 응원의 말을 해야 하나 했지만, 게으름이 이겼다. 그저 소란과 수군거림에서 멀어져 있기를 빌어보는 수밖에.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은 작가가 되어 십일 년 동안 쓴 산문을 모은 책이다. 산문은 약간의 허구가 곁들여 있긴 하지만 개인적이고 사소한 취향을 엿볼 수 있어 나는 선호한다. 대학생 때 방학의 풍경으로 글은 시작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중간에 먹었던 김밥의 기억(김밥의 추억으로 쓰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배를 채운다는 목적밖에는 없는 그 식사의 풍경은 추억이 될 수 없고 감정이 섞이지 않는 단어인 기억으로 대체한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오래된 티셔츠를 입고 귤을 까먹는 방학의 나날. 급기야 벌레가 꼬인 귤을 변기에 그대로 버려 가족들이 경악했던 사건을 담담히 들려준다. 부당한 걸 부당하다고 말하기까지 오랜 망설임과 고민이 『사랑 밖의 모든 말들』에 담겨 있다. 영화를 보고 소설과 시를 읽고 지금의 여기와 다르지 않게 행동하는데도 여행을 떠난다. 김금희는 어떻게 소설가 김금희가 될 수 있었는지를 천천히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의 글을 통해 들려준다. 혼자 있으면 안 된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머리도 감지 않고 약속 장소에 나가고 조카 준이의 덤덤한 위로를 받으며 힘에 버거운 시간을 통과한다.

돈 벌러 나가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터넷 세상을 기웃거리다 보면 새벽이 된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을 읽는 새벽이면 나는 어떠한 글도 모조리 쓸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나도 강성은의 『 Lo-fi 』 좋아하는데 반가워하며. 제발트는 제발 읽어야지 했다가도 포기하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꼭 읽어야지 다짐도 해가며. 그렇게 새벽의 시간을 보내고 흥분된 기분을 꼭꼭 눌러가며 잠의 세계로 의무적으로 들어갔다. 책 뒤쪽에는 부록으로 '사랑 밖의 모든 색인'이 있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에 쓰인 단어를 빈도수로 추출해 가장 적게 쓰인 단어부터 진한 색 순으로 묶어 놓았다. 춤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나는 색인. 점점 옅어지는 글자를 보고 있다보면 요즘에 내가 사용하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춤과 사랑 사이. 사랑과 춤 사이에 적힌 김금희의 언어들과 비교해보면 나의 색인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소설과 시를 쓰지 않은지는 오래이고 그나마 쓴다는 글은 글보다는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한 답답한 말뿐이니까.

소설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나쁨'에 대한 지겨운 고백을 듣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울어야 할 일과 절대 울고 싶지 않은 일, 되돌려주고 싶은 모욕과 부끄러움, 한순간 광포한 것으로 변해버리는 환멸과 후회들이 차창 밖처럼 연속된다. 나는 누구나 아주 나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고 믿고 나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한계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떤 소설은 어느 나쁘지 않은 오후에 누군가의 문상을 가듯 읽어 주었으면. 우리는 언젠가 이 세계에서 지워져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이들이 되겠지만 아직 우리는 내가 나빴습니까, 하고 더 물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러므로 문상을 가는 우리의 얼굴이란 다 젖었다가도 마르고 어두워졌다가도 다시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김금희, 『사랑 밖의 모든 말들』中에서)

내가 왜 그토록 소설에 매달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인 건 아니고 안다, 확실히 아는 건 아니고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나는 내내 '나쁨' 상태에 있었다. 나의 안위와 기분과 소유에만 열이 올라 있었다. 이른바 우리와 연대, 사회, 책임 같은 걸 생각하지 않았다. 잘못된 일에는 눈을 돌렸고 회피함으로써 책무를 다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모두 간절했던 그 시간 2014년 4월 16일을 살았고 아픈 엄마와 병원에 있으면서 텔레비전에서 봤던 광화문 광장의 촛불을 잊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다.

소설에는 나의 잘못이 있었다. 나의 나약함과 비겁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사랑이 아닌 말들 속에 살았던 나의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다. 이제 사랑 바깥의 말들로 살아가려 한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에 들어 있는 사랑이 아니면 쓸 수 없었던 한 사람의 과거 때문에라도. 나는 힘이 없어도 힘이 있는 척 욕을 할 수 있다면 나지막이 욕을 뱉으며 명확한 '나쁨'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아이들이 다시 학교로 가고 어울려서 씽씽이를 탈 수 있기를 바라며. 무엇을 바꾼다는 추상의 말보다 오늘의 나를 기분 좋게 만들 수 있는 아이스크림과 빵, 마스크를 사러 가자 같은 구체의 말을 주고받으며. 사랑과 춤 사이를 채워 넣을 수 있는 힘이 있는 말을 많이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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